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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향예수 (마 13: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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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예수 (마 13:53-58)

예수님은 자기가 자라난 고향 나사렛 동리에 돌아와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풀어서 가르치시면서 이 말씀은 오늘 내게 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은 그 은혜로운 말씀에 깜짝 놀라면서 

"저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과 형제와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멸시하고 배척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경탄을 했으면 자기 동리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자랑하며 크게 환영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데리고 고향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다니시면서 중풍병자, 열병환자, 백부장의 종, 귀신들린 사람, 소경,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험악한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를 호령하사 잠잠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가 가는 길마다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고향에 갈만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이 12명의 건장한 제자들(경호원?)을 이끌고 고향에 갔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화려하고 당당했겠습니까? 그런 예수님을 보면 분명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고향은 참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을지라도 고향은 성공한 사람이 가는 곳이지 실패한 사람은 갈 곳이 못됩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저마다 자가용을 끌고 복잡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차가 없으면 빌려서 타고 가게 만드는 헛된 과시욕도 사람들 앞에 성공한 자기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생기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으신 예수님은 분명 사람들 보기에 성공한 젊은이였습니다. 여러 명의 부하를 거느렸고 말씀에 능력이 있었으며 때때로 기적을 일으키고 명사가 된 성공자로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고향을 찾은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알아봄으로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54절을 보면 "고향으로 돌아 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대해 남다른 정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다가 이제는 고향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고향을 찾으신 것입니다. 가난과 무지에 얽매인 고향 사람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 가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환호와 경탄 속에서 놀란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목수 아들인데 어디서 저런 지혜가 나오느냐?"며 사람들이 모두 놀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특별히 공부를 한 것도 없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닌 가난한 집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에게서 지혜로운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더구나 예전에는 조용하고 말 없는 청년이었는데 이제는 제자들을 데리고 와서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예전의 예수가 아니었어요. 사람이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놀란 겁니다.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너무 잘 안다는 것은 때로는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좀 모르는 부분이 있어야 존경심도 생기게 됩니다. 가깝게 지내면서 깊이 알게 되면 친밀감은 더 하겠지만 지도자로서의 위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에게 인정받는 가장이 가장 훌륭한 가장이고 측근들로부터 인정받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입니다. 

목회자 세계도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자기 고향에서 목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자라 때부터 보아 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아서 권위가 서질 않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데 자꾸 목회자와 연결시켜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모범적으로 착실하게 잘 자랐다면 모를까 어려서 개구쟁이로 컷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목회자로 인정받고 세움을 받았는데도 사람들이 어릴 때 그 모습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모두 놀란 것입니다. "저 청년이 그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이 말 속에는 무시와 조소가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에 목수라는 직업은 그다지 인정되지 못한 직업이라 가난하고 천대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사람이 장성해서 달라졌는데도 어렸을 때 가난했던 집 아들로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고정 관념은 참 무서운 겁니다. 

사람들은 한 번 생각하면 그것을 바꾸려고 하질 않습니다. 옛날에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평생 가난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후에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옛날에는 가난했던 사람이" 하면서 빈정댑니다. 또 "옛날에는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용됐네", "옛날에는 공부도 어지간히 못하던 것이 출세했어!" 하면 빈정대고 옛날의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의 가정환경과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미지가 평생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어렸을 때 가난했던 것이 무슨 죄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난한 환경이 성공하게 만드는 기본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쓴맛과 아픔을 경험한 것이 오히려 미래를 개척하게 하는 동기와 원동력이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고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고향에 가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난했을 때 모습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둘째,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背脊)했습니다." 

55절을 보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려서 가난으로 고생한 사람이나 크게 성공해서 돌아왔으면 마땅히 축하해 주고 기뻐해 주어야만 이웃의 도리입니다. 다른 동네에서는 성공했다고 인정받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환호를 받았는데 고향에서는 무시를 당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두 마음이 존재합니다. 의지적인 내 마음과 타락된 인간의 본성이 존재합니다. 이 두 마음이 서로 상반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선한 마음이 작용을 하면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지만 타락한 본성이 발동하면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말이 있는데 남도 아니고 사촌이 땅을 샀으면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텐데 저절로 배가 아파 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질투심입니다.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일으켜 위대한 스승으로 선지자로 높임을 받았지만 고향에서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이고 타락한 본성 때문에 나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일생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었습니다. 태어나는 것부터 초라하게 여행 중에 남의 집 마구간에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생명의 위협을 받아 애굽으로 피난 가야했고 쪼들린 가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며 청년기를 보내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처한 현실과 주어진 사명을 생각하면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메시아로서의 자각은 있으나 가정 형편은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그 직업은 결코 안정되지 않은 목수였고 가난한 집에 식구는 많았으니 유추해 보면 예수님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예수를 한심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떠나 있던 예수께서 12제자를 데리고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지금까지 들어본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을 뿐 아니라 권위도 있어 보이고 병자까지 고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환영하고 더 많은 기적을 베풀도록 기회를 만들어 드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집 아들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일생이 배척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태어날 때도 방이 아닌 마구간으로 밀려났고, 태어나자마자 남의 나라 애굽으로 피난 가야 했으며, 공생애를 시작하고 전도하실 때에도 내내 사람들에게 방해와 조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가자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받았습니다. 모처럼 고향에서 좋은 일들을 행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예수의 선한 뜻을 배척하고 그의 존재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3년 동안 함께 생활했고 그의 일을 다 체험한 제자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호산나"하고 외치던 군중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들으셔야 했습니다. 그 군중들 가운데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얻어먹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병 고침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들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결국 "고향을 떠나셨습니다" 

58절을 보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했다" 고 했습니다. 누구나와 같이 예수께서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를 원했고 고향 사람들에게 먼저 은총을 베푸시려고 한 것입니다. 복음도 전하고 병도 고쳐주고 갖가지 기적도 행해서 은혜를 베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평생을 살다 보면 몇 번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으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을 얻게 되는데,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축복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자승자박"이라고 합니다. 행복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만났을 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와 행복과 축복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만큼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무지해서 그 좋은 기회, 축복의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무지와 고집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대단한 수고와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고행이 요구되지도 않습니다. 또 거금을 들여서 면죄부를 사야 함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내 구주가 되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 합시다. "예수! 내 구주!" 만에 하나 천에 하나 나중에 내가 치매에 걸려 내 아내를 몰라보고 내 자식을 몰라보아도 잊지 말아야 할 말 "예수! 내 구주!" 할렐루야! 

구원 얻는 방법이 너무 쉽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집을 피우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외면하고 배척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고집스러운가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외치는데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수 없는 축복의 기회가 지나가고, 자기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복을 거절하여 지나쳐 버리고 맙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내 구주되심을 증거합시다.

"예수! 내 구주!" 나사렛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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