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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유 (고후 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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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 (고후 3:12-18)

최근 북한 탈북자들의 인권문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한 탈북자들이 중국공안당국이나 북한에서 파견된 보위부에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송환됩니다. 북한인권단체의 보고를 보면 중국이 지난 2월 한 달 동안 강제 북송한 탈북자가 3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중국은 탈북자를 매달 3-4백 명씩, 매년 4-5천 정도를 붙잡아 북송하는 것으로 우리 정보기관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회 청문회에 보고된 내용을 보면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송환되면 조사를 받고 수용소에 수감이 되는데 20만 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수용소에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는데,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고문과 노동,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굶어 죽거나 처형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정일 사망이후 김정은 정권은 체제붕괴를 막기 위해 탈북자는 무조건 사살하고 3대를 멸하라고 명령한 상태라 앞으로 탈북자의 인권은 더욱 비참해질 것입니다. 앞으로 국가적인 대책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이, 그리고 한국교회가 탈북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난 프랑스시민혁명,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링컨의 남북전쟁, 일제강점기에서 독립하기 위한 우리나라의 3.1운동, 최근 중동국가의 반정부 투쟁 등은 모두 다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자유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것은 정치적으로는 바로의 압제에 대한 항거지만, 영적으로는 사탄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유를 속박당하고, 또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가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그 주권을 빼앗기게 되면, 개인도, 나라의 모든 것도 다 빼앗겨버리고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가 상실됩니다. 

또 사람이 질병으로 인하여 병석에 누워있을 때에 얼마나 부자유하겠습니까? 부자유하다는 것은 자유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또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혀서 시달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귀신이 이끄는 대로 갈 곳과 안갈 곳을 분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악에 포로가 되어서 죄를 범하고 평생 죄책감으로 양심의 고통을 받고 살게 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이 단절되면 심령의 기갈과 생활의 빈곤이 오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상실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유’란 히브리어로 ‘붙들어 매인데서 풀어준다, 갇힌 데서 석방을 받는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어딘가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또 어딘가에 갇혀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갇혀 방황하고, 또 육신의 욕망의 늪을 헤매다가 지쳐 쓰러져 탄식하고 후회하며, 좌절과 절망 속에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기 삶이 괴로우면 스스로 자기 삶을 포기합니까? 얼마나 분노와 혈기가 강하면 남을 해치는 살인자가 되고 폭행범이 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물질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질병으로 인하여 속박되지 말며, 악한 사람들이 상처 준다고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까?

오늘 본문 15-16절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빛나므로 백성들이 볼 수 없어서 수건을 쓰고 내려온 것을 사도 바울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건은 ‘율법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도구요, 길잡이였습니다. 우리를 복음에로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절대시했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더 나아가 이 율법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이 율법주의가 거대한 시대 조류를 형성했습니다. 

이 율법주의라는 수건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덮고 있었고, 이 율법주의가 유대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율법의 목적과 인간의 본질도 모르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을 모르니 당연히 복음을 거절했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율법으로서는 의로워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롬 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의 잣대로 재면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롬 3:10절에 인간은 나면서부터 다 죄인이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는 율법을 무기로 삼아 우리를 속박하려 듭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우리를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 3:23절에서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는 죄와 율법아래 갇혀서 살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죄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가지 율법을 지키는 순간, 이미 다른 율법을 어기고 있음을 몰랐습니다. 또 사람이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몰랐습니다. 이미 깊은 죄성이 영혼에 침투해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만 생각하면 두려웠습니다. 

이 모습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리고 15절에서는 “오늘 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당시에도 구약성경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 율법을 지키려는 강박관념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루터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항상 더러운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벌을 내리실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친구와 함께 우산을 쓰고 가다가 친구가 벼락에 죽는 모습을 본 후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나중까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완전하게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되는 은혜로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의인으로 인정되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지 않으시는데, 자신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롬 6:17-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람, 이 사람이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롬 8:2절에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제 수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 끝을 보면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고, 16절을 보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자유를 상실한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데, 이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말과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풀어준다",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묶인 모든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결박으로부터 풀려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자유로운 관계, 천지만물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17절 말씀을 통해 오늘 말씀의 총 결론을 맺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랑이요, 용서요, 희생이요, 겸손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그 영이 있는 곳에 오로지 자유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이란 밧줄에 묶인 죄수와 같이 살았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조항에 묶여서 안식일에는 선한 일도 하면 안 됩니다. 아픈 사람도 고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얼마나 기계적입니까?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편 손이 마른 불쌍한 사람을 고치셨을 때 율법을 어겼다고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그런 엉터리 조항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하는 사람들은 마음껏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돕고, 예배하고 찬송합니다. 주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인이 되십시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십시오. 오직 한 분 주님께만 순종하십시오. 어려운 환경과 상황도 여러분을 결박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혀 착고에 손발이 묶여 있었지만, 그는 밤중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감옥의 담장이 그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어디서나 자유인이었습니다. 이런 자유가 있으면 어디서나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외적 조건 때문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습니다. 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우리를 묶어둘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각종 질병이 우리를 묶어 둘 수 없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묶어 둘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어디서나 하늘나라를 맛봅니다. 궁궐이나 초막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언제나 기쁨이 충만하고 감사가 충만한 삶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 모든 인류에게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항상 성령 충만하여 성령과 함께 하며, 율법에서 벗어나 주의 은혜에 거하고,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며, 열심히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참 자유를 영원토록 누리시는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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