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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창 2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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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창 22:1-13)

유대계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성’이라는 장편소설에 희한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문밖에서 일생을 기다리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문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일생을 문밖에서 서성입니다. 이 주인공이 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문밖에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가 한 발짝도 꼼짝하지 않고 그 문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공은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 하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주인공은 죽기 전 용기를 내어서 문지기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도대체 이 문을 그렇게 지키고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문지기는 주인공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하면서 “이 문은 바로 당신의 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해 지금까지 당신을 기다리면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번도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고 노크조차 하지 않더군요.” 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나를 맞아주고, 나를 도와주기 위한 문지기를 나를 방해하는 문지기로 잘못 생각하여 스스로 벽을 만들고 스스로 방해꾼을 만들고 그 방해꾼, 그 벽으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고 벽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입니다. 백 살 때, 그것도 그렇게 준다고 약속하고 난 후 정말로 오래간만에 허락하신 아들 이삭을 번제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번제가 어떤 제사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동물 같으면 팔다리를 다 잘라내어 각을 뜨고 내장을 드러낸 후 태워서 드리는 것이 번제인데, 이런 제사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식으로나 다른 무엇으로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 좀 불경스러운 말 같지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각을 떠서 제사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그런 주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 특히 어려운 것은 우리가 제 3자로만 볼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당사자가 되어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면 너무도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예가 신약에 있습니다. 

한 부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것은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이미 성공도 하였고, 제법 재산도 모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2%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2%밖에 분량이 되지 않았지만 전부다 인 것 같았는데, 그것은 2%의 부족함 때문에 자기 인생이 인생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납득이 되십니까? 다른 사람 일이라면 그냥 쉽게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나름대로 얼마의 재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는가? 처자가 있는 경우에 내 처자는 어떻게 하며 내 부모님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당장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부자청년에 대해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2)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함께 이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 청년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 청년이라고 명시 하지 않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는 그런 말씀을 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청년이 비록 실망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는 돌이켜서 예수님께 돌아왔기를 소망해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이 부자청년이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돌아간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리가 아닙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합니다. 옛날에는 요즘만큼 수명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청년은 아직 한참 살아야할 나이입니다. 부모님도 모셔야하고 처자식도 있으므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이런 일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하고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무리하고 비상식적인 일을 시키셨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는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을 볼 때마다 항상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라고 분명하게 나옵니다. 즉 진짜 이런 일을 해서 아이를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하고 인간적으로 말해서 못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하시지 않습니다. 할 만한 사람에게만 하십니다. 차라리 할 만한 사람이 되어서 이런 테스트를 받는 것이 복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걱정이 많이 되시는 분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또 한편으로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시험이 진정한 시험이 되려면 실제로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라는 인식이 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한 번 보고 마는 것, 장난처럼 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분명한 테스트이지만 이것과 유사한 일이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보아야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의 믿음에 따라서 때로 시험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라는 고린도 10장 13절 말씀처럼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십니다. 잘 감당하지 못할 사람에게는 적게,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좀 더 큰 시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시험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시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정말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객관적 제3자로서 이 본문을 보기 때문에 시험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 아브라함은 이것이 테스트인지 정말로 하나님께서 바치라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약에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대비해야합니다.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나에게 전달되었든지, 혹은 부모님을 통해서 왔든지 혹은 내 사랑하는 남편, 아내를 통해서 왔든지 혹은 자식을 통해서 왔든지 간에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해야합니다. 간혹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만 하면 ‘아멘’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확인하는 데는 통상 다섯 가지 혹은 네 가지의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공부하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지성 그리고 경험하신 모든 것에 비추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맞는지 생각하여야합니다. 여러분의 지식, 여러분의 경험, 여러분의 이성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판단해야합니다. 

두 번째,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성경을 보고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과연 하셨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만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인 우리 예수님으로부터 답을 받아야합니다. 과연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또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인지 성경을 통해서 보아야합니다. 

세 번째는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과정은 첫 번째 과정과 두 번째 과정을 반드시 거치고 가야합니다. 연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 번째 과정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세우실 때는 당신의 종이 잘 낫든지 못 낫든지 이런 일에 대해서 문외한이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 종을 통해서 계시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겸손하게 나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반드시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하다면 한 가지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도 잘 알고 이와 관련된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저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참 좋습니다. 가끔 하나님께서 그런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계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혹은 네 가지의 모든 과정을 거치고 그것을 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럴 때는 날짜를 정해야합니다. ‘하나님, 어느 날 몇 시까지 답을 주십시오. 그때까지는 제가 답을 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답을 낼 때는 우리가 모여서 결정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 혹은 자식들을 다 모아놓고 결정하는데 그 결정을 할 때 그것은 내가, 우리가, 우리 가정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계시 주신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미리 약속하고 결단하고 난 후 이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아주 중요한 과정이므로 반드시 거쳐야합니다. 

