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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어떻게 해야 하나요?(2)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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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어떻게 해야 하나요?(2) (요 1:43-51) 

어느 부부가 신혼때 말다툼을 했답니다. 아내가 말대꾸를 하니까 
“지난번 결혼식 때 목사님이 말씀 했잖어,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라고, 잊어버렸어?” 

그러자 아내는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요즘은 땅 값이 하늘 위로 치솟는 것도 몰라!”   

그러다가 이제 딸을 낳아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여자가 남자 보다 두 살이 더 많은데 남편이 “밥” 하면 아내가 “예 잠시만요” “물줘!” 하면 “예” 하며 아내는 남편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딸이 묻었답니다. “엄마는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왜 존댓말을 해?” 

“응~ 안 그러면 쟤 삐져”

좀 썰렁한가요? 

중년이 되어 남편이 회사 회식이 있어 새벽에야 들어 왔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사정사정하여 겨우 들어갔는데 그 새벽에 남편에게 따발총 같은 잔소리를 했답니다. 남편이 어쩔 수 없었다고 이유를 다니까 더 화가 난 아내가 “찍 소리도 하지마~!!”라고 소리쳤답니다. 

그러자 그 남편은 "찍...." 하고 잤답니다. 
어느덧 미운정 고운정 붙어 나이 70이 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고등학교 동창회를 다녀왔답니다. 얼굴이 시무룩하여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왜 그려” 라고 하자 할머니는 “별일 아니유” 라고 하더랍니다. 할머니 눈치를 보던 할아버지는 “별일 아니긴 ..... 뭔일 있구먼” 라고 하자 할머니는 빽 소리치며 “아니라니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옛날 잘못한 일을 생각하며 “당신만 밍크코트가 읍썼어?” 

그래도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당신만 다이아반지가 읍었어?” 그래도 침묵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그럼 뭐여~?”라고 하자 할머니 왈 “에휴~ 나만 남편이 살아있슈.”  

요즘은 오래 사는 것도 스트레스랍니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종류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합니다. 경제적인 부담 스트레스, 자녀교육 스트레스, 직장에서의 겪는 엄무 스트레스, 기타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각종 스트레스로 인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찾아오는 각종 스트레스가 다 나쁜 것은 아니랍니다. 게중에는 우리 인생에 활력을 주는 좋은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도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런 무거운 짐을 혼자지지 말고 주님께로 다 오라고 하십니다. 마11:28절 이하를 보세요.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자세히 보세요.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마음이 쉼을 얻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것이 아닌 가벼운 것으로 변하게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보는 시각(視角)의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그것이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을 주는 통로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문제가 아닌 복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영적인 스트레스는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는 전도 일로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걱정은 세상 걱정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고전9장16~17절을 보세요.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복음을 전하는 일, 그것은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다고 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몇 분이나 됩니까? 왜 묻냐고요?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옆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분 옆에 붙여 주셨을까요? 보나 마나입니다.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계획입니다. 

그들을 복음을 통해 구해내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해야 구해낼 수 있을까요? 

지난주에 이어서 “전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는 제목으로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서 은혜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빌립을 불렀습니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이 빌립은 성경을 많이 읽고 메시아를 사모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통해 나다나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불러내실 때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부르실 때는 누구를 통해 부르셨나요? 
자기 발로 주님 앞에 나가셨나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시길 원하셔서 일찍부터 사람을 준비하셨고 그 사람을 통해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누군가를 부르시는 일에 쓰시는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나 혼자 잘 믿고 잘 먹고 잘 살라고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누군가가 복음의 통로가 되었듯이 나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주님이 쓰시는 구원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쓰시는 복음의 통로가 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가라고 그토록 명령하셨는데 유대인들은 끔쩍도 안합니다. 

보세요.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유대 땅도 안가고 더 더욱이 사마리아 땅에도 안갑니다. 기다려도 안가니 핍박을 일으켜서 강제로 가도록 흩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대 땅에, 사마리아 땅에 도망가게 합니다.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은 거기 가서도 먼저는 유대인들에게만 전합니다. 주님 승천하신지 20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백성이 30억이 넘습니다. 바벨탑 사건도 흩어지지 않으려다 망한 것입니다. 주님은 흩어져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했는데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임무 중에 하나는 모여서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흩어져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예배하고 흩어져서 전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부여된 사명이고 교회에 부여된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 여러분에게도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어떤 형태로든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복음은 흘러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변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구해 내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주변에 일가친척, 여러분 주변에 이웃, 친구,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대상들입니다. 
  

