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천사의 얼굴 (행 6:15, 7:54-60)

첨부 1


천사의 얼굴 (행 6:15, 7:54-60)


Ⅰ. 예수 닮은 얼굴

요즘은 겨울에도 보신탕을 즐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친구 목사님 세 분을 모시고 삼계탕 보신탕으로 유명한 자기교회 집사님이 경영하는 식당엘 갔습니다. 주인 집사님이 반겨 맞으며 VIP실로 직접 안내를 했습니다. 

“목사님, 뭐 드실래요?”  “보신탕 집에 왔으니 개지 뭐. 나 보신탕!”
“목사님도 개요?”  “네”  “목사님도 개지요?”  “네”
주방을 향해 소리를 칩니다.  “여기 방에 개 넷!”
졸지에 목사 넷이 개가 되었습니다. 
한분 목사님은 나오면서 머리에 개털모자까지 쓰고 나오더랍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란 뜻입니다. 면류관은 잘 살다가 잘 죽은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순교자만이 받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 천국에 가면 주님께 드릴 면류관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됩니다.  
오늘 우리 한소망 교회의 자랑과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배당은 자랑일 수 없습니다. 교회성장도 귀한 일이지만 참된 의미의 자랑은 아닙니다. 

성도의 자랑도, 교회의 자랑도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본문의 스데반은 그 성품이, 그 기도가, 그 삶이 예수를 닮고 나니 그 얼굴이 예수의 얼굴 - 천사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독일 민담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괴물의 얼굴을 하고 추한 짓을 하고 살던 사람이 예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가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 성자의 가면을 쓰고 구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고 몇 년 동안 진정으로 부인을 사랑하며 성자처럼 살았습니다. 몇 년후 남편이 쓰고 있는 것이 가면임을 알게 된 부인이 사기 결혼임을 알고 가면을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가면속의 얼굴은 괴물이 아니라 성자의 얼굴로 이미 변하여 있었습니다. 성자의 얼굴을 하고 성자의 마음을 품고 성자처럼 살았던 그는 이미 성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백범 김구 선생은 서당에서도 그리고 보통 학교에서도 “정상수업을 따라 갈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제일 하급관리 시험에서 그는 보기좋게 두 번씩이나 낙방했습니다. 어느 날 관상쟁이가 찾아와 “당신의 관상은 흉상이요. 천한상이요. 어디에 나설 사람이 못되오. 평생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할 게요”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고 평생 남을 섬기는 자리에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섬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줄로 알고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한국 근대사의 가장 빛나는 얼굴이 되었던 게지요.

어느 날 아침 문득 여러분들이 거울 앞에 섰을 때에 거기 비춰진 여러분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아가십니까? 성령이 충만하고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그 눈에는 영롱한 비전이 이글거리고 있고 그의 가슴 속에는 예수의 사랑이 불타 이글거리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미움과 원한으로 가득 찬 얼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해 찌든 얼굴, 피곤하게 허둥대는 얼굴, 절망에 찬 얼굴, 평안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서 있지는 않습니까?

Ⅱ. 얼굴

얼굴은 사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얼굴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우리말에 얼굴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인격을 늘 대표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다느니, 얼굴을 내민다느니, 얼굴이 안선다느니, 면목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네 이놈아 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라.  내 얼굴을 봐서 한번만 부탁 합니다”여기 얼굴은 인격이나 이름 전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자신의 얼굴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 모습을 바꾸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인생가치관이 얼마나 건강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건강한 얼굴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의학적으로 사람의 피부는 4년마다 한번씩 바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얼굴이 예쁘게 보이려고 맛사지를 하고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만 사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나면 아무리 바른다고 해도 별로 신통치가 않습니다.

