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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과 종교의 불편한 동거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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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종교의 불편한 동거 (행 3:1-10)

예로부터 빈민은 종교에서 우군을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 빈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아주고 동정하는 이들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시설 앞에는 늘 빈민들이 모이게 돼 있습니다. 제가 서울의 어느 사찰 앞을 지나면서 눈여겨 본 것은 그 사찰 입구 앞에 상당수의 빈민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쫓아내지 않고 방치할만한 장소가 종교시설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신체적 장애가 있는 걸인이 어디를 가면 받아주고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적선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성전 문가에라도 앉아 있어야 누가 성전에 들어가다가 적선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종교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종교라 함은 기독교뿐만이 아니고 모든 일반적인 종교를 포함하는 것인데 빈민을 구제하고 도와주는 일을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생을 구원하겠다고 하면서 빈민을, 약자를 모르는 척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성격상 원하고 안 원하고를 떠나서 빈민을 지원하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빈민의 동거가 불가피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불편한 이유가 무엇이냐. 불가피하게 서로 만나기는 했지만 서로가 원해서 만난 것이 아니고 서로의 입장 때문에 부득이 만난 면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빈민의 입장에서는 사실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빈민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합니다. 본인이 원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갈 데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선택권이 있다면 더 좋은 자리, 더 기쁜 자리, 더 행복한 자리에 있고 싶을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과 풍성함이 있는 곳에 있고 싶지, 누가 목사와 신부님과 수녀님과 스님들이 있는 곳에 가서 앉아 있고 싶겠습니까. 선택권이 있다면 자기의 며느리나 딸이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을 원하지 누가 처음 본 남이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선택권이 있다면 차라리 호텔이나 백화점이나 놀이공원에 있고 싶지, 누가 미문가에 앉아있고 싶겠습니까.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 에벗, 그는 어려서부터 어디에서 자라났습니까.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나마 고아인 자신을 돌아보는 기관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본인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런 데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디의 꿈과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자기를 후원해 주는 이름 모를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고 그를 만나보기를 사모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본 어떤 영화는 제목을 잊어버렸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soup Kitchen에 가서 봉사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soup Kitchen은 우리나라의 무료급식소 같은 곳입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거들기도 하고 또 식사하는 노숙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그런 봉사를 하는 여학생인데 어느 추수감사절에 이 여학생이 의무감에서 혼자 앉아 식사중인 어느 노숙자 앞에 가서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 노숙자가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이 묻습니다. ‘저와 대화하기가 싫으세요?’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나는 내 대화상대를 내가 선택하고 싶다.’ 그 말을 듣고 그 여학생은 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그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의무감에서 독거노인과 따뜻한 대화라도 나누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그 아저씨의 입장에서는 ‘나는 당신과 대화할 마음이 없는데 내가 여기서 혼자 추수감사절 식사를 먹는다고 나에게 대화까지 요구하지 말아 달라.’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다 잊었는데 그 장면만은 제 인상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서로 만나기는 했는데 둘 다 불편한 것입니다. 한쪽은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의무감, 책임감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쪽은 부득이 그 자리에 오긴 했지만 만일 선택권이 있었다면 다른 곳에 있었으면 좋겠고 형편이 더 나았으면 좋겠고 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종교와 빈민은 동거해 왔지만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아주 좁은 골목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핸들을 조금이라도 좌로나 우로나 틀면 자동차가 긁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 성경 본문에 드러내놓고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변에 흐르는 정서를 통하여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가에 앉아있는 이 장애우, 그가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미문을 통과해서 성전에 자주 들어갔고 그 걸인은 매일 거기 와서 앉아있는 경우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사람을 여기 초청한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이 유일하게 쫓겨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매일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면서 이 사람이 여기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평소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4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고 말한 것으로 짐작하건대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베드로와 요한도 그 사람을 주목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그 자리에 있지만 늘 있는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지나쳤다는 얘기입니다. 

서로 동거를 하기는 했지만 베드로와 요한도 이 걸인을 평소에는 주목하지 않았고 그 걸인도 베드로와 요한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어요. 제가 종교인을 모독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본문 상에 나타나 있는 이 상태가 종교와 빈민 간에 존재하는 평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옳으냐 그르냐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평소에는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미문가의 장애우를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냥 거기 있는 사람으로만 여겼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기록된 이 순간에 뭔가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장애우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엇을 얻을까 기대했어요. 무엇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을까요? 돈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그에게 주고자 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 구절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돈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설사 돈이 있더라도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그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신 것은 은과 금을 베풀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에요.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이고 봉사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예수께서 베드로든 요한이든 야고보든 이런 이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목적은 은과 금을 베풀기 위한 것은 아니에요. 주님이 이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일도 은과 금을 베풀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지금 돈이 있든 없든 그가 말하는 것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와 능력과 사명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을 ‘내게 있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있는 것은 은과 금은 아니에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그것이 무엇이냐?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 바로 당신의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내 이름으로 새 방언을 말하며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그리 되리라’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주셨고 당신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고 당신의 이름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천하에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요, 믿는 자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에 주신 사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베드로도 그 사람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베드로를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 자리에 있는 건 맞아요. 매일 마주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것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의 형편에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얘기냐. 큰 도움이 됩니다. 은과 금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사람이 영원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서 부유한 삶을 살기 이전에 자기의 원래 직업에 돌아가고 원래 가정에 돌아가기 이전에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다음에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성전 문간에 오랜 세월 앉아있었지만 그러나 몸은 성전 문간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와 빈민이 동거하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중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빈민이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신앙도 그 빈민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의 참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인생의 변화, 운명의 변화, 영혼의 변화, 사는 방식의 변화, 목적의 변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일으키는 변화인 것입니다. 누가 이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느냐. 오직 나사렛 예수만이 이 사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병자든,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줄 수 있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은 나의 사명을 아는 것이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도울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방식이 아닌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애매하게 생각해요. 애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뭔가 남을 도와줘야 될 텐데 이웃을 사랑해야 될 텐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애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뭔가 해야 되는데, 뭔가 하라고 했는데 무엇을 해야 될지는 모르겠고 안 할 수는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마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내게 있는 모든 것,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내게 있는 것이 은과 금이 아닐지라도 내게 있는 것이 은과 금보다도 더 도움이 되고 더 힘이 되고 더 필요하고 더 귀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하면 은과 금을 더 많이 얻고 그래서 은과 금을 나눠줄 수 있느냐를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은과 금을 베푸셨다는 성경구절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일을 하셨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에는 은과 금을 나눠주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예수님이 아무것도 안하셨다고 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돕는 것이 반드시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은과 금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은과 금을 베풀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색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로써 우리가 정말로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을 베풀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은과 금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 우리의 사명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애초부터 베드로가 이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를 증거하지 않았느냐.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임의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그 순간에 감동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그 순간에 그 마음을 주시고 그러한 믿음을 주시고 이러한 능력이 역사하게 하실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영적인 사역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임의로 이 사람을 일으켰다가는 다시 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뭔가 영적인 다이내믹이 일어나는 순간이에요. 이건 이 사람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수년 동안 예배당의 문간에 앉아있는 분이 계실지 몰라요. 그동안에 교회와 기독교와 불편한 동거 관계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 깊이 들어올 수도 없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불편한 관계. 

여러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앉을 자리를 제공하는 교회가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친절, 우정,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요. 친절과 우정은 다른 곳에서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유일하게 교회가 베풀 수 있는 사명과 능력을 부여받은 곳입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본질이요, 자산이요, 능력이요, 사명이요, 이것이 믿음이에요. 이것은 미문가의 장애우 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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