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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문객 없는 장례식 (나 3: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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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객 없는 장례식 (나 3:7, 19)

사람이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장례식을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 기르는 일에 수고하고 덕을 세우며 산 사람들은 장례식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습니다. 상주도 여러 명이고 조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생을 사람과 교제하는 것도 싫어하고 자녀도 낳지 않으며 외롭게 산 사람들의 장례식에 가보면 상주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또 일생에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며 산 사람은 장례식에 위문을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죽었다고 손뼉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훔 3장은 앗수르 왕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입니다. 일반적으로 장송곡은 고인의 덕을 치하하고 죽음을 슬퍼하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멸망을 노래하는 장송곡은 일반적인 장송곡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Ⅰ. 앗수르 장송곡의 세 가지 특징 

첫째, 니느웨의 장례식에는 조문객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장례식에 와서 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나 3:7). 슬픔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와서 위로해도 위로받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마 2:18). 너무 슬퍼서 위로하러 와도 위로를 거절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의 경우는 위로할 자, 애곡할 자를 아무리 찾아봐도 올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주도 없고 조문하는 사람도 없는 황무한 장례식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앗수르 왕과 니느웨의 멸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박수치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나 3:19). 앗수르의 악행에 늘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들이 앗수르가 멸망하니까 기뻐하고 손뼉을 친다는 것입니다. 잘 죽었다며 자기가 행한 대로 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 11:10). 
 
셋째, 하나님께서도 앗수르의 죽음을 위로하지 않으시고 조롱하십니다. 이것을 거룩한 야유(Holy sarcasm)라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잠 1:26).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3:34).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하늘에서 비웃으십니다. 
 
나훔 2장 후반부터 3장까지 일곱 가지 조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멸망을 철저하게 조롱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나훔 2장 후반에 나오는 사자 조롱입니다. 니느웨 군사들은 사자 같고 니느웨는 사자의 굴과 같아서 먹을 것이 가득하더니 이제 그 사자들은 모두 칼에 죽었고 사자의 굴에는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자들과 사자의 굴에 있던 먹이는 모두 어디 갔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훔 3장 1~3절에 나오는 잔인성의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지나치게 잔인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바벨론에게 니느웨가 그 잔인함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나훔 3장 4~7절에 나오는 기생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기생처럼 열국을 미혹하더니 이제는 능욕 거리가 되었고 구경 거리가 되었다고 조롱합니다. 

넷째, 나훔 3장 8~11절에 나오는 노아몬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애굽의 수도인 노아몬(테베)을 멸망시키더니 이제는 너희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나훔 3장 12~14절 방비 조롱입니다. 니느웨가 바벨론을 향해 온갖 방비를 다 하더니 그 방비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성을 세웠지만 그 산성이 무너지는 것이 잘 익어 떨어지는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떨어지고 힘을 자랑하던 장정들은 연약한 여인처럼 된 것입니다. 

여섯째, 나훔 3장 15~17절에 나오는 메뚜기 조롱입니다. 니느웨에 장군들이 많다고 자랑하더니 모두 메뚜기 같이 날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나훔 3장 18절~19절에 나오는 장례식 조롱입니다. 너희 목자들이 잠들었는 줄 알았더니 죽었고 귀족들이 누워서 쉬고 있는 줄 알았더니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손뼉 치고 기뻐하는 이상한 장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조롱입니다. 

Ⅱ. 조문객이 없는 네 가지 이유 

앗수르 왕과 니느웨가 멸망해도 왜 조문객이 없고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조롱을 받습니까? 앗수르 왕과 니느웨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앗수르 왕과 니느웨는 네 가지 죄가 있었습니다. 
 
첫째, 앗수르는 극도로 이기적인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습니다. 피정복 국가의 문화, 행복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배려가 없습니다. 일단 나라를 정복하면 그 백성을 다 죽이고 일부는 살려줘서 온 세계에 앗수르가 자기 나라 백성을 다 죽였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습니다. 피정복 국가에도 인권이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 지켜달라고 항변하면 그 눈을 뽑아버리고 머리를 잘라 버렸습니다. 앗수르 왕 이외에 권리를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이기적인 나라나 사람이 멸망하면 아무도 위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덕을 끼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선을 베풀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기심은 결국 고독을 초래하고 고독은 멸망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이 행복하고 위로받는 길입니다. 자타에 유익한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자타에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기적인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앗수르는 극도로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 3:1). 궤휼은 거짓말을 뜻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속임수를 쓰고 폭력을 행하여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과 군대장관 랍사게는 열왕기하 18, 19장에서 히스기야 왕을 공격할 때도 백성을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항복하기만 하면 곡식과 포도주가 있고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으로 옮겨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곡식과 포도주가 없습니까? 앗수르 군대가 포위하고 괴롭히니까 못 먹는 것이지 없어서 못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 산헤립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대변을 먹으려 하며 너희 소변을 마시려 하느냐?”며 항복하면 좋은 땅으로 옮겨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만약 이때 예루살렘 백성이 이 말에 속아서 항복했다면 앗수르 왕은 줄을 세워 칼로 목을 쳤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처럼 거짓말을 잘하는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앗수르 왕이 죽고 귀족이 죽었는데도 사람들이 손뼉 치고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나 3:19). 