여러분 3년 동안만 울고 찌푸리고 한숨쉬고 다른 사람 미워하며 살아보세요.  피부 색깔도 얼굴모양도 그렇게 찌들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3년동안만 성령충만한 가운데 사랑하고 늘 기뻐하며 살아보십시오. 모든 사람을 가슴을 품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빛나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또 다른 여러분의 얼굴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과 태도는 즐거운 얼굴을 만들게끔 되어 있고 슬픈 마음은 어두운 얼굴을 만들고 짜증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판적인 마음은 부정적인 얼굴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은 재정을 맡은 집사였습니다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다섯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망신시키려고 변론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무명의 전도자 스데반에게 패배를 당한 다섯 지방의 종교지도자들은 분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망신을 당했어! 아예 스데반을 죽여 버리자!” 그리하여 그들은 무서운 살인극을 꾸미게 됩니다. 먼저 돈을 주고 힘깨나 쓰고 말깨나 하는 깡패 몇 사람을 사서 가짜 증인으로 내 세웁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교회의 원로급 장로들을 포섭했고, 재판관과 국회의원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에게 사형이 집행되게끔 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그들의 생각이 뒤틀리고 말았습니다.  

“틀림없이 스데반 녀석 살려달라고 두손을 싹싹 빌겠지. 그러다가 안되면 피를 줄줄 흘리며 흉직한 얼굴을 하고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갈면서 우리를 저주하며 발악 할거야.” 그런데 개처럼 끌려온 스데반의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입에서 거룩한 천사의 음성이 터져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눈을 감는 그 모습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고 주님 앞에 들리움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천사의 얼굴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속세에 찌든 몇몇 얼굴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이중인격을 가진 두 얼굴의 사나이들입니다.  

국회의원, 장로, 서기관 그리고 다섯 지방의 회당장으로 묘사된 당대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지금 스데반에게 죄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흉직한 살인극을 꾸미고 있습니다.  

차라리 선과 악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거니와 백성의 지도자임네 사회의 스승임네 대접받는 이 사람들의 실제 행동은 썩고 추하고 냄새나는 짓거리들이었으니 속과 겉이 다른 두 얼굴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2. 둘째, 본문의 거울 속에 졸장부 얼굴들이 보입니다.  

거짓증인들입니다. 몸은 튼튼하고 힘께나 쓰고 거기다 글줄이나 배워 말은 제법 똑똑히 했던 모양입니다. 돈 몇푼 받아먹고 악의 하수인이 되어 거짓증인이 된 그 못난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건장한 장부의 얼굴 같으나 실상은 째째하기 그지없는 졸장부 중에 졸장부들입니다.

이들은 의인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피를 보자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을 터이니 가히 그 험악한 얼굴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3. 셋째, 가을녘 논바닥에 늘어져 있는 허수아비 같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저마다 겉옷을 길바닥에 깔며 종려가지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더니 군중심리에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부르짖더니 오늘은 스데반을 향하여 저마다 충혈된 눈으로 손에 돌을 들어 던지는 가증스러운 얼굴들 말입니다.

Ⅲ. 예수처럼 죽어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에 시류에 놀아나는 그들의 얼굴은 분명히 허수아비의 얼굴입니다. 혼도 없고 생명도 없고 가치판단 기준도 도덕도 양심도 없는 얼굴들이 이 땅에 얼마나 판을 치고 있습니까?

이럴 때 하나님께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세상에 스데반 같은 이가 한사람 있다는게 얼마나 신선한 일입니까? 그런데 왜 스데반이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까?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주님을 그토록 열렬하게 증거하며 살았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를 토하며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때 도대체 무엇을 하셨더란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스데반이 나처럼 죽기를 나는 원했노라. 그냥 죽지 않고 천사의 얼굴로 죽어 가는 것을 원했노라”

