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고 가더니 (요 4:43-54)

첨부 1


믿고 가더니 (요 4:43-54)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의 젊은 시절 우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관중은 친구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 관중이 항상 많이 가져갔으나 포숙은 관중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관중이 자기보다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일에 실패했을 때 포숙은 그가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때를 못 만났으므로 실패한 것이라고 두둔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세 번 취직했다가 세 번 다 쫓겨났을 때에도 때를 못 만난 탓이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또한 관중이 세 번 싸워 세 번 다 패하고 도망쳐 왔을 때도 포숙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관중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므로 몸을 아낌이 마땅하다고 양해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섬기던 규가 패하여 죽었을 때 같이 죽지 못하고 잡히어 욕을 보았을 때도, 포숙은 그를 염치없는 놈이라고 욕하지 않고 도리어 관중이 소절을 넘어서 천하에 대공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잘 변명해 주었습니다. 

관중도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시다. 그러나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관포지교라 해서 아름다운 우정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해하고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이런 배려 넘치는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을 비유하여 개와 고양이 같은 사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개와 고양이는 먹고 먹히는 사이는 아니고 경쟁 상태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앙숙이 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양이와 개는 왜 아웅다웅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순전히 의사표시를 하는 신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는 장난을 치고 놀 때 등을 굽히는 자세를 취하는데 반해 고양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경계할 때 등을 굽힙니다. 그러니 개가 고양이에게 “우리 함께 놀자”는 뜻으로 등을 굽힌 것을 고양이는 “저 녀석 나를 경계하는구나”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들고 흔드는데 고양이는 무서운 상태가 나타나거나 긴장할 때 꼬리를 위로 세웁니다. 또한 개는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늘어뜨려 두 다리 사이에 끼우는데 고양이는 반가움을 표현할 때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려 흔듭니다. 이런 오해로 인해 비록 한 지붕아래 같은 주인 밑에서 길러지더라도 둘 사이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양이와 개가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와 고향이가 아주 친숙하게 지내는 경우를 관찰한 예가 있습니다. 하지만 친숙하게 지낸다고 해서 오해의 소지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다만 사람은 말을 하니까 대화로 오해를 풀 수는 있지만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에 뜻밖의 오해를 불러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사소한 신호의 차이로 냉전기류가 흐르는 일이 많습니다. 이럴 때는 내 기준의 신호를 버리고 상대의 신호를 따라주는 아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야기가 통하게 되고 오해는 눈녹듯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더욱 상처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틀이 지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마을을 떠나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고향이라면 어찌 생각하면 가장 그리운 곳이요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곳 출신의 선지자를 더욱 더 알아주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합니다. 그가 과거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다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선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를 대하는 미리암과 아론의 모습 역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자기네가 누나요 형입니다. 그런데 동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섬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자기들이 보기에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어찌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있겠고 고운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을 때 이를 비난합니다. 어찌해서 이방 여인을 취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이방 여인이었을지라도 그녀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미 그녀가 하나님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방인이라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미리암과 아론의 입장에서는 이건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방인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지 단순히 이방인은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누나요 형이라는 입장이 쉽게 비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 이전에 자기들의 동생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직임으로 사람을 보기 보다는 인간적인 면으로 상대방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에게 직임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쉽게 판단을 합니다. 그는 아무개 아들이고 과거는 어떻고 현재는 어떻다고 합니다. 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직분자로서 부족한 모습도 많습니다. 물론 비난받을 만한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농사꾼을 들어 선지자로 쓰시기도 했고 겁쟁이를 불러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시골 베들레헴의 어린 목동을 불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처음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울은 그래도 볼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덩치 하나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곱디고운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어찌 무시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가 자기보다 더 잘나간다 생각하니 사울로서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그랬던 그가 다윗을 시기합니다. 아니 다윗이 자기 사위도 되는데 그렇다면 기쁘게 축하해주고 사위도 자식인데 내 아들 요나단이 뒤를 이어도 좋고 네가 내 뒤를 이어도 좋다. 둘이 기분 좋게 선의의 경쟁을 해 보도록 하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더군다나 다윗이 자기에게 역사하는 악귀도 수금을 타서 쫓아내주죠 전쟁만 났다하면 앞장서서 적군을 물리치죠, 아니 생각해보면 이보다 이 예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뭐가 못마땅해서 그렇게도 죽이려고 대들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그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를 내 뒤를 이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나도 안다.” 그렇다면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좀 특별나기는 했어도 그래봤자 산동네의 무식한 목수의 아들일 뿐입니다. 
마13:54-58에 보면,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오늘 말씀도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집안 형편을 잘 아는 같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좀 남다르다고는 생각했을지언정 그가 메시야라는 그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잘 안다고 하나 겉만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우리는 사실 겉만 보고 평가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일하시는가 하면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따르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쓰십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그토록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수없이 말하면서 나는 못한다고 하는데도 하나님은 기어코 모세 너를 통해서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내가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나는 입술이 둔한 자라고 하는 모세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도 그가 마을 잘 하는 사람 같았으면 애굽 사람을 쳐 죽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왕자의 신분을 가지고도 말로 설득이 안 되니까, 한 마디로 말이 안 통하니까 주먹이 먼저 나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광야에서 목자 생활 40년입니다. 누구 만날 사람도 별로 없고 뭐 할 말이 그렇게 많았겠습니까? 거의 온 종일 양들과 함께 침묵 속에서 생활해왔던 40년의 세월입니다. 설사 말을 잘 했더라도 입술이 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상태로 어떻게 바로에게 가서 바로를 설득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나는 입술이 둔하다고 하면서 거듭거듭 손사래를 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보십시오. 하나님은 더 끈질기십니다. 내가 쓰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입술이 둔하다고 순사래치는 너 모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입술이 둔하다고 하는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론을 너의 대언자로 세운다고까지 하시면서도 직접 아론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를 통해서 아론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결국 모세가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셨고 이윽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라와 그를 따르는 백성의 지도자들 250명은 여전히 모세를 대적하지 않습니까? 너만 하나님의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요. 어찌 보면 가장 가까이 있기에 그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이 더 눈에 잘 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그런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 격려자로서의 역할을 다한다면 가정도 평안하고 교회도 평안하며 하나님의 역사는 놀랍도록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역사의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시인하십시오. 그래서 새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산 증인들 하나님의 귀한 직임 맡은 하나님의 일꾼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도착을 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고향 나사렛에서 좀 떨어져 있어 예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래도 예수가 행한 여러 이적들을 보고 또 다른 이적들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자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까지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표적과 기사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어찌 그 당시만이겠습니까? 오늘날도 그저 믿음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친구 좋아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시는 이유도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표적은 좋아하고 신기해하면서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여전히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래서 안 되고 너는 저래서 안 된다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 생각입니다. 우리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운 문제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말씀대로만 살려고 하면 그토록 핍박도 생기고 더 큰 어려움도 찾아오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왕에 교회에 나왔으면 모든 것이 순탄하여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저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 계속해서 좀 잘 나가는가 싶다가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갑니까? 

