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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 (애 3: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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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새로운 은혜 (예레미야애가 3장 19-28절 )


< 인생을 과속하지 마십시오 > 

가끔 시간이 없을 때 누가 만나자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힘들지만 최대한 시간을 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만나고 오면 결국 잠을 줄여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명을 이루려면 건강과 체력의 중요성을 자주 느낍니다. 건강해야 성취의 기회가 커지고, 건강해야 대개 마음도 건강해집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기회와 가능성도 많이 잃게 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많은 사람을 챙겨가며 살려면 건강은 필수적입니다. 

요즘 과로사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지난 10년 동안 과로사로 약 30여만 명의 3-40대 과부가 생겼다고 합니다. 과로사의 주 원인은 간경화인데 간은 10%만 기능해도 정상적으로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간에 이상이 발견되면 이미 간의 기능이 10% 이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자기 몸을 아주 혹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버리니까 남은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습니까? 

과로사를 막으려면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병을 주어 강제를 휴식을 취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달리지 말고, 바쁠수록 하나님 앞에 나와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몸과 마음과 생각에 안식과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목표가 무리했다면 합리적인 목표를 가지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공도 중요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건강을 잃으면 성공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자신의 건강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지나치게 과속으로 몰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을 지키는 삶은 결코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내일이 있게 하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때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고 예배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런 삶이 성공적인 인생을 만듭니다. 


< 역경을 극복하는 길 > 

살다 보면 가끔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잘 극복하면 신앙도 깊어지고, 인격도 성숙해지고, 축복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어떻게 문제와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믿음 

주전 586년, 유다가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고, 나라를 잃고 동족이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을 예레미야가 노래합니다. 그 노래가 예레미야애가인데 예레미야는 그런 극심한 어려움 중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본문 19-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동족의 고통에 아파했지만 한편으로 그 고통을 깊이 생각해보다 그 가운데 소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때때로 좋지 않게 펼쳐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애가의 핵심 주제이고, 더 나아가 성경이 말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애가’란 ‘애통하는 노래’인데 ‘애통’과 ‘불평’은 다른 것입니다. 두 단어의 그 가장 큰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과 환경이 힘들어도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반면에 불평하는 사람은 마음이 힘들다고 하면서 믿음까지 포기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애통할 수는 있지만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불평은 하나님의 마음을 창으로 찔러 공격하는 것입니다. 

가끔 과거를 회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지 자신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현재의 삶도 깊이 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는 ‘발견’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보물을 발굴하는 작업이 감사입니다. 그처럼 과거와 현재의 삶을 통해 감사를 발견하면 어느새 믿음이 소생하고 절망은 희망으로 변합니다. 

사실 성도가 당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아무리 큰 어려움 중에서도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쓰러지고 굴러 떨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곧추 서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렵다고 느낄수록 희망을 가지십시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옥스포드 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의 몸에 이상증세가 생겼습니다. 구두끈을 매기도 힘들 정도로 손이 떨렸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근육무력증이라는 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2년 이상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절망하지 않고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살기로 각오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초월한 각오를 하자 그의 영감과 창의력은 극대화되었습니다. 그 뒤 2년이 지났지만 그는 죽지 않았고, 30년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현존하는 최대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입니다. 

강한 의지도 생명을 지탱시켜줍니다. 하물며 진실한 믿음의 힘은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 편에 서서 내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환경을 바라보거나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고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입니다. 

2. 희망 

만약 우리가 어떤 일에 낙심한다면 그 장면을 보는 사단이 얼마나 우습게보겠습니까?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문제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문제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사단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단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믿음만 잃지 않으면 사단은 지렁이나 구더기에 불과합니다. 

이사야 14장을 보면 사단의 타락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영화로운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뭇별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이겠다고 교만을 부리다가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찍혔고, 음부의 제일 밑에 빠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습니다. “저 친구는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진동시키던 자가 아니냐! 그런데 봐라! 밟힌 시체와 같다!” 사단은 밟힌 시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 사단이 두렵지 않으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물 위를 걸어 주님께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 점점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베드로를 구해주시며 “왜 의심했느냐?”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의미로 우리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발을 내 딛고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믿음이 있으면 어떤 문제도 이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 쓰기에 따라 삶의 질이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렵더라도 희망을 예견하고 희망을 말하고, “한번 해 보자!”고 하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면 그가 속한 공동체도 긍정적인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어려워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가족과 동료에게 희망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 구절에서 긍휼은 영어로 ‘compassions’라고 합니다. 원래 compassion은 거의 복수형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복수형을 쓴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무한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아침마다 새롭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제의 죄도 완전히 잊으십니다. 그리고 어제에 지었던 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매일 아침 말씀하십니다. “자! 오늘 새로운 일을 향해 같이 나자 보자!”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신다면 걱정할 일이 없고, 우리는 누구보다 부자입니다. 