악행이라는 말은 잔인함을 뜻합니다. 앗수르 왕은 어쩌다 한번 잔인한 것이 아니고 항상 잔인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잔인한 사람은 죽어도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 12:10). 

악인들은 잔인하여 육축의 생명도 멸시하고 사람의 생명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죽어도 조문객이 없습니다. 오늘날 짐승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고속도로에 갔다 버립니다. 또 동물들을 학대하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즐기는 잔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잔인한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셋째, 앗수르는 교만한 나라였습니다. 인간을 향해 교만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교만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5절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왕하 18:35). 하나님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왕하 19:28). 

교만한 마음으로 손을 들어 하나님을 치는 자, 입을 열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고리’입니다. 갈고리로 코를 꿰어 아프다고 소리 지르니까 재갈을 먹여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렇게 자기 나라에 끌려가서 자기 아들들에게 죽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앗수르는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넷째, 앗수르는 음행과 마술을 가지고 열국을 미혹하는 나라였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주위에 위치한 매우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앗수르는 미의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니느웨 성에는 법이 있었는데 모든 앗수르의 여인들은 비너스 신전에서 평생 한 번 이상 모르는 낯선 남자와 음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여인들은 모르는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악령의 힘을 빌리는 마술이나 마법을 이용하고 갖가지 몸에 향수를 뿌렸습니다.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면서 남자들을 유혹해 비너스 신전에서 음행한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렇게 영적으로 악령을 숭배하고 육신적으로는 음행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앗수르가 열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미혹하는 수단이었습니다. 


Ⅲ. 하나님이 위로하지 않는 사람들 

이기심, 잔인함, 거짓말, 교만, 음행, 미혹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특징짓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이런 나라가 멸망하니까 손뼉을 치며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문하지 않고 손뼉 치는 것은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조롱하시고 위로하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중대한 일입니다. 우리가 망하거나 죽어도 조문객이 없다면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앗수르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훔이 예언하던 시대나 요나가 예언하던 시대나 앗수르의 죄는 동일합니다.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요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나훔 시대에는 앗수르 백성을 심판하시고 위로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요나 시대에는 회개하고 믿으라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왕과 모든 백성이 다 금식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고 나훔 시대에는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이것이 성경의 대명제입니다. 우리 가운데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칭함 받게 된 것입니다. 본래 의는 우리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의는 하나님께서 재판하실 때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법적인 의인 것입니다. 죄가 있어도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있음에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지옥의 영벌을 내리신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진리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다섯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죽어도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첫째,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내일로 미루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내일로 미루다가 영원히 믿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 24:25). 벨릭스가 바울에게 지금은 가고 조금 있으면 부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벨릭스는 다시 바울을 부르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자꾸 미루는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천국 가는 길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천국 가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은 넓은 길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왜 내가 이 길을 가도록 놔뒀냐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길이 아니라고 수백 번 더 이야기했음에도 계속 가지 않았냐?’고 하시며 네가 가는 길을 나는 위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셋째, 가족들의 눈물 어린 전도를 받고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족들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체험한 뒤 다른 가족에게 믿으라고 눈물로 호소해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지옥에 떨어지면서 하나님께 원망할 것입니다. 지옥이 이렇게 고통받는 곳인데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냐고 따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통해서 수백 번 말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아내 때문에 나와 있지만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분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도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불평해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넷째, 죄의 결과가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의 단물을 빨아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의 결과가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저는 28살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전에는 술집도 많이 다니고 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술집을 보니까 아주 캄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저런 어두운 것에서 헤맸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을 사랑하고 어두움 속에 계속 있겠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천국 들어갈 예복을 입습니다. 

어거스틴이 로마서 13장 12절을 읽다가 회심하여 그동안 데리고 살았던 첩들을 다 버리고 역사에 남는 위대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은 나무 깎아 페인트칠 해놓은 것을 신으로 모십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신입니까? 금으로 입혀서 번쩍거리면 그것이 신입니까? 그것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만들어놓고 아침마다 빌고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치 않는 사람들은 죽어도 하나님의 위로를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결론 

제가 한 가지 예언하겠습니다. 이 예언은 100%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데 장례식에 많은 조문객이 올 수 있는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장례식에 많이 안 올 것 같으면 지금부터라도 사람들을 확보해야 합니다. 짜장면을 사주면서라도 “야! 이거 먹고 내 장례식에 꼭 와줘라.” 이렇게 조문객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례식에 많이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 국민이 다 와도 하나님께서 조문하지 않으시면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위로하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사람이 살면서 눈물 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픈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감기가 얼마나 독한지 2~3주 만에 낫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가 죽으면 그 죽음을 귀하게 보시고 천국에서 받으시고 다시는 아프거나 병들 일이 없게 됩니다. 안아주시고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위로, 영생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보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이 위로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조롱하시는 것입니다. 

요나서와 나훔서의 차이는 하나님의 축복(weal)을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재앙(woe)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위로받는 여러분이 되시고 우리 가족들 가운데에서도 재앙을 당하는 가족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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