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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 서라 (빌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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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 서라 (빌 4:1-7)


지난 2010년 1월 아이티에 엄청난 지진이 엄습했습니다. 진도 7의 강진이 한 차례 있었고, 이후 45차례의 여진이 나라 전체를 흔들어댔습니다. 이 때 대통령궁과 국회 의사당을 포함한 국가의 주요 건물들이 붕괴됐거나 손상됐습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인구가 아이티 전체 인구의 1/3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자도 22만 명이 넘었고, 부상자 수도 30만 명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외신이 전하는 현장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TV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넋이 나갈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거리마다 온통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습니다. 

특히 마음속에 두고두고 남는 장면 하나가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무너진 집을 바라보며 이렇게 절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이 분은 기독교 신자인데 지진으로 집도 흔들렸고, 삶의 기반도 흔들렸고, 심지어 믿음까지도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심할 경우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 때 마음까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더 심할 경우 믿음마저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 때 믿음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고, 흔들리는 삶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심각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공동체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교인들의 믿음도 크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강타한 문제는 한 마디로 내우외환(內憂外患)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파벌이 생겼고, 서로간의 시기와 적대감으로 분쟁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심각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숭배하던 자들의 박해가 심했습니다.

이런 내우외환의 상황은 빌립보 교회를 요동치게 했습니다. 공동체가 심각하게 흔들렸고, 그 안에서 교인들의 믿음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런 소식을 전해 듣게 됐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붓을 들고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주 안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빌립보 교회, 흔들리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라’는 말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원어 헬라어로는 “스테케테”(stekete)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군사 용어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특히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라 명령할 때 사용되던 말입니다.

지난 날 군 복무 시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동북방 최전방 철책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늘 정신교육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이 자리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적이 도발해 올 때 우리에게 후퇴는 없다.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며 후방의 주력부대가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당시 저희 부대는 전쟁이 나면 목숨 걸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사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서라’는 명령은 끝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 안에’라는 말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자리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자리를 잡고 그 자리를 끝까지 고수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사탄이 갖가지 시험들로, 갖가지 유혹으로, 갖가지 위협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댈 때, 끝까지 넘어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 목숨 걸고 주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흔들어댑니다. 그래서 삶의 기반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마음도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믿음마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주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넘어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 안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1절을 보면 “이와 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7절에서 “이와 같이”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주 안에 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를 기둥처럼 섬기던 두 명의 여 집사로 추정됩니다. 멀리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이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알 정도라면, 이 두 사람은 빌립보 교회의 유력한 여성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 두 사람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갈등하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갈등이 빌립보 교회 자체를 흔들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도 이 갈등에 휘말려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빌립보 교인들이 주 안에 서려면, 먼저 이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 해결을 위한 해결책으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갈등’(葛藤)이라는 말은 사람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갈’(葛)은 칡 나무를 말하고, 등(藤)은 등나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갈등이라는 말은 칡 나무와 등나무가 서로 뒤 엉켜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칡 나무와 등나무는 둘 다 덩굴식물입니다. 나무를 감아서 오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칡은 왼쪽으로 감아서 올라가고 등은 오른쪽으로 감아서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방향이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뒤엉킵니다. 그러다 둘 다 오르지 못하고 함께 고사하고 맙니다.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오르는 칡끼리는 같은 나무를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칡과 등은 지혜롭습니다. 서로 오르는 나무를 달리합니다. 칡은 주로 산에서 자리를 잡고, 등은 평지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서로 한 자리에서 뒤 엉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방향으로 오르는 칡들끼리 그리고 등들끼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갑니다. 같은 방향으로 올라 서로 다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갈등은 일어나지 않고 갈갈, 등등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갈등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르는 방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목할 일이 없습니다. 다툴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빌립보 교회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의 소리가 끊임이 없습니다.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외부의 박해로 교인들은 믿음을 지켜가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고, 교회는 언제 어떤 박해로 시련을 겪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인들의 마음은 모두가 우울해 있었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깝고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짐에 짓눌려있듯이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얼굴이 어두웠고 비통함이 가득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주 안에 서려면 이런 어두운 마음의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항상”이란 표현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고통 속에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답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이 그런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봐도 기뻐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 가운데 상록수(常綠樹)가 있습니다. 가을철이 되어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일 년 내내 푸른빛을 지니고 있는 나무를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 겨울에도 나뭇잎이 여전히 나무에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여전히 푸릅니다. 늘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는 물론이고 기뻐할 수 없을 때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들림을 막을 수 있고 주 안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3. 관용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원어 ‘에피에이케스’(epieikes)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양보하다’라는 동사 '에이코'(eiko)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관용이라는 말은 양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함과 사려 깊은 배려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이런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 서로가 자기들의 주장만 일삼았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한다든지 조금이라도 양보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힘이 들고 더 흔들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머지않아 주님께서 오셔서 친히 판단하시고 친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전 미국대통령 링컨의 리더십을 “관용의 리더십”이라 부릅니다. 대표적으로 대통령이 되자 그를 평생 괴롭힌 정적 스탠턴을 국방부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주위에서 반대가 심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는 죽여서 없애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없애야지요, 이제 그 사람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나는 적이 없어져서 좋고, 그처럼 능력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좋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특히 링컨은 원수를 마음속에서 없애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미우면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편지를 태워버립니다. 그 후 마음에서 증오를 삭이고, 전적으로 그 사람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립니다. 이제 그 사람과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관용의 핵심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앙금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유를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을 때 흔들리는 교회를 든든히 세울 수가 있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든든히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 서려면 관용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4.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6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를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염려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심각하게 흔들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믿음을 흔들어대기 때문입니다.

사실 염려는 일종의 영혼의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감기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면역력이 약할 때 감기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증식하면서 감기에 걸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염려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믿음이 부족할 때 이 염려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자리 잡으면서 의심, 불안, 좌절, 절망과 같은 마음의 병을 일으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심각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의 믿음도 심각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한 마디로 염려하게 되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믿음이 없어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물리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채워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심령에 평안이 가득하게 채워집니다. 그 평안이 우리를 뒤흔들던 염려를 몰아냅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가 주 안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치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심각하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주 안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서려면 우선 우리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 갈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염려를 떨쳐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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