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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막 9: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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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막 9:33-35)
 
이 시대는 1등에게만 박수를 칩니다.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일등을 향해서만 박수를 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등을 향해서만 환호합니다. 즉, 최고만을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과거 중·고등학교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시험을 자주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을 때는 성적표를 받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고역이었습니까? 성적표를 받는 것이 그토록 고역이었던 이유는 나의 등수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스포츠는 대부분 랭킹전입니다. 그래야 관중이 흥분하고 열광에 빠지게 됩니다. 연예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 앨범 하나가 나오면 바로 순위가 매겨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순위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계는 어떠합니까? 올해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과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있습니다. 누가 1등 하는가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희비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현재와 미래가 바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더욱 1등에 관심이 몰립니다. 

그렇다면 1등을 향한 욕망, 최고를 향한 야망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야망이 때로는 경쟁을 유도하여 더욱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동기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위대한 것을 향해 내딛게 만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류역사는 이런 것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먹고 마시는 생리적인 욕망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최고의 것을 선물할 수 있을까?’, ‘이 기업을 어떻게 더 크게 육성할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나라와 국민들의 풍요를 위해서 나의 삶이 어떻게 쓰임 받을까’를 생각하며 우리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가 되는 1등은 단 한 명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각 분야를 아무리 작게 쪼개서 분야별로 1등을 준다 해도, 1등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러 명이 1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고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미어지기 시작합니다. 1등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상처를 입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1등을 하지 못하면 마치 낙오자처럼 취급하는 세상의 가치관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게 합니다. 

지금의 시대는 끊임없이 경쟁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일등주의에 반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정한 1등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1등의 길은 무엇일까요?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마가복음 9:33)

성경에서는 길에서 ‘토론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본래의 뜻은 ‘크게 소리를 높여서 다투었다’입니다. 논쟁을 아주 거세게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며, 이 길은 ‘고난의 길이요, 그것은 십자가의 수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말씀하실 때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들 마음 속에 생겼던 열망과 야망이 다시 그들의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올랐습니다. ‘예수님만 뒤따라가면 한 밑천 잡을 수 있을 텐데, 예수님만 뒤따라가면 우리가 출세할 수도 있을 텐데, 권력의 정상에 올라가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가 될 수도 있을 텐데’하는 그때 마음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남자들의 전형적인 힘자랑이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두 세 명만 모이면 누가 더 힘이 센지를 알게 모르게 경쟁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으면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이가 몇이나 되시오?” 나이로 높고 낮음을 따지려는 것입니다. 또 “어디서 사시오?”라고 물어보며 지역과 동네로 따지려고 합니다. “직장이 무엇이요? 직위가 무엇이오?” 직업으로 따지려고도 합니다. 이것이 남자들의 세계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 누가 더 힘이 센가?’에 대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길을 가는 도중에 그렇게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지도자인지, 누가 예수님의 1순위 제자인지를 두고 싸운 것입니다. 서로가 “I am The Best!”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걸그룹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2NE1’이라는 그룹이 부른 노래 가사가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제일 잘나가? 내가 제일 잘나가!” 이런 가사입니다. 노래 내용이 ‘내가 제일 잘나간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세계나 여자들의 세계나 똑같이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런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는 욕망이며 야망입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욕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야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야망이란 무자비한 스승이다. 야망을 추구하는 자들은 오히려 야망이 없었다면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쉽게 잊거나 무시해 버린다.”

오히려 야망 때문에 잔인해지고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 즉 지혜를 지키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등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은 인간을 비인간화 시킵니다. 

1등이 되려는 자의 영은 잘못된 영에 의해서 붙잡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고, 더 좋은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욕의 영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어느 분야에 들어가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들어가도 나보다 멋지게 생긴 사람이 있고, 나보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더 나은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면 우리의 인생은 불행해집니다. 급해지기 시작하고 참을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 다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본인이 얻고자 하는 것, 서고자 하는 자리를 획득하고 싶어집니다. 그 결과로 생기는 것이 바로 거짓의 영입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새치기를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초대받지 않은 잔치에도 잠입해 들어갑니다. 정당하게 표를 사지 않고 일등석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거짓말이 탄로 나게 되더라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이런 위험을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었냐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속마음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34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마가복음 9:34)

누가 큰지를 따지며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욕심을 갖게 되면, 인간은 서서히 비인간화되고 잔인해지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세력을 파괴시키기 시작합니다. 

본래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동지였습니다. 뜻을 합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힘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다투기 시작하면서 동지가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친구가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언성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과거를 들추게 됩니다. 

