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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가 밭 마음 (막 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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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밭 마음 (막 4:13-20)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지난주에 이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묵상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주님께서 이 비유를 해석하신대로 밭의 비유로 풀이하겠습니다. 열매를 맺는데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결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밭입니다. 무엇보다도 씨앗이 튼튼하고 좋은 품종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씨앗이 부실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씨앗이 좋다하여도 그 씨앗이 길 위에나 돌밭에나 가시 떨기 위와 같은 좋지 않은 밭에 떨어지면 또한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에서 하나님 말씀이 씨앗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말씀일지라도 우리 마음 밭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말씀이 100배의 결실을 맺기도 하고 아예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기도 합니다.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말씀의 씨앗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은혜의 소낙비가 퍼부어진다 하여도 지붕이나 뚜껑으로 덮고 있다면 그곳은 마른 땅 그대로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기근에 걸려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 마음을 닫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잠언서에서도 분명히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우리 마음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고 먼지만 날리는 황무지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밭이 어떠한지 점검해 보시길 원하십니다. 말씀의 씨앗이 전혀 뿌리 내리지 못하는 길가 밭 마음인지, 감추어 있는 두터운 돌덩이 때문에 뿌리를 뻗지 못하는 돌짝 밭 마음인지, 여러 염려와 일락으로 말미암아 전혀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가시떨기 밭 마음인지, 아니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인지. 오늘은 그 첫 번째 마음 밭인 길가 밭 마음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땅이 단단히 굳어져 있습니다. 씨앗이 떨어졌지만 땅이 단단하여 도무지 씨앗이 땅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새가 와서 먹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새를 사단이라 하여 사단이 말씀의 은혜를 빼앗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 길가 밭 마음은 무엇일까요? 이 마음은 닫힌 마음입니다. 자기 편견과 생각에 사로잡혀 도무지 진리의 말씀에 문을 열지 않는 굳게 닫힌 마음입니다.

종교적 편견

길가 밭 마음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다져놓은 율법이나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너무나 확고해서 도무지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강하게 충돌했던 것은 안식일과 관련된 해석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이들은 병자를 치유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예수님의 사역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처음 주셨을 때의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시려 하였습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고 복된 날이기에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정결법 문제에서도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어야 한다지만 예수님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전적으로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옳았습니다. 노동으로 지치고 물질에 욕심을 내었던 그들에게는 안식일을 전적으로 일하지 않고 쉬는 날로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정결법을 통해서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이들은 여기에만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저 앞서 계시고 역사는 변화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틀만 고수하였습니다. 안에서는 새 술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그들은 낡은 가죽 부대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 무대입니다. 그러니 역사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시대와 상황을 분석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이 다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성령론입니다. 성령의 조명과 충동에 따라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마치 모순된 말씀들의 집합체처럼 보일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성전을 세우고 율법에 따라 제사를 제대로 드리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런 형식적인 것은 다 필요없다고 말씀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을 짓는데 열심하였고, 포로기 이후에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나 아모스나 미가를 비롯한 다른 선지자들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가 역겹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와 온전한 제의의 회복을 힘주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체제의 무용론을 말씀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옳습니까? 다 옳습니다.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가 깨어 있고 열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낡은 틀에 사로잡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져야 할 때 성전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완고하고 편협한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세워야 할 때 딴소리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 또한 자기 멋에 취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가 옳다고 하여 현재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선교해야 하는 때가 있고, 어느 때는 성결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성결을 추구해야 하는 때에 선교를 외치거나, 선교를 핑계로 성결을 외면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그마나 교리라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장치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편협한 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이 위대한 것은 인간들의 이런 완고함을 잘 알기에 곳곳에서 미리 경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나서가 대표적입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선민사상이라는 완고한 틀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선민이요, 구원받고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가 처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 때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북왕국을 멸망시켰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망해야하지 혹시 회개하고 구원받아서는 안 될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도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학자들은 이 요나서가 이스라엘이 선민사상으로 이방 민족을 향한 배타적인 태도가 극성하던 시대에 선포되었던 말씀이라 해석합니다. 우리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요나서는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교가 실패했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와 족속을 구원하기 원하시는데 이들은 선민사상과 율법만을 고집하다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단단히 굳어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니 결국 사탄이 그 말씀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욥기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편협한 율법관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죄를 지으면 벌 받고 의를 행하면 복 받는다는 인과응보 교리에 집착하였습니다. 사실 이 교리는 신명기서나 잠언서의 핵심 교리입니다. 죄인은 망하고 의인은 흥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를 근거로 욥의 현재 고난은 그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에서는 결코 욥이 잘못을 범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욥은 고난을 당하였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척도로는 알 수 없는 모호한 고난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욥의 의로움을 인정해주시고 대신 욥의 세 친구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42:8)을 판단을 받습니다. 교리로 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잘 붙잡아야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열린 자세와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완고한 교리의 틀로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 중에서는 선불교가 있습니다. 선불교는 파격적인 행동과 말을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한 눈을 열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임제 선사란 분이 있는데 이 분의 다음과 같은 말 또한 유명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학파의 스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이는 고정화되고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진리는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인간들은 죽은 진리를 붙잡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과격하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교리를 만나면 교리를 죽여라” 이 예수는 낡은 예수, 인간이 만든 예수입니다. 이 예수가 죽어야 변화하고 늘 새로운 성령의 예수가 삽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낡고 인간을 얽매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가 죽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뜻을 실어내는 말씀이 삽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보았던 하나님이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감추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과 감추시는 하나님의 두 모습이 있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은 성경이나 자연을 통해서 계시되어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신 분, 감추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어둠과 같은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인식에서부터 겸손함이 나오고 열린 마음이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세시대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나 교리에 매우 신실하신 분들을 보면 매우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 신실함이 자칫 잘못하면 어떤 공격성이나 배타성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신실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신실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매우 신실했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인간이 만든 교리에 충실했지만 하나님께는 충실하지 않았기에 결국 하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굳어진 까닭

