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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시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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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시 2:1-12)


미국의 전설적인 거부 록펠러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한 번은 록펠러가 미국 시카고의 큰 호텔에 투숙하게 됐습니다. 프론트로 가서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호텔에서 제일 싼 방을 하나주십시오" 
직원이 록펠러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물었습니다. "손님 같은 분이 어째서 제일 싼 방을 찾으십니까? 록펠러가 "싼 방이 좋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직원이 또 물었습니다. "손님의 아드님도 가끔 이 호텔에 오는데, 그때마다 제일 좋은 방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손님께서는 어째서 제일 싼 방을 찾으십니까?" 그러자 록펠러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에게는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내게는 그러한 아버지가 없거든요"
이 짧은 이야기는 생각할 긴 여운을 남깁니다.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이란 무엇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믿을 대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대단한 무엇을 이룬 사람이라기보다는 의지할 누군가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복이 있는 분들이십니까?

오늘 본문 시 2편은 시 1편과 함께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 1편은 1절을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합니다. 이에 비해 시 2편은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라고 끝납니다. 그러니까 시 1편은 ‘복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있고, 이에 비해 시 2편은 ‘이런 이런 사람은 다 복이 있다’라는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형식은 달라도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1편과 시 2편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같은 관점에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관점입니다.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복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복이라 일컫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과 같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복은 일시적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즉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처럼, 잠시 복된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새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그런 복은 다 이 땅에 속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저 하늘과는 무관하고, 영원과는 이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되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때문에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복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아가 그 복이 저 하늘과 이어지기 때문에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들

본문 2:4를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서 그들을 비웃으신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들은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을 비웃으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저들은 복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누구일까요? 우선 군왕들이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고대 시대 왕들은 신의 아들 행세를 하면서 권력, 재물, 땅, 심지어 백성들까지도 자기의 손에 넣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관원들이란 군왕에 버금가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출세한 사람들이요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을 비웃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복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보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왜 비웃으셨고, 저들을 복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첫째, 저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신데, 저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데,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소롭게 여기시며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소문난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병사의 독실한 신앙이 항상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핍박을 했습니다. 전쟁이 터져서 함께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진지로 포탄이 빗발치듯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지휘관이 바위 밑에 머리를 처박고 “오 하나님! 오 하나님”하고 외쳤습니다. 상황이 끝나고 핍박 받던 병사가 그 지휘관에게 물었습니다. “무신론자신 줄 알았는데요!” 지휘관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이런 순진한 친구 보게 이런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란 없는 거야!”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서면 그 신념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건강할 때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공하고 출세했을 때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됐을 때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헛된 일을 꾸미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어찌하여 이방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노하다’라는 말은 ‘떼로 모여서 소동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의기투합하여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헛된 일을 꾸민다’는 말은 은밀하게 밀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치권에서 사용되는 ‘밀실야합’이라는 말처럼 모여서 조용히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창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 떠오릅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 노아 홍수 후에 살만해 지니까, 분노하고 헛된 일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맞서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소롭게 여기셨고, 그 바벨탑을 다 허무셨고, 저들을 흩으셨습니다.

오늘도 인간은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1세기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헛된 일들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소롭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갖가지 재능, 그리고 남다른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소중한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헛된 일이 아니라 진정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들

본문 10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 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비웃거리가 되었던 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교훈의 내용은 11-12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춤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여호와께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이 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이 있는 사람은 이 세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경외’(敬畏)라는 말은 공경할 ‘경’(敬)과 두려워할 ‘외’(畏)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경외란 ‘두려움으로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두려움으로 공경하는 사람 그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타락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인간은 하나님과 등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지면서, 그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점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사라지니, 그 삶이 점점 악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사실을 롬 1:28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 경외를 잃어버리니, 그 삶에서 복이 다 사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 50:22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눅 12:5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앞을 보지 못하시는 김선태 목사님께서 정상적인 목사들보다 귀하고 큰  일을 많이 하십니다. 이 분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뵈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뵈는 게 없어서 일을 저지르며 살지요.” 

그런데 사실 이 김선태 목사님은 육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시지만 늘 믿음의 눈을 열고 하나님을 보며 사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놀라운 일을 하실 뿐 아닐라 진정 복된 사람으로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경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 여호와를 떨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떨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떤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공포로 끝이 나는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끝이 나는 두려움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그러나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는 거룩한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거룩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성경공부 중에 한 교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직장 생활하면서 제일 기다려지던 시간이 퇴근 후 회식하는 자리였답니다. 1차로 식사하고 난 뒤에 2차를 간답니다. 2차가 뭐냐고 물었더니 한 잔하면서 춤추는 데랍니다. 그리고 나면 또 3차를 간답니다. 3차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제 상상에 맡긴 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후회스럽고 그 일들이 더 이상 즐겁지도 않고 기다려지지도 않는답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즐거운 새로운 기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인해 즐거워하기 보다는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겠습 니다. 여호와 앞에 설 때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예배드림이 더 할 수 없는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함이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위해 헌신함이 더 할 수 없는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 주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을 보면 단순히 입 맞추는 것이 아니고 발에 입 맞추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종으로서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신앙잡지에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세실 씨는 어느 날 그의 사랑하는 어린 딸의 방으로 갔습니다. 딸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준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구슬이 아주 예쁘다고 감탄을 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얘야, 그것을 불속에 던져버려라.” 어린 소녀는 잠시 당황하고 망설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네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에게 맡기겠다. 이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해라.” 어린 소녀는 고심을 하다가 결국 순종하기를 택하고 그 상자를 불속에 던졌습니다. 

그일 후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하던 훨씬 더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단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네가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릴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믿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언제나 그것이 최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며 사는 것이 결국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주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떨며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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