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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와 신앙 (마 7: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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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앙 (마 7:20-23)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지만, 믿음이 올바로 자라지 않는 분들이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교회만 열심히 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들은 교회 안에 있어도, 거듭난 성도가 아니라, 종교인일 뿐이다. 교회 안에 있지만 ‘불신자’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종교와 양심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종교의 씨앗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을 말하고, 양심의 씨앗은, 선악을 알 수 있는 분별력을 말한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씨앗들이 병들어서, 부패한 종교와 부패한 양심들을 만들어 낸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 종교와 상관없는 족속들은 찾아볼 수 없다. 온 세상에 가득 찬 우상들을 보면, 하나님 없이 지내기보다, 차라리 돌과 나무, 짐승보다 자신을 낮추고, 그들을 섬기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하여, 인간이 경외하고, 존중함’이라고 한다. 인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면에서 보면, 기독교도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종교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초월적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한 계시의 종교 ② 인간이 초월적으로 여기고, 만들어 낸 세상의 종교가 있다. 초월자의 계시를 따르는 종교를 ‘생명, 신앙’이라 하고, 하나님의 계시와는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을 ‘종교, 우상’이라고 구분한다. 

우상은 하나님의 계시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호기심이나, 사색을 통해 만들어 낸 하나님을 믿는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기에,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다. 우상과 미신은 “사람이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거나 귀신이 좋아서, 섬기지 않는다. 내게 귀신들이 화를 내지 않고, 복을 주도록 달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많이 알지만, 잘못해석 하는 경우가 많다. 행하는 자라야 라고 해서,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자들이 많다. 

1.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목소리가 크고, 능력이 많으면,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주님의 이름으로 되어졌다고 해도,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며, 쫓아내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의 행동은, 주님과 관계가 없고, 주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행위일 뿐이다. ‘주여 주여’하면서 열심히 외치면서, 3가지 놀라운 일을 했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믿음일 뿐이다. 

(1)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22中). “…선지자 노릇 하며 

어떤 사람이, 이리 가죽을 뒤집어쓰고서, 아무리 이리 흉내를 잘 내도, 진짜 이리는 아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수는 있다. 또 자기가 이리일지도 모른다는, 착각 속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리 노릇을 잘한다고, 진짜 이리는 아니다. 그저 이리 가죽을 뒤집어쓰고서, 이리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노릇이라는 말을 눈여겨보자. 노릇은 대역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한다. 이리도 양의 가죽을 입고, 양의 노릇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가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노릇을 하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 참다운 목사가 되어야지, 목사 노릇을 한다면 비극이다. 참다운 장로, 참다운 집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다. 

요즘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귀신들이 나갈 때는 굉장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하나님의 역사가 막 일어나는 것 같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셨다. (마10장)을 보면,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똑같은 일들을 행했다. 그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들도 쫓아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약한 자, 병든 자들을 고쳤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참 제자는 아니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3)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병자도 고쳤다. 놀라운 이적을 많이 일으켰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내가 너를 모른다.’고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적들은, 지금도 많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악령도 이런 기사와 이적을 잘 일으킨다. 귀신 같이 잘 맞춘다는, 족집게 무당도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퇴마사도 있다. 허○○씨는 자기와 눈만 마주쳐도 병을 고치고, 축지법을 쓴다고 주장했다. 이적은 중요하지만, 이적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이 전부다. 복음이 전부다. 말씀이 전부다. 초대교회에도 그런 일들이 있다.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하였다. 주님과 연관 없는 악령들도, 이적을 베풀어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게 된다. 

(계13:13-14)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사람들이 이적을 보고 따라다닌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의 종이라고 하고, 또한 교회들은 다 썩었다고 하며, 자신들에게 와야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권능과 능력과, 예언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살후2:9-10)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겉만 보고, 쫓아가면, 미혹당할 수 있다. 


2. 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3下) “…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행위만을 했다. 

