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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령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으로 (막 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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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으로 (막 5:1-20) 
  
본문은 요단 동편에 있는, 거라사인(가다라) 지방에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어떻게 변했는지 볼 수 있다. 저는 성경의 의미에 충실하기 위해, ‘귀신’보다 ‘악령’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귀신은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이라고 한다. 이는 다이몬(δαίμων)에서 유래된 말이다. 

“신, 신적 존재”를 말한다. 히브리인이 이방신을 경멸하는 용어였다. 여기서 귀신은, 다이모니온이 아니라, 영(프뉴마, πνεΰμα)을 썼다. 저는 귀신이라는 단어를 피하기를 원한다. 그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기복사상과,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은 귀신론이다. 성경에는 불신자와 귀신의 정체를, 일치시킨 사례가 한 번도 없다. 한국의 미신에 뿌리박고 있는, 귀신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무형의 영적 존재다. 따라서 악령과, 성령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1. 악령의 특성 :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을 통해, 악령의 특성을 네 가지로 살펴보자. 

(1) 악령은 더럽다(2, 8). 
‘더러운 귀신’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단어는 아카달토스(ἀκαθάρτος)이다. 

더럽다는 말은(ἀ 부정어) + (καθαίρω 깨끗하다, 속죄하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속죄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속죄는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함을 요구하는데, 속죄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번 타락한 천사들은, 다시 속죄될 수 없다. 

따라서 단순히 위생이나, 청결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치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뜻으로 볼 수 있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하는 악령”이라는 의미다.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누가복음에는, 이 사람 귀신에 사로잡혔을 때 “옷을 벗고 다녔다.”고 했다. 

(눅8: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이와 같이 악령은,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노출하며 살게 만들고, 속죄 받지 못하게 만든다. 

(2) 악령은 사람을 끊임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귀신들린 사람은 집을 떠나, 무덤 사이에 거했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 악령은 언제나, 삶의 자리를 이탈하게 하는 영, 위치를 이탈하게 하는 영으로 묘사된다. 

본래 마귀는 천사장이었다. 그런데 천자장의 자리를 거절한다. (사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며, 삶의 자리를 이탈한다. (유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렇게 자기자리를 떠나 행동하다, 마귀로 변했다. 이때 마귀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 귀신들이다. 성경에 마귀는 항상, 단수로 기록되어 있다. 마귀는 대장이기에 하나지만, 귀신들은 졸개들로 언제나 복수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자리를, 악령은 이탈하게 만든다. 

악령에게 포로 된 그은, 있어야 자리를 이탈했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표의식을 저버리고, 정처 없이 방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가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방황할 때, 그 배후에는 악령의 역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악령은 사람을 파괴한다(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이처럼 악령은 인간을 파괴한다. 자기만 아니라, 남도 파괴한다. 사람들을 파괴하는 일이, 악령의 활동이다. 

(삼상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여호와의 부리신 악령이’ 사울을 번뇌하게 한다고 했다. 악령은 자신의 포로가 된 사람을 파괴한다. 악령은 누군가를, 파괴할 때, 처음에는 그에게, 오히려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는 악령의 거짓말이다. 악령은 거짓말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한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육체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파괴한다. 예수님은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다. 마귀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해서, 영혼을 파괴하게 만든다. 그 배후에는, 악령의 역사가 있다. 

우리 시대에 대표적인 자들이, 신천지다. 그들은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신천지 사람으로 판명나면 거짓말을 하는 방법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모략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거짓말의 영일 뿐이다. 악령은 우리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영광 못지않은, 큰 영광을 주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한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께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다. 

이처럼 악령은, 항상 우리를 높여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일단 악령의 포로가 되면, 높이기는커녕, 파괴하게 된다. 따라서 분명한 악령의 거짓말이다. 많은 거짓의 영들이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거짓의 영에게 붙들리지 말기 바란다. 

(4) 악령은 종교적이다. 

‘기독교는 종교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성경은 기독교를, 종교라는 차원에서 제시한 일이 없다. 종교를 영어로는 relig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렐레게레(relegere)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 뜻은 우리를 ‘묶어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함께 묶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종교는, 갖가지 금기사항으로, 우리를 부자유한 굴레에 묶어 놓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구속하지 않고, 언제나 자유하게 만든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자유인이 된다는 말이지, 규칙에 묶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살아가는 삶은, 방종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자유와 영광의 삶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종교를 선택하여, 그 종교의 굴레에 묶여 산다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다. 