예수님은 얼마든지 흉악한 악당들이 돌을 던질 때 돌을 거꾸로 바람에 날릴 수 있는 분입니다. 중국영화만 보더라도 장풍하는 사람들이 돌이 날라오면 휴~ 해서 돌멩이를 거꾸로 날아가게 하는데 예수님이 그것 못하시겠습니까?  하늘에 벼락이 번쩍~ 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불고기로 만들 수 있는 분이시죠.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스데반이 나처럼 죽기를 나는 원했노라. 너희들이 이땅에 살아가면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죽음의 자리, 고난의 자리, 고통의 자리를 피해가는 편안한 삶이 아니고 순간순간 삶의 현장에서 순교자로 살아가는 너의 모습, 예수 안에서 죽고 살아나는 신비를 깨닫고 살아가는 그 모습! 스데반이 나처럼 기도하고, 스데반이 나를 닮아가는 것을 나는 원했노라.” 

예수님 내게 왜 긴 세월동안 고통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까? 충성하겠다 헌신하겠다 바로 살아보겠다 몸부림하는 나를 왜 고통 가운데 외면하고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까?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저렇게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이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고난과 시련과 고통과 환란 가운데 신음하며 몸부림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나는 그 고통을 내가 너에게 얼마든지 면해 줄 수 있지만 그 가운데 내가 진정으로 복음의 증인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내가 보기를 원한다. 고통 가운데 나를 닮아 가는 너의 모습을 내가 기대하노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진 것 없지만, 당당하게 살아왔고 당당하게 죽을 수 있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의 신비, 복음의 신비를 그 얼굴로 풍기며 향기를 토설하며 살아가기를 내가 기대하노라.”

Ⅳ. 천사의 얼굴

스데반의 그 영광스런 얼굴! 천사의 얼굴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시작하는 6장 15절에 보면 전도하다가 잡혀온 스데반의 얼굴에 대한 인상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가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느때 쯤이나 우리는 그 얼굴에서 내가 죽고 살아난 신비의 얼굴,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

1. 먼저, 성경은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집사로 선출될 때 그 자격을 보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오늘 돌무더기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스데반의 그 모습을 성경의 기록자는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만”하다는 얘기는 내가 죽어 0(제로)가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했다.  나는 죽어 제로가 되고 내 온 얼굴은 성령으로 온전히 가득차 있었다 그 얘기 아니겠습니까? 은혜가 충만했다는 얘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죽어 제로가 되고 내 얼굴과 내 온 삶이 은혜로 흘러 넘친다 그 얘기 아니겠습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신 것이다. 예수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나는 제로가 되고 예수그리스도가 내 삶속에 온전히 살아 역사하는 삶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충만한 생활을 하며 예수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 날 거울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거울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 스데반의 얼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내게 맡겨진 책임을 다 완수했다고 하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습니다.

여러분! 무거운 책임감을 다 마쳤을 때 찾아오는 그 유쾌한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스데반의 공식적인 책임은 교회의 재정적 책임을 감당하는 집사였고, 스데반 내면 속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에게 지상 명령으로 남겨주신 복음을 전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과 죽음을 스데반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 하나님께서 내게 짊어 주신 소명, 그것을 내가 온전히 감당했다는 기쁨 때문에 그 얼굴에는 당당함이 위엄이 천사의 얼굴로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우리에게 허락하듯이 잘 살아간 한 평생은 편안한 죽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도다!” 그는 설흔의 나이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서 다 이루었도다 말씀했던 것처럼 스데반은 젊은 나이에 돌무더기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지만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맡겨주신 생명의 의미에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다. 내게 맡겨주신 책임과 의무에 있어서 하늘을 우러러 나는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 다 이루었도다 그 당당함이 천사의 얼굴을 그에게 허락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섬기는 일, 교회 밖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의 책임, 이것은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거룩한 직분이요 책임이다. 이것은 나의 소명이요 사명이다. 여러분, 천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천사는 하늘 나라에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가 천사입니다. 이 땅에서 섬기며 살았던 사람이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는 게지요.