(1) 말과 행위가 같지 않았다. 어떤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보면, 교활하고 거짓일 뿐이다. 웅변술이 뛰어나서, 말도 잘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움직이는데, 내용을 보면 진실이 없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술이 많아,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움직일 수 있는지, 잘 터득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예수님은 지적하셨다. 겉으로 보이는 외면이 중요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마음, 내면이 중요하다. 종교는 외면을 중시하고, 신앙은 내면을 중시한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2) 그 사역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요, “우리”요, “나”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이름은 하나의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분명히 주어가 “우리”다. 

주의 이름은 단지,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하다. 헬라어의 격은 8격이 있는데, 여기서 쓰인 격은 구격(具格)이다. ‘도구, 방편, 수단’으로 쓰인다. 헬라어 원문에 3차례 모두 “주의 이름으로”가 구격으로 씌어졌다. 

그들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면서, 드러내기 원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자신)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3장에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걸어본 일이 없고,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그가, 베드로 사도에 의해 걷게 되었다. 

이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둘러, 모여들었다. 그때 베드로 사도가 무엇이라 말했나? (행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리고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하였다. 베드로 사도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며 영광을 돌렸다. 

본문의 주인공이나, 베드로 사도나, 똑같이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본문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주님의 이름은 한갓 수단, 도구로서 이용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철저히 부인했다. 

예수님의 이름이 주체가 되고, 자신은 다만 그 이름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그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로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종교와 신앙의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종교는 자신을 위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이며, 신앙은 주님을 위해 계시하신 믿음이다. 

그렇기에 종교는,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을 팔아먹는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희생한다. 주님을 높이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살펴보시기 바란다. 


3.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1)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21上).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이 말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로 인정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였다. 로마 시대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면, 잡혀서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서도,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했다. 우리도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불러야 한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진정으로 신앙이 고백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 되심을 시인하고 드러내야 한다.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인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은 입과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마음은 지정의 전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 전인격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지식만의 구원은 가짜이고, 감정만의 구원도 가짜이고, 의지의 결단만으로 주님을 영접한다면, 그 역시 가짜구원이다. 

‘주여’라는 말은, ‘나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나는 당신의 종이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실제로 주여 주여 열정적으로 주님을 부르면서, 정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입술의 표현일 뿐이지 거짓말이다. 종은 주인에게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 자기주장이나 견해가 없다. 오직 순종과 헌신뿐이다. 

(2)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문 (마6:10中)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 주님은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있다. 

하나님이 보는 죄는, 믿지 않는 불신의 죄만 보신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함은,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며, 예수님만이 나의 목적이요, 전부요, 생명이요, 나의 가치관이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3) 주님께서 아시는 자다(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안다는 말은 경험한다, 낳았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부정과거) 못하나니’ 이 뜻은 “내가 너희를 만난 적이 결코 없다, 결코 낳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으며,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였다가, 타락한 자들이 아니다. 처음부터 만난 경험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이다. 

거듭나는 체험은, 수없이 반복되는, 일상적인 체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 중에, 단 한 번 체험하는 1회적인 체험이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지옥에 갈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 이를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 perseverance)라 한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또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하였다. 

  
결론이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미신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모른다고 하신다. 미신적인 믿음은, 주님과 관계없는 믿음이다. 미신은 예수님을 어르고 달래서, 나에게 좋도록 하는 생활이다. 예수님께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를 좋도록 만드는 기도가 종교다. 

예수님의 이름을 나를 위해 쓰지 말고, 내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미신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 국한한다. 이 땅에서 잘 되기만을 바라는 의식이라면, 이는 기독교적인 미신이다. 신앙에는 영생이라는 이 위대한 비전이 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내가 만든 하나님, 내가 만든 종교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을 따라 살자. 우리 자신이 주님의 도구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라. 

이 문제가 바로 되지 않으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다. 우리의 신앙은 오로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신앙이다. 우리는 신앙의 목표이시며 푯대가 되시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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