2. 사람을 구원시키는 분은 사람이 아닌 주님이십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사람을 만나주시고 그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아멘?   

요1:45을 보십시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분명하게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빌립을 먼저 구원하시고 빌립을 통해 나다나엘을 만납니다. 

그런데 빌립이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사람,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당대에는 구약성경의 명칭을 구약성경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저 “율법과 선지자” 또는 “모세와 선지자”라는 말로 구약 성경을 표시했습니다. 

그러기에 빌립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한 말은 “구약성경에 기록한 그이”, 곧 메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볼 때 빌립은 구약성경을 읽으며 예언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빌립은 그 즉시 한 동네에 살았던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빈정댑니다.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촌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는 것은 그의 편견이었습니다. 사실 나사렛은 유대 땅에서 시골 중에 시골입니다. 그러니 그런 촌구석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사아가 태어날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구약 미가5:2절을 보세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이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 나다나엘이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간단하게 “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왜죠? 예수님에게 와서 직접 만나보고 배워보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완벽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다 설명시키고 설득시켜서 나오게 하려면 안됩니다. 그저 와서 들어보고 만나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와서 만나보라 그리고 경험해 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데려 오는 것입니다. 
와서 듣게 하고, 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할은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에 말씀이 들어가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또 그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들어가면 우리가 거듭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히 4: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한마디로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도하고 주님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할 때 설득이나 어떤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석학이라 할 수 있는 “이어령” 박사를 보세요. 그가 주를 믿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떤 논리나 설득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의 사랑하는 딸 이민아 씨의 말 한 마디 때문입니다.   

그 딸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LA 지방검사로 있었고, 변호사로 있었습니다. 그런 딸을 이어령 박사는 늘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1992년 어느 날 그 딸에게 갑상선암이 발견됩니다. 치료를 받았는데 재발되어 1996년과 1999년에 수술을 합니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그 변호사의 아들, 즉 이박사의 외손주가 자폐아가 됩니다. 그리고 딸이 망막박리로 실명하게 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의사들도 수술도 안 되고 약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성경을 펴놓고 읽고 기도하며 찬송을 합니다. 
그 때 속으로 “이 바보야. 노래가 나오니?. 노래가 나오니?. 이 지경에 책이 읽혀지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답니다.   

이때 딸이 아버지에게 제안을 했답니다. 우리 교회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교회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결국 딸의 인도에 끌려 딱 한번만 교회에 가보자 라고 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딸과 함께 간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피아노나 풍금도 없어 키보드 찬송가 반주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이 못 되어 실명하리라 한 딸은 치료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특별한 논리로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나다나엘도 빌립이 “와서 보라”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에게 왔던 것입니다. 데리고 오면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좋은 전도는 “와 보라” 입니다. 여러분을 변화시킨 것은 전도자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그저 인도했고 변화시켜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3.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로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시고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1:47절을 보세요.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 간단한 말 한마디에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고 하였을 때 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진정으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간사(奸詐)가 없다는 말,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성경을 보면 “도로스”(δολος)라는 단어로 쓰였는데 고기를 잡기 위하여 던지는 “미끼”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실 미끼는 고기를 속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그의 마음속에 속이는 것이 없이 정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게도 미끼를 던져보고, 세상에도 미끼를 던져보는 이중성이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속을 보십니다. 그러기에 “간사”가 없기를 축원합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이 어떻게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실 누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어떤 사람의 마음도 읽을 수 없습니다. 투시 은사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마음의 상태와 영적인 상태까지 읽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그러한 예수님을 보고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러한 나다나엘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다나엘이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나다나엘은 처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나겠느냐”고 빈정대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라는 말 한 마디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무화과나무 아래”라고 하는 표현을 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몇 개의 본문이 있습니다. 성경을 몇군데 봅시다. 

미가서 4:3-4절입니다. 
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또 스가랴서 3:10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았다”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평화롭고 풍요한 시대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았다는 것은 단순히 무화과나무만이 아니라 메시아가 와서 세울 평화의 나라를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의 이러한 속마음과 영적인 상태까지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은 이러한 주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하세요. 
주님은 우리 속도 아시고 우리 과거도 미래도 아십니다. 
또 여러분이 먼저 주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먼저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주님을 먼저 안 것이 아니고 주님이 먼저 아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나닙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요15:16절을 보세요.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전도의 통로가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이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화시키는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성경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알기 전에 이미 주님은 나를 먼저 아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택함 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전도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변화시키고 주님이 천국일꾼 만들어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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