언제나 자기를 죽이지 못해서 자기를 드러내기를 원했던 사람, 자기라는 벽에 갇혀 살던 사람, 자아가 꺾어지지 못하여 자아를 가슴에 끌어안고 평생을 몸부림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자기를 끌어안고 주님 앞에 몸부림하며 기도하다가 자기가 죽어지는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죽어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내가 죽어 교회를 살리고 내가 썩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어느날 거울 앞에 서는 낮익은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야! 감탄하는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3. 셋째, 용서하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돌멩이가 날아오는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스데반은 돌멩이를 쳐다본 것이 아니라 그 위를 쳐다 보았고 충혈된 살인마들의 눈동자를 쳐다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 보았습니다. 저 공중을 쳐다 본 것이 아니고 예수를 보고 하나님을 본 것이지요.

예수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이라면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이 순간 뭐라고 기도했을까? 예수님이라면 이 순간에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이 원망과 이 저주를 어떻게 삭히셨을까?

예수님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스데반의 눈이 열렸습니다. 하늘 거튼이 젖혀지며 하늘 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실 수가 없어 자리에 벌떡 일어나 서서 있었습니다.  “스데반아 힘을 내라. 스데반아 담대하라. 스데반아 나를 보려무나.” 스데반의 눈에 예수님이 들어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입에서는 예수님의 기도가 토해질수 있었던 것이고 예수님의 용서가 감히 선언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험악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다 못알아준다. 억울하다” 

다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문제는 내 눈에 예수님이 들어오느냐 안들어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해야 하는 시간에 미운사람을 묵상하고 있으면 얼굴에 미운 사람이 박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얼굴에 미운 사람을 닮아가는 거예요.

문제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에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내 눈 앞에 우뚝 서 계신데 거기 무슨 원망이 있고 미움이 있겠어요.  
“주님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감히 용서의 기도가 선언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기도가 사죄의 기도였다고 하면 스데반의 기도는 용서를 선언한 기도였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남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용서하지 못하고는 천사의 얼굴이 불가능 한 것이지요.

여러분 천사의 얼굴을 원하십니까? 원수 맺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가슴에 맺힌 무엇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용서하십시오. 언제나 용서하는 자가 큰자이며 높은 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용서할 때 천사의 얼굴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이번 새벽부흥회를 계속하며 하나님은 제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자식을, 친구를, 교우를... 그래야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악마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천사가 악마입니다. 천사의 얼굴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가는 죄인들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누군가 당신의 가슴에 상처를 주어 용서할 수 없고 오랜세월 미움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 다 용서하지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고 떠난 그 사람. 그 사람만큼 내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다짐해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거울을 보십시오. 문득 낮익은 한 천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용서만큼 어려운게 없지요. 철저하게 내가 죽어지지 않고서는 이 땅에 용서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되는 겁니다.

4. 네 번째,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스데반은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께 깨끗이 맡겨 버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내가 이 땅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박수와 갈채의 삶을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충성하고 헌신하려고 했는데 내가 걸어간 길은 가시밭 길 돌짝밭 길 고난의 길 환란의 길 뿐이었다 할지라도 천국문 열고 주님이 나를 영접해 주신다면 그게 영광이지요. 주님이 나를 인정해 준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에 인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담대히 위탁하는 사람이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 수 있는 거지요.  

조금 전에 우리가 불렀던 찬송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금세기 초 (1904년) 아내 시빌라(Civilla)가 쓴 시에다가 남편 월터 마틴 (Walter Martin)이 곡을 붙인 찬송입니다. 아내 시빌라는 뉴욕병원에서 중병으로 임종을 기다리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남편 월터 마틴은 잠시도 아내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을 하고 있었지요. 예배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목사였던 남편은 교회 갈 생각을 않고 아내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다녀오세요 예배를 인도하고 다녀오세요 교인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없는 동안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거예요.” 예배를 인도하고 서둘러 병실에 돌아왔을 때 병실 안이 환하도록 빛나는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아내는 남편의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어 주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것이 이 땅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지요.

