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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길을 따라> -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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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길을 따라> -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 11:28-30)


1. 땅에서 하늘처럼

이어령 박사의 딸, 이민아 목사가 며칠 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어령 박사를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이끈 딸이었습니다. 올해 초 위암말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상태가 회복되어 CTS에 성경강사로, 여러 교회의 간증 강사로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LA지역 검사를 역임하며 ADHD로 고생하는 아들을 고치려고 검사를 사임하고 변호사로 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상선 암 수술을 두 차례에 걸쳐 받았고 기도로 회복되었고, 실명할 정도로 망막이 손상되었지만, 역시 기도로 치유받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문상객을 맞고 있는 이어령 박사는 자신의 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은 평소 나에게 ‘하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어요. 하늘 아버지를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서요. 한국에 돌아온 딸에게 내 카드를 주면서 ‘마음껏 쓰라’ 고 했어요. 딸은 아버지 카드를 ‘긁는 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서 웃었어요. 그러면서 하늘 아버지도 ‘긁는 대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 아인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땅에서 하늘처럼’ 살았어요.” (국민일보, 3월17일자 신문에서 인용)

문제와 상처,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땅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2.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에 살면서 하늘 아버지를 늘 생각하며 사셨습니다. ‘땅에서 하늘처럼’ 사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 율법교사, 바리새인들은 하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이 땅의 권력, 물질, 자기자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민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과중한 세금을 부담하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613가지나 되는 율법 규정을 두어서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율법 규정이라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곡식밭을 걸어 지나가는 것이 곡식이 발목까지 올 때는 허용되지만, 무릎 높이까지 자라면 허용되지 않습니다. 무릎에 곡식이 닿으면, 다리에 걸려 곡식 이삭이 떨어질 수 있게 되므로 그것은 타작하는 행위가 되므로 금한 것입니다. 

여자들은 안식일에 거울을 보는 것을 금했습니다. 거울을 보다가 흰 머리카락이 발견되면 뽑아버리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 때문에 사전에 차단한 것입니다. 밖에서 돌아오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정결규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었는데,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어겼다고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쳤을 때도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 고치는 것도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지켜오는 이런 율법 규정들이 사람을 얽어매고, 더욱 고통에 빠뜨리고, 서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예수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의 근본정신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정신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법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법을 위한 규정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법보다는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법은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에 대해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과 사귀며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서민들에게 법을 들이대며, 법대로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 거칠고 딱딱합니다. 법을 어긴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들을 무시하고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환경에서 하신 것입니다.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질병의 짐, 자식의 짐, 부모 봉양의 짐, 직장 업무의 짐, 교회에서 맡은 사역의 짐, 경제적인 고통, 사업의 짐, 인간관계의 갈등의 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이 짐을 혼자 힘으로 지다 감당 못해 우울증에 걸리고, 자포자기하곤 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하여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시편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십니다. 날마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종교개혁 때문에 교황청의 종교재판을 받을 때부터 불면증으로 시달려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면증은 죽을 때까지 고침받지 못했습니다. 교황으로부터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 극심한 심적 압박감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루터는 이렇게 기도하며 잠을 잤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야 내 것이지."
"제 아내는 누구의 것입니까?" "네 아내도 내 것이지."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너의 아이들도 내 것이지."
"하나님,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다 맡기고 저는 편히 자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져야 한다’ 고 생각하니 그것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얽어맵니다.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기쁨이 없습니다. 
내 힘, 내 의지, 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니,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예수님께 내려놓으면 평안합니다. 가볍습니다. 재미있습니다. 행복합니다. 

내 짐, 내 멍에는 예수님께 내려놓고, 대신에 예수님의 멍에를 지면 됩니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수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멍에를 메워주셨습니다. 사랑의 멍에, 이것은 쉽고 가볍습니다. 

한 소년이 자기보다 더 어린 절름발이 소년을 업고 있었습니다. 어른이 보고 마음이 언짢아서 말했습니다. “네가 업고 가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구나.” 
소년이 그 어른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뇨. 짐이 아닙니다. 제 동생입니다.”
(William Barclay, The Gospel of Matthew, vol. 2, p.18)

사랑으로 하는 것은 짐이 아닙니다.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항상 가볍고 쉽습니다. 
여기에 “쉽다”는 단어는 원어로 “은혜로운, 달콤한, 즐거운” 이란 뜻입니다. 
사랑으로 하면, 결코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입니다. 
달콤하고 즐겁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정에서 맡은 책임, 직장에서의 업무, 사업상 해야 할 일, 교회에서의 사역, 자식 양육, 부모 봉양 등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면 쉽고 가볍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할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롬 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할 때, “부은바 됨”의 시제가 현재완료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오늘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시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과거에 우리에게 부어졌습니다.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오늘도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우리 스스로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가지가 나무둥치로부터 수액을 공급받듯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감당할 힘과 위로를 공급받습니다. 

4. 주님을 바라보라

이제 주님의 초청에 다시 귀를 기울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까지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앗아갑니다. 
예수님께 나오셨으니, 예수님께 다 내려놓읍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신 주님,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주님,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고침받았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고침받고 회복되는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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