씨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많은 것들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만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아니다(He who has God and many other things has no more than he who has God alone).”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지해서 소망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입술이 되십시오. 그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3. 기다림 

본문 23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적절한 때에 주어진다는 뜻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은 매일 하루 분량의 만나만 취하게 하셨습니다. 다음 날에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해서 이틀 분을 모으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분의 만나가 내렸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빠르게 주어지지도 않고 늦게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적절한 때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하나님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잠잠히 기다리면 망할 것 같고, 엄청나게 손해 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사명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가장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나가야 할 때 나가는 것도 믿음이지만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몇 년 전에 교단 총회에 갔을 때 새로운 얼굴이 보였습니다.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교단에 가입하자마자 총회에서 교단의 문제점에 대해 마구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그 발언만 보면 교단을 제일 사랑하는 것 같지만 몇 십 년 동안 교단의 산 증인처럼 활동하셨던 다른 목사님들은 그 모습을 보고 “똑똑한 목사님이 가입하셨구나! 교단 발전을 위해 많이 애쓰는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염려했습니다. 이번에 그분이 어디에 갔느냐고 했더니 이미 교단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불행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나를 위한 도구로 도구화시키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있을 때 기다리지 못합니다. 반면에 행복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상대를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있어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결혼할 때 “학벌이 좋아서... 돈이 있어서... 직장이 좋아서...”라는 이유로만 결혼하면 그것은 상대를 도구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도 그 선택의 기준이 “프로그램이 많고... 부담이 적고...” 그런 이유로만 선택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나를 위해 도구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생활을 통해 천대 만대까지 복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데 내가 도움이 되겠다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을 이루기까지 어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꿈과 같은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4. 순종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27-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매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이 구절에서 ‘멍에를 매는 것’은 ‘부담을 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부담을 지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부담이 없는 삶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부담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행복도 없어지고, 부담이 있으면 삶의 의미와 행복도 커집니다. 

가끔 영적인 부담을 주시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부담인 줄 알고 기쁘게 그 부담을 지고 나가십시오. 부담을 지고 나가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살다 보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부담을 지고 변함없이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어렵고 힘들면 대개 불평과 판단과 부정적인 말이 나오지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들면 더 도움이 되려고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주려고 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삶입니까? 

살다보면 교회에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그러면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라고 나를 이 교회에 보내셨구나!”라고 마음을 다지고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그처럼 충성은 순종을 만들고, 순종은 행복을 만듭니다. 반대로 순종이 없는 이기심은 결국 삶에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결국 행복은 사명을 따라 섬김에 있습니다. 

한 행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공교롭게도 딸만 6명입니다. 어느 날 엄마가 친구로부터 예쁜 장난감 인형을 하나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구에게 줍니까? 아이는 6명이고 장난감을 하나이니까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오늘 집에서 제일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이 장난감을 줄게.” 그러자 여섯 딸이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아이! 그러면 아빠 거잖아.” 아이들 보기에 아빠가 가장 엄마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보일 정도라면 그 가정의 행복은 맡아 놓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내 말을 잘 듣는 남편을 공처가라고 비하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지혜로운 사랑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남편은 공처가가 아니라 사랑의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설거지 해! 커피 타! 라면 끓여!”고 하면 정말 공처가를 만드는 것이지만 누가 그렇게 합니까? 그러므로 아내의 사랑의 요구를 할 때 최대한 들어주는 것은 공처가가 되는 길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서로 사랑의 순종을 할 때 그 공동체가 행복해지고, 교인이 서로 사랑의 순종을 할 때 그 교회가 행복해집니다. 그처럼 기본적으로 사랑의 순종을 해야 행복해지고, 하나님이 그 사랑과 순종을 앞세워 사는 공동체에 축복을 내려주시고, 그렇게 살 때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려고 하십시오. 받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주는 것은 더 기분 좋게 합니다. 받으려고만 하면 삶은 불행감은 사라지지 않지만 주려고 노력하면 힘든 중에도 묘한 행복감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불행감은 새벽안개처럼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구체적으로 삶 속에 역사해 나타날 것입니다. 


<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워도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삶의 과정은 힘들어도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물이 진화된 존재이거나 화학적인 반응으로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 안에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비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이끌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청소년 때 혼자 살아보겠다고 잠깐 집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집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지만 집을 떠나자 부모님의 사랑을 내가 이렇게 몰랐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는 너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로 인도된 삶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비로 살았고, 지금도 하나님의 자비로 살고 있습니다. 가끔 나 같이 못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고, 어떻게 목회를 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잘못했던 일이 너무 많고, 죽어 마땅한 일도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처럼 성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우리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그 자비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또한 살면서 절망적인 순간을 얼마나 많이 겪었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는 여지없이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순간들 중에 한번이라도 외면하셨다면 우리는 여기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감옥에 가 있든지 지옥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이 항상 좋게만 펼쳐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항상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은혜와 자비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천국은 우리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살다 보면 가끔 미래가 암울하고 두렵게 느껴집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런 암울한 감정이 조금이라고 느껴진다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암울함에 젖은 감정도 필요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 감정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감정이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우리는 죄인이었고, 앞으로 또 죄를 짓게 될 존재로서 예수님이 없으면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기뻐하고 감사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성령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하면서 사랑의 밀어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 관계가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예레미야는 그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다고 했습니다. 그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를 앞세워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행복하게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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