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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왕하 18:22-23, 요 1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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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왕하 18:22-23, 요 12:20-23)

조혜연이란 프로기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 ‘프로기사 캠퍼스를 걷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습니다. 조혜연기사는 11세에 프로 기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루이나이웨이, 박지은과 더불어 여자 바둑 트로이카로 불립니다. 

오래 전 18세 때 주일날 대국을 거부하여 마스터스 대회에 기권하여 온갖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일은 예배를 드린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켰습니다. 국가대표를 포기하지 여기저기에서 지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스라엘 신을 위해 조국을 버릴꺼냐”, “너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이단이다”, “한국기원은 조혜연을 제명하라”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얼마 전 어느 기자가 조기사에게 전화를 하여 “일요일 예배를 새벽에 보거나 하루 연기하면 안되나”고 물어보았더니 “그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더랍니다. 조혜연기사는 예배가 뭔지 아는 용감한 예배자입니다. 2005년에 주일 대국을 기권하였을 때는 “융통성을 발휘하라는 많은 분들의 조언을 따르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신앙적 융통성이 타협으로 변질될 때가 있습니다. 
  
예배 제일의 신앙과 사고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누구에게나 예배보다 어떤 다른 것이 앞서면 안 됩니다. “청교도들은 한 책만 읽는다. 그것은 성경이다. 청교도들은 한 가지 일만 한다. 그것은 예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하나님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다짐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러 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을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복음을 전하러 보내십니다. 광야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아프리카 전도의 문을 열었던 내시입니다. 사도행전 8:27에는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라고 합니다. 이 내시는 그 먼 길을 예배자로 예루살렘에 왔다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하여 아프리카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선교의 가치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아프리카와 남 아메리카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예배에 대한 열정입니다. 먼 길을 걸어서 예배 참석하는데 그 열정이 뜨겁고 대단합니다. 
  
제가 볼 때는 주일이 되면 성도들이 예배하러 오는 모습, 줄을 지어 에배당에 들어오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광경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주일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주일 아침에 주일학교 유년부의 새벽예배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좋아서 그 날이 기다려져진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동네를 돌면서 아이들을 깨워 같이 교회에 가곤 했습니다. 
  
저는 비교적 공부를 오래 했습니다. 잘 했다는 말이 아니고 길게 했다는 말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와 박사과정 까지 공부를 하다 보니 좀 오래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집에서 주일성수를 단단히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주일에는 절대 공부하면 안된다고 하셔서 오래 공부했지만 주일에는 단 일분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이면 예배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어릴 때 저의 선친께서 미국에 계실 때는 아버지께 편지 쓰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공부하면서 공부하지 않은 주일을 계산해보니 1,500일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4년이 조금 넘게 공부하지 않은 샘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성수주일한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사야 66:23에는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고 합니다. 모든 혈육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모든 혈육, 가족, 일가가 주 앞에서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 앞에서 예배하기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성경에는 헬라인 몇 명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헬라인이라고 밝힌 것은 헬라인이 예수를 믿고 예배하는 것이 아주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인이 개종하여 구약 종교인 유대교, 히브리종교를 믿게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헬라는 신의 나라입니다. 그렇게 많은 신을 섬기던 사람이 개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헬라인이 예배하러 온 것이 특별한 것입니다. 

  
첫째, 예배는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1에는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예배의 기본은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된 예배입니다.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청하여”라고 하는 말은 그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러 나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자 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어야 참 성도입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어야 참 예배자입니다.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사람은 잠시만 안 봐도 보고 싶은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보고 싶지 않으면 참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보는 것은 예배의 참 의미입니다. 예배 때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께서 첫 제자를 세우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첫 제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처음 두 제자를 세우게 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라고 봅니다. 요한은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익명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8에는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라고 합니다. 처음 제자들은 예수님 보기를 열망하고 “어디 계십니까?”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제자됨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예배함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예수님을 사랑함의 조건입니다. 제자됨의 첫 걸음은 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인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검고 흰 바탕의 예수님 얼굴 그림과 함께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모든 식탁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Christ is head of this house, Unseen guest to every meal, Silent listener to every conversation)라고 쓰인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위의 그림과 아래의 글은 따로 된 것인데 저의 선친께서 함께 붙여서 인쇄하여 공급한 것입니다. 
  
어느 크리스천 기자가 말을 타고 중국대륙을 가고 있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뵙기를 원했습니다. “주님 얼굴을 보기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땅에는 눈이 녹다만 부분이 얼룩얼룩하게 땅이 들어나 있었습니다. 얼른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어 현상하고 보니 그 사진에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보기를 열망하는 마음이 주님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 보기를 열망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기독교 영성 저술가인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기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님, 지금 저는 당신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를 보여주시지 않으시면 제 간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당시의 얼굴을 보여주소서. 당신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저로 하여금 언제나 주를 뵙게 하소서”. 이런 간절한 열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랍비 아브라함 헤쉘은 기도와 예배에서 성령의 능력은 그 전 시간에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예배 전에 잡담하거나 수다를 떨지 말라고 합니다. 내적으로 정화된 맑은 영으로 예배에 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립니다. 
  