우리 마음이 이처럼 굳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첫째는 무엇보다 인간의 교만입니다. 자기 경험이나 생각만이 옳다는 태도입니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합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자신이 있는 우물 속과, 그 우물 속에서 바라다 보이는 동그란 작은 세계가 다입니다.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실은 마음속에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틀로 제한시켜 놓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틀에 맞는 박제화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입니다. 처음 죄를 저지를 때는 두렵기도 하고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죄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결국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 곧 양심이 무디어지고 죽은 사람이 됩니다. 창세기의 가인의 후예들 중 라멕이 대표적이라 할 것입니다. 가인의 육대손인 라멕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23-24) 가인은 동생을 죽인 자기 죄에 대하여 사람들이 보복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라멕은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77배의 보복을 행하겠다고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과 사랑 민감 지수를 따진다면 고대의 소돔과 고모라 수준일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영화 <부시맨>처럼 고대인들을 현대 사회로 불러온다면, 그들은 현대인들의 죄에 대한 무감각과 사랑 없는 무정함에 놀랄 것입니다. 현대 사회처럼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대화가 단절된 사회도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가 팽배하며, 죄를 행하면서도 무감각하며,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그 마음속은 늘 불안해하며 평안과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무감각한 현대인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은 고대인들보다 아마 10배, 100배나 더 강한 소리로 외쳐야 겨우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알아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굳고 너무 완악해졌습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어린 시절 상처를 많이 받았거나 성장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문을 닫아 버립니다. 한 번 크게 당한 상처 때문에 이후의 작은 충격에도 또 상처를 받을까봐서 얼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들의 반응은 무관심으로 나타나거나반대로 분노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도무지 자신의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고 꼭꼭 감추어둡니다.

심리 치료의 기본은 이런 감추어진 마음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굳은 땅을 파헤치는 작업입니다. 치유목회상담을 하시는 분들 중에 정태기 목사님이 유명합니다. 이분은 평생 동안 강한 열등감과 내성적 성격으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상처의 근원은 어린 시절 가정생활에서 기원했습니다. 

정태기 목사님은 어린 시절 폭군적인 아버지 밑에서 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른보다 먼저 생선에 젓가락을 대었다가 버릇없다고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그 손등을 내리쳤는데 젓가락이 천정에 닿을 정도로 아프게 맞았다고 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상처를 어머니 또한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바람난 남편이 보기 싫어 농사일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열등감과 내성적 성격으로 발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착하다 순하다고 칭찬했지만 자신의 속마음은 늘 분노와 한편으로는 열등감으로 평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것이 유학 가서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유학 가서 상담학을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정태기 목사의 지도교수는 그 마음을 열지 않는 제자 때문에 늘 불만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수가 정태기 교수를 부르더니 “나는 당신을 지도할 수 없다. 한국으로 그만 돌아가라”고 통고를 해버렸습니다. 6년여 동안 공부했던 것이 헛고생이 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정태기 목사님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더랍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무언데 나를 무시해!’ 화가 나서 문을 닫고 뛰쳐나왔는데 그 문을 얼마나 세게 닫았던지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며 휘청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 때 그 지도교수가 따라와서는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태기군 이제야 나와 공부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는군.”

정태기 목사는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분노였지만 처음으로 그 진심을 보이자 이제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도교수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닫으면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수단을 통하여, 곧 자연과 환경을 통하여,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데 그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닫는다고 하여 이 마음이 우리를 평안하게 놔두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분노와 실패감과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은연중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곧 자기 배우자나 자식들에게 그 상처를 전가시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좌절과 낙담,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휘어잡아 위험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10:2)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 마음이 굳어지고 상처난 것을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안에서 묵고 단단한 땅을 기경하십니다.

폴 틸리히와 관련된 예화입니다. 폴 틸리히는 현대를 대표하는 신학자중 한 분입니다. 틸리히는 대신학자였지만 히틀러 정권에서 추방되어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독일인이었기에 독일식의 악센트가 강한 영어 발음이 튀어나왔습니다. 이 독일식 발음이 나올 때마다 학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습니다. 그런데 이 웃음이 틸리히에게는 비웃음으로 들려왔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낯선 땅에 사는 것도 힘든데 자기 강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 당혹스러웠습니다. 한 학기 내내 이런 일이 발생하자 틸리히는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졌습니다. 

틸리히의 이 불안함을 알아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롤로 메이라고 이후에 탁월한 상담심리학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롤로 메이가 틸리히 교수의 우편함에 이런 내용의 글이 담긴 카드를 남겼습니다. “선생님 힘을 내세요. 우리가 웃는 것은 선생님의 발음 때문이지 강의 때문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너무나 훌륭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웃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우리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 카드를 읽는 순간 틸리히 교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아픔을 알아주는 것도 이렇게 놀라운데 죄인 된 인류의 아픔을 치유하러 오신 주님의 역사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입니다. 다 외면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랑 앞에 우리는 그동안 상처받고 닫혔던 마음들을 열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 문이 열린 순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이 옥토 밭에 심긴 씨앗처럼 열매를 맺는 풍성한 인생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이분들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열등감이 사라졌습니다. 이성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힘들어 하던 제 자신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저를 생각한다면 제가 목회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 설교를 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묵은 땅을 기경하여 옥토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을 의지하십시오. 이분께 우리 마음을 내어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 열매가 가득한 풍성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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