악령은 때때로, 종교의 모습으로 찾아와, 우리의 신앙내용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악령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았다. 예수님의 신성을 알았다. 악령이 성경을 인용하는 장면도 많다. 그런데 성경을 인용하는 부분을 보면, 보통 전체를 다 인용하지 않고, 부분만 인용한다. 이단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성경 말씀을 적당히 왜곡한다. 

문맥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뽑아서, 논리를 세운다. 신천지는 악령과 성령은, 말이 씨인데, 나쁜 씨를 받으면, 악령이고, 좋은 씨를 받으면, 성령이라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일반 교회는 나쁜 씨이기에 악령이고, 자신들이 좋은 씨이기에, 성령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핀다. 

이렇게 엉터리로 성경을 인용하면, 악령의 수제자가 된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거나, 주님을 사랑하거나, 섬기는 차원의 믿음의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 지식이다. 거짓되고 잘못된 지식이다. 그가 외친 말은, 그의 정체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 지식, 하나님을 섬길 의도 없이, 단순한 지식만을 취할 때, 그 배후에는 반드시 악령의 역사가 있다.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되는 신앙이 되자.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2. 성령의 특성 

귀신이 들려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이 나타난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그를 온전하게 변화시켰다. 성령의 특성들을, 네 가지로 살펴보자. 

(1) 성령은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그들이) 두려워하더라.” 귀신이 나가자마자, 이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졌다. 

악령은 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고, 더럽혔으나, 예수님이 역사해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셨다. 자꾸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악한 영들이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뒤에 역사하는, 어둠의 영을 물리쳐야 한다. 

(2) 성령은 참된 삶을 살게 한다(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님을 만나서, 온전해진 그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단순히 어떤 종교 지식을, 갖추려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을 열망한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다.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방황하는 발걸음을 중단시키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만든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성실히 살도록 힘을 공급한다. 우리의 인격을 회복시키고, 진정한 삶을 건설하게 한다. 

(3) 성령은 사람을 안정시킨다(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성령은 방황을 중단시키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신다. 집으로 돌아가서, 동네 사람들과 같이 살게 하셨다. 귀신 들렸던 자가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모습을 보라. 전에는 무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그였다.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의 자리를 찾았다. 

(4) 성령은 사람을 세워간다(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거라사인의 지방은,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 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만일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그 곳을 떠났다면, 그 곳에는 예수님의 증인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게 되기에, 예수님은 귀신 들렸던 사람의 간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그를 보내셨다. 거라사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그들을 위해 한 증인을 남기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였다. 사람들은 쇠사슬로 그를 묶으려고 했지만, 그는 동네 사람들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기를 원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진정한 의미의 자신을 발견했다. 자기를 파괴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를 건설하고,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인격회복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악령에 사로잡혔을 때와 정반대의 삶을 산다. 악령과 주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그를 변화시키실 때, 동네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저라면 놀라운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동네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라고 한다. 

더 이상 그 마을에 머물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신이 쫓겨났을 때, 돼지 2천 마리가 바다에, 몰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이 마을에 계속 있다가는, 돼지가 남아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돼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람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주님을 거절했다. 


3. 변화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주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주께서 나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면서,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이웃에게 알리는 것이 바로 전도이고, 간증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일이, 감사하게 여겨지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서, 우리 삶이 변화된 사실이, 사무치도록 감격스러운가?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이 놀랍고 큰일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에게 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전도에 대해 오해하는, 신앙이 성숙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전도는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깨닫자마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외쳤다. 

(요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직후부터, 전도를 시작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전도자들은, 전도훈련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반드시 훈련을 받아야, 전도할 수 있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훈련받으면 더 잘할 수 있지만, 훈련 없이도 전도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과, 감격만 있으면 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주님의 역사를 전할 때, 나의 신앙은 활력을 얻는다. 전도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힘을 잃는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을 잘 알고, 생활이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될 때, 전도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부족한 모습 그대로, 주님을 증거 할 수 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일단 전도하면, 신앙이 더 성장한다. 전도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알아야 전도할 수 있기에, 읽게 된다. 

또 전도한 사람에게 본이 되어야하니, 생활이 변화된다. 성숙한 신앙인이 된 후에,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면 신앙성장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앙이 활력을 잃고, 영적침체에 빠졌다면, 이웃에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라. 그래서 새 힘을 얻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자.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이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전하는 일은, 주님의 제자 된 삶의 기본이다. 악령의 포로가 되어서, 끔찍한 삶을 사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들에게 자유의 복음, 해방의 복음을 전해서, 죄의 사슬들을 끊고 자유하게 만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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