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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보시는 하나님 (시 94:9-11, 요일 5: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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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시는 하나님 (시 94:9-11, 요일 5:14-15)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알게 하십니다. ‘삼위일체’란 교리는 사람의 머리로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부부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삼위는 아니지만 ‘이위일체’는 알게 하십니다. 사람 사이에 ‘삼위일체’가 되면 큰 일 납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셨고 또 사람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도 사람의 수준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현도 사람의 수준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도 사람의 수준에서 합니다.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이란 신학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성경적 묘사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노하심, 하나님의 기뻐하심 등이 있는데 이런 표현을 만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말로 사람의 수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람의 표현 이상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듣고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듣고 보신다는 것은 사람의 듣고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한계적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듣고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표현으로는 그 이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것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발명이라고 합니다. 과학적 발명이라는 것은 사람의 머릿속에 없는 것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스티브 잡스라는 한 시대의 귀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한간에는 그가 우주인이라는 말까지 떠돌았습니다. 사람들의 발명이란 이미 머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이미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귀와 눈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미 듣고,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악행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마음에 숨겨진 악행도, 속삭이는 음모까지도 다 보고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듣고 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처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우시고, 축복하시려고 듣고 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해지므로 악한 자들을 벌도 주고, 깨우치시려고 듣고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늙으면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육체에 힘은 없는데 다 듣고 다 보면 더 힘들어 안 됩니다. 마음이 더 피곤해집니다. 안 들리면 듣지 말라는 것이고, 안 보이면 보지 말라는 것인데 억지로 하는 것도 좋지는 않습니다. 저도 요즘에는 귀도 이전 같지 않고 눈은 벌써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기억도 이전 같지 않아 깜빡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편한 것은 기억이 안 나면 기억 안 하면 되니까 좋은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늙지 않으시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니, 모든 것을 다 듣고 보실 수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아주 우스개를 잘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날이 깜깜해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말 교실이 어두컴컴해졌습니다. 이 재미 있는 친구가 “선생님, 깜깜해서 안 들립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다른 친구는 “선생님 시끄러워서 안 보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와”라고 웃었지만 그 친구들은 선생님을 놀렸다고 얻어맞았습니다. 사람은 깜깜하면 안 보이고, 시끄러우면 안 들리지만 하나님은 깜깜해도 보시고, 시끄러워도 들으십니다.  
  
시편 139:2에는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라고 합니다. 듣고 보시는 하나님은 하나님 우리와 같은 기능을 가진 유사한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신 하나님께서 듣고 보시는 것은 어떤 악행이든 하나님의 목전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악인의 공개적 악행뿐 아니라 숨겨진 악행이나 속삭이는 음모까지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도 들으시고 아십니다. 듣고 보시는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의 생각까지도 삼가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원수들의 음모를 걱정하지 맙시다. 듣고 보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귀를 지으신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9절 상반절에는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고 합니다. 하나님은 들으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들을 귀를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관계의 창조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만드시고 관계를 맺으십니다. 귀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도 듣게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6:4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합니다. 이사야 28:23에는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4:23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왜 들으라고 합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사람이 사는 법이고 잘 되는 법입니다. 
  
시편 10:17에는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8:30에는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42에는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고 합니다. 사람은 왜 하나님께 들으시라고 합니까“ 사람의 말을 들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책임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원 라이너’(one-liner) 즉 짧게 한 마디 조크를 잘 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말한 조크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명의 정신과 의사에 대한 조크입니다. 나이가 지긋이 든 의사와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아침에는 둘 다 말끔한 옷차림으로 출근합니다. 저녁 퇴근시간이 되면 젊은 의사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지고, 기진맥진합니다. 그러나 나이 든 의사는 항상 생기가 넘칩니다. 한번은 궁금한 젊은 의사가 물었습니다. “종일 환자와 대화하는데 전혀 지치지 않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때 나이 든 의사 “간단하네. 나는 전혀 듣지 않거든”이라고 했답니다. 
  