역대하 9:23에는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라고 합니다. 온 세계에 솔로몬의 지혜가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보려고 예루살렘에 몰려 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시바의 여왕입니다. 사람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려고, 예수님을 보려고 예루살렘에 와야 정상적입니다. 이것이 곧 예배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려고 나갔습니다. 누가복음 19:13에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이런 그의 열망이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였습니다. 
  
만남이 이전과는 다릅니다. 이전에는 그냥 얼굴만 봐도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만지고 느껴야 만남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필’(feel)이 와야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만남은 온 몸으로 만나는 만남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대랍니다. 몸에 피어싱을 하는 포스트모던인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몸으로 하는 의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도 몸으로 하고, 예배도 몸으로 하는 것이 발달합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맨을 보려고 공항까지 가서 ‘오빠’를 외치며 환호합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결혼한다면 결혼식장까지 보려고 합니다. 축구대표선수 이정수선수가 우리교회 집사님의 딸인 탈랜트 한태윤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제가 주례를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유명한 축구인들이 많이 왔습니다. 차범근, 허정무 등 감독과  박지성, 차두리, 이영표 등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 죄다 왔는데 그 날 결혼하는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박지성을 보려고 여고생 팬들이 엄청나게 많이 왔습니다.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배하는 자가 그 정도의 열정도 없이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보람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야 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주님이 영광을 얻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2:23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메시야의 구원역사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내포한 것입니다. 예수님 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경외와 영광이 없다면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영광의 장’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우대하여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셋째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날 것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세우신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영광이 넘치고,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왜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고 외쳤습니까? 교회나 사람이나 교황이 영광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영광을 가로챕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재림예수라고 하여 영광을 받습니다. 이단들 가운데 교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허다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예배는 희생을 드리는 일입니다. 희생이 있어야 영광이 됩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예배하다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는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양이나 짐승을 죽여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죽을 것을 짐승이 대신 죽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내가 희생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로 희생해야 하고, 시간으로 희생해야 하고, 몸으로 희생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은 희생을 예배라고 정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 성도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성숙의 표지는 풍요가 아닌 희생이었습니다. 희생은 하나님께 예배가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너무나 탁월했기 때문에 다른 화가들의 시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의 미술가협회가 그를 미워해서 교황이 천정화를 누가 그리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세 협회는 가장 미운 다빈치가 좋다고 천거하였습니다. 다빈치를 골탕 먹이려고 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심한 각고 끝에 모든 작품을 다 완성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골탕 먹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가장 큰 명예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빈치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유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사탄은 꼭 시험합니다. 사탄이 시험하는 시간은 통상적으로 예배 후가 됩니다. 사탄은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용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교만과 종교는 종종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예배는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더디 오므로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교만으로 하나님은 사울을 책망하십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교회에 들어와 강단 위의 성직자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책망하며 강단 아래 평신도 자리로 내려가게 하였습니다. 교만은 곧 자기영광입니다. 교만으로는 절대 예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지만 교만은 자기 영광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복음주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존 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책인 ‘제자도’(The Radical Christian)에서 온전한 제자의 여덟 가지 특징을 제시합니다. 상대적 세상에서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는 ‘급진적’(Radical)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온전한 제자의 여덟 가지 특징 
첫째는 세상을 거스름입니다. 다원주의, 물질주의 등 공동체로 맞서 나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닮기입니다. 타인의 삶 속에 들어가 성육신적 선교를 감당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성숙입니다. 리더는 스스로 성숙함으로 다른 이들을 함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창조세계를 돌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에만 국한하지 말고 이 땅에도 끝없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섯째는 단순함입니다. 신행일지의 말씀을 기초로 돈, 소유 등에 단순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균형입니다. 예배자와 증인의 균형, 순례자와 시민의 균형을 이루어 포괄적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곱째는 의존성입니다. 주님으로부터의 자립은 죄이며 철저히 주님께 의존할 때 기뻐하십니다. 

여덟째는 죽음입니다. 인간의 죽음의 역설적 의미를 알고 약함,과 고난을 통한 승리를 이루어나가는 일입니다. 

이 가운데서 오늘 꼭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예배자와 증인의 균형입니다. 예배자는 세상에서 증인입니다. 예배하지 않고 증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배는 자신을 드려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인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부르는 것이 영광이 되는 일이며 우리 예배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예배드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성의 없이 해서는 안 됩니다. 늘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바른 예배입니다. 
  
  
결론 

우리교회의 어느 권사님은 부산에서 근무할 때 매주일 토요일이면 서울에 오셔서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주일학교 봉사하고 다시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 일찍 부산으로 가서 일하셨습니다. 수년을 그렇게 하셨으니 얼마나 힘도 들고 돈도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마음이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은 일로 잠시 부산에서 머물면서 일하게 되셨는데 주말이면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다시 부산으로 가셨습니다. 이런 일을 아시고 그 곳의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우리교회도 이런 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답니다. 자랑스런 교인이고, 영광스런 일입니다. 이런 예배자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열정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만난 예수님이 우리 예배의 대상인 주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러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됩시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하던 자들을 기억하면서 멀지만 부지런히 예배하러 먼 길을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갔던 예배자의 마음 회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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