여러분, 믿음 좋은 척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좋아야지 척만 하면 안 됩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서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상식적으로 보기에 좀 무리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분명한 일이라면 이제부터는 내 눈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분명하다면 모든 시선, 모든 초점을 순종에 두어야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시험 핵심입니다. 이것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됩니다. 희한하게 바뀌게 됩니다.

한 도둑님이 있습니다. 보석가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석을 구경하는데 이 도둑님도 같이 구경합니다.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아주 진귀한 보석들을 구경하는데, 이 도둑님만 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한참 있다 이 도둑님이 다른 사람이 다 있음에도 재빠른 손길로 보석을 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그리하여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겨 유심히 보고 있던 주인에게 걸리고 맙니다. 주인이 이 도둑에게 도둑질하려면 도둑님같이 도둑질하여야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여러 사람들 앞에서 도둑질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이 도둑님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여보쇼, 내가 그러려고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이 보석을 보고 있다 보니 보석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디다.” 라고 말했는데 아주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만 보면 다른 쪽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내 시선을, 내 초점을 불가능한 쪽으로 맞추게 되면 불가능한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눈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란 기계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했습니다. 그 중에서 열 명이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이 열 명은 “그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그 사람들에 비해서 메뚜기입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거인만 보였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성만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 성이 자꾸 커져나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거인이었습니다. 이때 이 열 명의 정탐꾼 눈에는 그 거인보다 열 배, 백 배, 천 배, 만 배 거인이신 진짜 거인 하나님은 안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나안 사람들만 보다 보니 진짜 거인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초점을 거기다 맞추니 그렇습니다. 

이삭의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어도 잘못 믿었구나, 내가 들어도 잘못 들었구나, 우리 하나님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자에게 가진 것을 전부 다 팔아서 가나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시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 주님은 너무나 물정을 모르신다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순종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되면 순종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순종이 보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지 않습니까?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순종했습니다. 자기는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라 어느 시간에 어떤 곳에 물고기가 많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호수라는 곳이 대단히 큰 곳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 말씀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도 처음에는 초점을 잘못 맞추었습니다. 엘리사에게 갔더니 엘리사가 나와 보지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방안에 앉아서 요단강물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했을 때, 나아만은 초점을 잘못 맞추었습니다. 그는 나처럼 대단한 사람이 왔는데, 별 것 아닌 선지자가 대대적인 환영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건방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약국이고 아람은 강국이었습니다. 그는 강국의 최고의 장군이었고 더구나 강국의 왕이 특별하게 부탁했음에도 별 것 아닌 선지자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맨발로 뛰어나가 지극정성을 다해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주어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여러분, 예의가 있어야합니다.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합니다. 나라를 생각하고 조국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전체로 보면 나아만이 크게 틀린 바는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초점을 잘못 맞추었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한 사람들이 나아만의 종들이었습니다. 종들은 나아만에게 “장군님, 선지자가 당신에게 이것보다 더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라면 행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하물며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그냥 해보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목에 힘을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내가 요단강에 몸을 씻으려고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나아만은 진짜 장군이고 진짜 어른이었습니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종들의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난 후에 자기의 초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이지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눈을 가지십시오. 이런 시선을 가지십시오. 이런 사람이 진짜 어른입니다. 그는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종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어른입니다. 나아만은 거기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우리의 초점을 순종에 맞추었을 때,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릴 것인가?’ ‘재산이 하나도 없으면 부모님과 내 처자식은 어떻게 하는가?’ 라는 문제인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입니다. 어떤 비밀일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특별한 순종을 요구하실 때는 순종에 따르는 나머지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쓸데없이 ‘이것 하라, 저것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잘 구분하는 머리가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다보니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고 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좋은 것은 놓치고 귀한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자식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면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목사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전하는 그것만 하면 됩니다. 목사가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가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치료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물을 던지라고 했으면 그대로 던지면 됩니다. 물고기 잡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순종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출 것인지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결단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순종에, 하나님 말씀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직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까? 

아마 아브라함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바치라고 하는데 고민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출발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분명하게 순종을 선택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순종하려면 고뇌도 하고 고민도 해야 하고 울기도 해야 합니다. 그냥 쉽게 순종될 것 같습니까? 고통 없이 순종될 것 같습니까? 편하게 말하듯이 순종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언제 그랬나는 듯이 아침 일찍이 출발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양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13절).. 멋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12절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 더 이상 테스트가 필요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복된지 아십니까? 바로 여기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주십니까?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시험하십니다. 2차, 3차, 100차 시험까지 주십니다. 그렇게 다 넘어가면 더 이상 테스트가 없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16-18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 다 이런 하나님의 인정 그리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확실히 고대하고 게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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