듣는 것은 가장 큰 일이고, 짐이고, 고역이고, 피곤한 작업입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나 상담자는 늘 피곤하고 진료시간이나 상담시간이 길지 않게 정해져 있습니다. 듣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 같지 않은 투정을 다 듣고 계시면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말을 다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일일이 다 듣고 대꾸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끄러”, “이제 가서 놀아”, “그만 물어” 라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모든 말, 질문, 투정 다 듣기에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외면하지 않고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셨습니다(창 4장). 이스라엘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출 2장). 이스라엘의 감사의 환호를 들으셨습니다(출 15장). 다윗의 전쟁에 나갈 때의 질문을 다 들으셨습니다(대하 14장). 엘리야가 “여호와여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왕상 18장). 하나님은 이 모든 소리를 다 들으셨지만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소리를 반기십니다. 출 2:23에는 이스라엘의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 “들으시고”라고 합니다. 들으신다는 말은 ‘솨마’라는 단어인데 주의 깊게 경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근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세우고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낯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보다 쥐보다 더 잘 들으십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 들으십니다. 새도 쥐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하나님께서 듣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새의 귀도, 쥐의 귀도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새도 쥐도 마음의 생각은 못 듣지만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안타까운 이웃의 사정을 들어도 해결 못할 때 많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면 응답하시고, 해결하시고,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들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보혜사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보혜사는 상담자로 내 말을 들으시는 자입니다. 보혜사는 대변자로 내가 말할 것을 대신 말해주는 자이십니다. 보혜사는 듣지 않고는 절대 할 수 없는 듣고 말해주는 역할을 하십니다. 듣지 않고는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는 상담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는 대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말을, 품은 마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아뢰세요. 크게 외치세요. 울부짖으세요. 우리가 말할 수 없고 무엇을 구할지 모르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아뢰고 성취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보십니다. 

9절 하반절에는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보시기에 사람의 눈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만들어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눈을 만드신 하나님도 그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십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내려보실 때 하나님의 눈과 우리의 눈이 마주칠 것입니다. 
  
요즘에는 대화나 소통의 법칙에서 ‘눈 마주침’(Eye-contact)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삶과 인간관계에서 눈 마주침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화나 이야기를 할 때 눈 마주침은 대화의 효과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상대방과 대화할 때는 80%가량을 얼굴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8초 정도 쳐다보다 2초가량 시선을 떼라고 합니다. 허공을 응시하며 연설할 때는 전달력이 30%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왼쪽 편의 대상을 많이 본다고 합니다. 왼쪽은 심장방향이어서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쓰는데 이는 사람의 보호본능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와 기도할 때도 눈이 마주치듯이 마음이 마주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시는데 내가 자꾸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눈 마주침이 잘 되어야 좋은 관계입니다.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눈이 마주침으로 우리는 회개하고, 변화되고, 새 삶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신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 일으키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우리는 놀라게 되고 돌이키게 되고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61에는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계셨고,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침으로 완전히 새로운 변화와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돌아섬을 경험하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인간은 하늘에 있는 눈을 상상하였다고 합니다. 눈은 여러 고대 문명을 거치면서 태양처럼 하늘에서 맴돌았습니다. 눈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아는 신들의 도구로 여겨진 것입니다. 하늘은 신의 눈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모리아’ 산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리아’라는 말은 ‘야(Jah)께서 보시다’는 뜻입니다. ‘야’는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이름 ‘야훼’의 줄인 말입니다. ‘모리아’는 ‘하나님의 관점의 산’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산 ‘모리아’가 왜 거룩한 곳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성전을 거기에 지으라고 하셨습니까? 그 곳은 하나님의 눈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리아’는 거룩한 곳이고 성전을 세울만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곳, 하나님의 눈이 있는 곳, 이곳이 ‘모리아’입니다. 우리 집, 우리 교회, 우리 직장, 우리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눈이 있어 내려다보시는 ‘모리아’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7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라고 하십니다. 보고 듣는 것은 인식의 기본인데 하나님은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근심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다 보인다는데 하나님이 위에서 아래로 우리를 보시니 얼마나 잘 보고 계시겠습니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러시아 쌍 빼쩨르부르크의 ‘에르미타지’ 박물관에 원화가 있습니다. 저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같은 제목의 헨리 나우웬의 책도 있습니다. 이 그림이 보면 아버지를 시각장애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자신의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봐야 확실하게 알고,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소통의 원리 가운데 ‘바라봄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에 보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닮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보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우리를 얻으시려고 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얻고 잃지 않으시려고 보고 계십니다. 내겐 하나님의 바라봄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에 내가 안전하고, 평안하고, 성취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닙니다. 
  
시편 34:15에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4.0의 시력을 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시력이 뛰어나다는 몽골인의 눈과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복음성가의 가사에 이런 좋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우리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은 눈으로 바라보시고, 귀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주만 바라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루어주십니다. 

  
결론 

나폴레옹 군대의 북치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퇴각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모두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치는 병사에에게 “퇴각의 북을 울려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병사는 경례를 하면서 “장군님, 퇴각의 북을 치는 법을 배워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돌격 북밖에 칠 줄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장군은 “그러면 돌격 북을 쳐라”고 하였습니다. 병사는 돌격 북을 힘차게 쳤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북소리를 듣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북소리를 듣고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의 들음과 하나님의 들으심이 맞을 때 우리는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보심과 우리의 봄이 일치할 때 우리는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들으심과 보심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를 위한 것임을 믿고 우리도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을 봅시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중심을 보시고,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조심조심 생활하고, 듣고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용기를 얻고, 전쟁 같은 세상살이에서 백전백승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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