제자들은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하였을 것입니다. “야, 언제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한 번 따져보자. 내가 먼저 오지 않았느냐? 넌 그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느냐?” 시간적인 순서를 따졌을 겁니다. 그러면 한 편에서는 “그것만이 다가 아니지 않느냐? 내가 이 공동체를 위해서 얼마나 충성했는지 모르느냐? 내가 너보다 더 일을 많이 했지 않느냐? 내가 이 공동체를 위해서 돈과 재물을 얼마나 많이 내었는지, 얼마나 수고하고 애썼는지 너희가 다 알지 않느냐?”라고 따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다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쌓아왔던 공적들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은 귀엽기라도 합니다. 이보다 더 나쁜 모습은, 그동안 내가 한 일들을 자랑하며 내가 높아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높아진다 해도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 곳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면 됩니다. “너, 이런 문제 있지? 너, 이런 약점 있지?” 약점을 들추어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다른 사람을 끌어내립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높아지기를 원하는 비열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람은 못되지기 시작합니다. 탐욕스러워지고 잔인해집니다. 그리고 양심은 무뎌집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치·사회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양심이 무뎌지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남을 끌어내리고 내가 높아지려는 전략으로 경쟁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픔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치·사회 지도자에게서만 발견되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도 똑같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최고가 되는 다른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3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9:35)

예수님은 길 가는 중에는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동네의 집에 들어가셔서야 이야기를 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랍비들이 가르칠 때 했던 유대지역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첫째가 되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뭇 사람의 마지막이 되어라.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라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는 길과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되는 길은 전혀 다른 모습, 다른 방법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네가 세상에서 으뜸이 되려고 하면 가장 낮은 자, 가장 소외된 자,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인생에 바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닥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지 알지 못한채 지도자가 되고 1등이 되면, 교만해지고 오만방자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아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자가 되어서 낮은 자들의 아픔과 슬픔, 낮은 자의 외로움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에 적극 참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에 참여하지 않고 높은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참다운 지도자의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는 것입니다. 남을 첫째 되게 하는 첫째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으뜸은 오직 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으뜸이 되는 것은 한 명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고, 남을 높이고, 남을 위로할 때 그도 첫째가 되고 너도 첫째가 되고, 너도 꼴찌가 되고, 그 사람도 꼴찌가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역사, 생명의 역사, 섬김의 역사, 사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역사가 이 땅 위에 펼쳐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회복과 치유의 비결은 섬김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을 섬기고 계십니까? 가족을 섬기고 계십니까? 직장을 섬기고 계십니까? 동료들을 섬기고 계십니까?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까? 이 나라와 이 민족, 그리고 이 세계를 향해 섬기는 마음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꼴찌가 첫째가 되는 생명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섬김은 누가 강제로 시키게 되었을 때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너 여기서 섬겨라!” 여러분, 누가 강제로 그렇게 시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무작정 섬기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섬기란 말인가?’ 아마 답답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가진 것이 있어야 섬김의 축복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있으면 섬길 수 있을까요? 건강이 있으면 섬길 수 있을까요? 세상의 높은 직책과 직분이 있으면 섬길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만으로 섬김을 감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섬김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 마음에 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 섬김의 행위는 교만이고 자기 과시입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그래서 자기 이익을 탐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을 때 그리스도의 섬김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너의 아버지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모두 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 바로 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약속으로부터 섬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내 손과 발이 움직임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연약한 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자를 만났을 때도 자유로웠고, 가난한 자를 만났을 때도 자유로웠습니다. 명예를 가진 자를 만났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를 만났을 때도 조롱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섬기실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무엇을 생각하든 괜찮습니다. 공부를 해도 괜찮습니다. 글을 써도 괜찮습니다. 몸으로 춤추고 입으로 노래해도 괜찮습니다. 정치를 하든, 기업을 하든, 직장에 다니든, 집안일을 하든,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그 자리에서, 고통 받는 자가 치유받고 회복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으뜸 되는 것, 즉 1등이 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1등이 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낮은 자리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비로소 1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셈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를 섬길 때, 공동체가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서 있는 자리에서 맡겨진 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하는 자가 애국자입니다. 그게 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 며칠 후면 3·1절 93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독립투사가 되었던 백범선생의 백범일지를 보면, 그는 상해임시정부 시절 어느 날, 자기의 호를 ‘백범’으로 바꿉니다.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라고 하는 두 글자를 따서 ‘백범’이라고 지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모습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호를 그렇게 지은 것은 천민과 평민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백성들 하나하나가 애국심으로 가득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 갇혔을 때 대한민국 독립의 날을 염원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언제나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들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삶의 현장에서,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공동체를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나의 이웃들을 섬기게 될 때 공동체가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활력이 생깁니다. 서로 격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서로가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어렵습니다. 모두 남의 탓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자기와 다르면 적대자로 여기며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섬김으로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정신의 회복, 이 땅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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