그것도 의를 지키려고 했는데 그러면 상이 주어져야지 감옥이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여기 깊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요셉에게 주셨던 꿈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요셉을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그냥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다면 어찌 애굽의 총리가 될 수가 있었겠으며 저가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어찌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날 수가 있었겠고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지 못하고야 어찌 그의 꿈을 해몽해줄 수 있었겠고 그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었기에 나중 바로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를 만나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 열려진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갈릴리 가나에 이르십니다. 그때 자기 아들이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는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하고 요청을 합니다. 
보십시오.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면 어찌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 요청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행하셨던 이적들을 보았기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왕이 신하의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과 예루살렘에서의 여러 가지 기적에 대해 이야기를 왕의 신하에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 헐레벌떡 그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함께 가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을 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아버지입니다. 비록 나라에서는 왕의 신하로서 잘 나가는 권세 있는 사람이지만 자식이 죽어 가는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의사도 모셔와 보고 약도 써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도 없이 자식이 죽어갑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침 그 예수가 갈릴리 가나에 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신분이고 뭐고 따질 겨를도 없이 가나까지 한 걸음에 달려옵니다. 그리고는 내 아들을 고쳐달라고 다짜고짜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 보면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한계를 봅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을 요기서 봅니다. 자식만 살릴 수 있다면 무언들 못하겠습니까? 여기에 무슨 체면이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여기 이 왕의 신하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입니다. 유일한 문제의 해결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 저의 지혜요 그 예수께 자기 자식 문제를 내려놓았다고 하는 것이 또한 지혜입니다. 
살다 보면 덫에 걸린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기적만이 돌파구입니다. 주님은 아주 가끔씩 기적의 돌파구를 직접 여십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다 위의 메추라기 떼를 바람몰이해 주시듯이 말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가끔씩은 주님의 직접적인 기적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덫에 걸린 것 같은 인생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나아와 주님께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어찌 보면 참으로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가 결코 쉽지를 않습니다. 무어보다 악한 마귀가 우리의 입을 열지 못하게 자꾸 막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자꾸 의심을 줍니다. “그런다고 될 것 같아?”
하지만 시편 기자는 시 40:1~2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힘들다고만 하시지 마시고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아뢰십시오. 그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주님을 통해서 형통한 길에서 행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하의 마음에 조금은 조급합니다. 혹시 그 동안에 내 아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 그래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된 것을 보고 떠나온 길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했던 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니 다급한 마음에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다시금 말씀을 드리니 예수님은 한 마디로 선언합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랬더니 보십시오. 이 신하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합니다. 

아니 예수님하고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자기를 찾아오는 종들과 만나게 되는데 종들의 말이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으니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데 그 시간이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가 아닙니까? 그래 그 사람과 그 온 집안이 다 믿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심지어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고까지 하며 배척을 하는데 거꾸로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표적을 본 것도 아니고 단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예수님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가는 것입니다. 믿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신하는 “아닙니다. 같이 가셔야만 됩니다. 같이 가셔서 고쳐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기 않았습니다. 그냥 믿고 갔습니다. 이 신하의 아들이 살아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은혜로 이 병에서 고침 받는 역사가 나타났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사람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이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 귀한 믿음의 순종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 죽었음” 
“불행한 일이 겹쳐서 일어나는 것을 네 글자로 ‘설( )가( )’이라고 합니까?” “정답은? (답)설사가또”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답) 그러게 말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면서 겪었던 재미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입니다. 어린 학생들의 엉뚱하지만 귀여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까요?”라는 질문에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를 얻게 되고, 순종한 사람에게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렘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고 요16:24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종하십시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더니 아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렇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순종하는 믿음이 사람을 위해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성도요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