장례를 치르고 그 종이를 펴보니 오늘 우리가 불렀던 찬송 432장 찬송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내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임종을 맞이하는 그 고통중에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 있구나! 그러면서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여보, 목회하는 구석구석마다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지켜 주실 거예요.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없는 삶을 산다는게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의 삶을 지켜주실 거예요.  

때로는 배고픈 날이 있을 것이고 병들어 신음해야 되는 날이 있을 것이고 인간관계가 얽혀서 고통해야 되는 날이 있을 것이고 인정받지 못하고 오해받아 신음해야 되는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은 당신을 지켜 주실 거예요. 근심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아름다운 찬송시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던 것이지요.  병실 안이 환하도록 빛났던 아내의 얼굴! 내가 천국문에 들어갔을 때에 그 아내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 그러면서 미친듯이 찬송을 써 내려 간 것이 오늘 우리가 부르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이 되었습니다.

Ⅴ. 내 인생 마지막 날에? 

한국교회사의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목사는 청년 목사로 동양 선교에 꿈을 가지고 중국에 와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 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젊은 아내가 열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를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에 한국인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나 한국선교의 시급성을 알고 한문성경을 들고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쇄국정책으로 입항이 거절되고 드디어 그가 탄 배는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내 몸이 불타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성경책이 불탈까 아까워서 대동강변에 성경책을 뿌리게 됩니다. 성경책을 뿌리면서 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성경이 씻긴 물을 마신 자마다 예수 알게 하시고, 이 성경이 녹아진 물이 흘러 들어가는 땅마다 예수복음 전해지게 하옵소서.”  드디어 그는 강변에서 체포되어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그는 그의 목을 치는 망나니를 향하여 “예수!  예수!  예수!”를 외쳤습니다. 그의 피는 한국땅을 적셨고, 그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최초의 한 알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그의 아호를 “소양”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이란 뜻입니다. 평소에 그는 마음속에 예수님의 어린양으로서 제물이 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순교직전에 했던 일사 각오의 설교 가운데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인생, 그리스도인답게 태어나 그리스도인답게 죽을 수 있다면 나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내게는 일사 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부탁드립니다. 십자가 붙들고 쓰러질 때 내 영혼 받아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그분은 죽어갔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천사의 얼굴을 남겼습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에서 당신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그 순간 여러분의 가족과 목사와 교인들에게 어떤 얼굴을 남기시렵니까? 하늘의 고요함과 성령의 평안함, 기쁘고 즐거운 찬양으로 가득찬 천사의 얼굴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까? 저 얼굴이 저 장로님의 얼굴이 저 권사님의 얼굴이 과연 천사의 얼굴이야. 저 얼굴이 승리의 얼굴이야.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마지막 내 얼굴을 추억할 때마다 우리 아버지의 얼굴은 참으로 당당한 얼굴이었다. 주님 곁으로 다가가는 영광스러운 얼굴이었다. 내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자신을 죽이고 우리를 빛나게 했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죽여 다른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었던 영광의 얼굴, 천사의 얼굴 승리의 얼굴이었다. 당당하고 위엄있는 얼굴을 자녀들에게 남기고 싶지 않습니까?  

주경가 바클레이는 “스데반이 남겼던 천사의 얼굴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 사울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사랑의 원자 폭탄을 터트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주경가는 “천사의 얼굴은 사울을 포로했다”고 얘기합니다. 천사의 얼굴을 보는 사도 바울이 충격을 받아 위대한 사도바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은 원수를 친구로 만듭니다. 핍박자를 위대한 전도자로 만드는 위대한 감화력이 있습니다. 비굴하고 천박한 얼굴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죽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한 얼굴, 천사의 얼굴을 이 땅에서 만들어 가지 않겠습니까?

어느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낮익은 얼굴, 웃으며 당신을 맞이해 주는 얼굴, 천사의 얼굴을 만나게 보게 될 것입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이 어디서 낮익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데 천사의 얼굴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