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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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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5)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고별 설교의 마지막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주고자 하는 사회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무엇인가 얻고자하고 빼앗고자 하는 세계는 이 세상입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40).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고 했습니다. 

여기 "세대"는 세상이 아니라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는 주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특징인 상대주의, 휴머니즘, 인본주의, 물질주의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수(禽獸)들의 세계는 자신만이 독식하려고 하는 세계입니다. 주는 자는 위에 있는 자입니다.

아랫사람에게 수고한 값으로 내리는 돈을 행하(行下)라고 합니다. 옛날 양반들은 돈을 직접 손에 대는 것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랫사람들에게 행하(行下)할 때 접시에 돈을 담아오게 하여 젓가락으로 집어 주었다고 하여 여염집에서는 젓가락돈이라고 했습니다.

양반집의 어른이 죽을 때 자손들에게 행하(行下)를 풍족하게 내리는 자손이 되라고 유언했습니다. 참으로 차원 높은 유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행하를 풍족하게 내릴 수 있는 자손은 곧 종이 아니고 높은 지위의 상전이라야 되기 때문입니다. 
경주 최씨의 조상격인 최부자가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우리 집 반경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하라.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를 매입하지 말라. 벼슬은 진사(進士)이상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경주 최씨 가문의 부(富)가 당대에 끝나지 않고 자자손손 대대토록 이어져 가게 하라는 의미심장한 유언입니다. 

이 세상의 일반 대중들은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삶의 목표를 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본능을 헌납하고 이 땅에서 자신이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하는데 삶의 목표를 세웁니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고 한 것은 일반 대중들의 사고의 한계를 넘는 말씀입니다. 

Ⅰ. 소유욕을 억제하라는 말입니다. 

본문 20장 35절에 『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사실 복음서에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상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이 누가복음 6장 38절에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고 하는 말씀입니다. 

소유욕을 억제하지 못하면 남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마 19:17-18). 부자 청년은 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했습니다(마 19:20).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하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마 19:21).

그 청년이 재물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소유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마 19:22). 이어서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였습니다(미 19:24).
전도서 11장 1절에 『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는 말씀은 소유욕과 물욕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 박사는 백사 이항복의 10대 후손으로 6형제가 6천석이나 되는 토지를 팔았습니다. 요즘 돈으로 따지면 600억 원의 자금을 가지고 30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 
정부 수립 후 이러한 공로를 기리어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았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소유욕을 억제하고 더 높은 가치관을 향해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Ⅱ.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8절에 『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지상의 행복과 불행에서 완전히 독립하는 현자(賢者)의 개념과는 다른 행복관입니다. 오복(五福) 중에 하나인 유호덕(攸好德-도덕을 지킴을 낙으로 삼는 일)의 개념도 아닙니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지족(知足-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앎)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얻어지는 지족을 말합니다. 

지족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 추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풍족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궁핍한 중에서도 감사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에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욥기 1장 21절에 『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5장 15절에 『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인생은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되면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마 6:33).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습니다(마 10:8). 우리에게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과 영적인 모든 은사는 주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을 가지고 경제원리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약 1:17).

Ⅲ.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순리(順理)라 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20장 35절에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순리(順理-이치와 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이 순리라는 말입니다.
여기 약한 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요, 신체적으로 약점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욥기 22장 24-25절에 『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갈취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물욕에 대해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십의 구(九)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나의 수입 전부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십분의 일만 취하시겠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것을 가지고 있지 말고 주어야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의식화시켜서 행동화하라는 말입니다.

Ⅳ. 주는 자의 복이 무엇입니까?

1) 구약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물질의 복은 신명기와 잠언, 시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습니다(신 7:12-15, 8:9-18, 15:4, 30:9; 잠언 10:22)
욥은 동방의 의인이지만 부를 겸했습니다(욥 1:10). 욥의 말년에는 처음보다 훨씬 많은 재물의 복을 받았습니다(욥 42:12).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창 13:2).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조카 롯과 동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창 13:6).
이삭도 거부였습니다(창 26:13).
시편에도 경건하고 정직한 자들의 후손은 부와 재물의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시 112:1-9).

의인은 부자가 된다고 했습니다(잠 15:6). 오른손에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다고 했습니다(잠 3:16).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복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오직 현세와 지상에서의 물질의 풍요를 복으로 단정 짓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복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만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시편 1편 1-2절에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시 73:28). 
하나님의 뜰에서 사는 특권을 복이라고 했습니다(시 65:4).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 16:5).
구약에서도 신령하고 영적인 복의 개념을 얼마든지 말하고 있습니다.

2) 신약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구약과는 달리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찾기 힘듭니다.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정욕을 추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요일 2:16-17).
사도 바울은 내세의 가치는 현세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후 4:16-18).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지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복이었습니다(엡 3:7-9).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은 복의 개념을 정리하는데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팔복을 통해서 볼 때 일반적인 사고에 대한 역설적인 개념을 복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들과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이런 약한 자들은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 우리가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기 때문입니다(눅 14:12-14).
따라서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 갚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선을 베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천국에서 누리는 영생의 복입니다. 상급 중에 가장 좋은 상은 천국에서 받는 상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계 14:13). 
복의 내용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복을 영적이고 종말론적인데서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자신이 하실 수 있는 것까지도 모두 다 내려놓으시고 포기해 버리셨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받을 줄만 알고 주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인을 많이 모으는 자가 성공한 목회자로 통합니다. 그렇다면 쫓겨 다닌 

바울은 실패한 목회자입니까? 
저는 연세대학교 졸업식을 보고 고려신학교 졸업식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연세대학교 학칙에 교수는 기독교 사상에 합의한 자인데 현재 재직 중인 교수 60%가 불신자입니다. 옥스퍼드,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의 기독교 대학도 모두 성경의 교훈을 멀리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구약에서 물질적 복에 대한 구약성경의 약속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단계의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의 연약한 것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주어진 은혜의 방편들입니다.
칼빈은 부를 다가오는 세상에서의 풍요함에 대한 표지로 보았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영원한 영적 복에 비할 때 물질적 부와 지상적 복들은 먼지와 겨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구약에서 현세적 복을 약속한 바가 없다고까지 단언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구약시대에 족장들은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 세상에서 전혀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복음이 현세적 즐거움 이상의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이 세상 넘어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은 본향(히 11:16), 더 큰 약속(벧후 1:4), 지극히 큰 상급(창 15:1), 더 나은 제사(히 11:4)는 이 세상의 것과 대조가 됩니다.
이 세상의 현세적 복은 오히려 악인들이 더 많이 누리고 있지만 그들의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에 부러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시 92:5-7).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잠 23:17)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 24:1). 악인들은 잠깐 자기에게 주어진 날을 즐길 뿐입니다. 그 다음은 지옥에 내려갑니다(욥 21:13).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라고 했습니다(잠 21:4).
물질적 복은 진정한 복의 모형입니다. 진정한 복의 상징입니다.
기독신자는 물질을 천대시하거나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물질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복은 영원한 복입니다.
일시적이고 파편적이고 잠깐 동안에 있다가 사라지는 복이 아니라 영원히 나와 함께 하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복은 이 지상에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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