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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보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눅 23: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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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눅 23:26-32)


갈보리교회 로고는 갈보리 산을 그린 것입니다. 교회 수첩에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Calvary’라고 하는 영어의 첫 글자 ‘C’와 ‘Church’라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 ‘C’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산의 모양이 되고 그 가운데 십자가를 그려 놓으니까 갈보리 산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라틴어의 ‘갈바리아(Calvaria)’에서 나온 말로서 뜻이 좀 흉악합니다. 바로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이 붙은 가장 큰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갈보리 산은 그 모습이 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둥그런 민둥산이라서 마치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의 두개골 모습과 비슷한 볼품이 없는 산입니다. 그 다음에 그곳이 죄수들을 끌어다가 사형시키는 곳이었기 때문에 시체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실제로 해골바가지가 많이 있었습니다. 

본래 이 십자가 형법의 근본 취지는 저렇게 흉악한 죄인의 몸이 땅에 닿지 않아야 한다고 해서 공중에서 없어지게 하기 위해 공중에 매달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이 공중에서 죽자마자 독수리들이 새까맣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까맣게 달라붙어서 한 시간도 안 걸리게 다 뜯어먹고 결국 뼈다귀만 땅에 뒹굴러 있게 되는 갈바리아! 그곳이 예루살렘 근방에 있어서 제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기는 유월절이라고 했습니다. 

전국에서 약 250만 정도의 군중이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사람 때문에 다닐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입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성남시보다 적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에 250만이 별안간 모이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해 유월절에는 다른 해보다 훨씬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 때문입니다. 온갖 소문이 퍼져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다.” 또 다른 소문은 “갈릴리 지방에서 정치혁명을 일으키려다 실패해서 사형 당한다.” “죽기 전에 권능을 발휘해서 빌라도를 멸망시킬 것이다.” 모두 다 궁금해 합니다. 

유대 나라에 요세푸스라고 최고의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록에 그 당시까지 예루살렘에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온통 외국에 있는 유대인들까지 다 와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 궁금하여서 그런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58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 결과를 보려고 대제사장의 뜰에 가서 기웃거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나?’ 그 되는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의 운명과 유대 나라, 또 베드로의 운명이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보려고 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늘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승자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패자는 쓸쓸히 홀로 남게 됩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승리로 끝냈을 때 미국의 모든 신문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인기도가 제일 높다고 했습니다.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기립 박수만 20번 받았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빌라도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국권 회복을 시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인기도는 옛날 다윗같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족속 골리앗 대장을 쓰러뜨렸을 때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사춘기를 이제 막 벗어난 목동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적 승리를 가져오니까 사울 왕보다 인기가 더 높아져서 성경에도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은 당나귀를 타시고 바로 지금의 이 지역을 지나가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와서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다 깔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말한 내용 속에 나타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 말은 “다윗 왕조의 대를 이을 분이시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의 사역으로 봤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 그렇게 부르는 소리보다 성경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 당신은 다윗 왕조의 대를 이어 이스라엘의 국권 회복을 시킬 메시야여!”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지금은 최고의 비참한 모습이 되어서 자신이 달려 죽어야 될 사형 틀인 십자가를 매고 힘겨워하면서 자기가 죽을 사형장인 바로 이 갈바리아를 향해서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실망을 해서 그토록 외치던 환영의 소리인 “호산나”가 변해서 “죽여라! 죽여라!”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까지 담보하며 맹세하던 제자들도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입니다. 

승리가 보였을 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패자가 되어서 죽음의 길을 올라가는 갈보리 산을 향하는 예수의 뒤에는 구경꾼만 있습니다. 아무도 예수를 따르지 않습니다. 250만의 군중이 조롱과 야유를 퍼붓는 그 소리를 다 들으면서 로마 군인의 그 번쩍이는 갑옷 앞에 비참한 죄수복 차림으로 골고다를 가시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채찍으로 때리니까 피가 흐릅니다. 비아 돌로로사를 가보십시오. 예수님이 14번 쓰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채찍에 맞아 기운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바로 그 처참한 골고다 행진 과정에서 일어난 작은 일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이유와 의미를 사순절에 밝혀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에는 구경꾼 신분으로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200만이 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별안간 선택을 받습니다.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구레네는 지방 이름입니다. 아프리카 북쪽 해안가 작은 도시입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땅과 멀지 않습니다. 걸어서 오고갈 수 있는 거리라서 유대인들이 가서 많이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가능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찾아옵니다. 

이 사람도 유월절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본국 땅에 여행 온 것입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라고 성경에 밝혔으며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나라나 똑같은 법이 존재합니다. 비상시에 군대의 권력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6·25 동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6월 25일이니까 한창 보리가 생산되어서 식량을 만드는 때입니다. 그런데 탱크가 내가 농사짓는 그 보리밭을 막 짓밟고 지나갑니다. 

채소, 무를 가꾸어서 막 피어나는데 탱크들이 막 지나갑니다. 농부가 “여보시오! 내가 농사지은 밭을 왜 이렇게 지나가는 거요?” 외칩니다. 그러나 절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꼼짝 없이 당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국가 비상시에 개인의 권리는 무시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사람이 필요하면 길거리에서 아무나 불러 “너 이리와! 이거 가지고 빨리 가!”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징발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귀에 익은 소리가 있습니다. 강제징용입니다. 나가기 싫은데 강제로 잡혀 갔다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은 일본과의 문제가 바로 위안부입니다. 

전쟁시 일어난 강제적 징발 수단 “너 이리 와! 여기 와서 이런 거 해!” 구레네 시몬은 구경꾼 입장에 있다가 강제 징용 당했습니다. 로마 군인이 시킨 것입니다. 갈보리까지 가야하는데 이 예수라는 죄수가 자꾸만 쓰러지니까 찾아보다가 “너 이리와! 이것 좀 대신 지고 가.” 그래서 자원 봉사가 아니고 억지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들은 이 간단한 이야기를 모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인데 마가복음은 “억지로”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억지로 진 십자가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많은 사람의 간증이나 우리 기독교 역사에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많이 일어나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지만 나중에는 그 억지가 하나님의 놀라운 뜻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이 구레네 시몬은 자기의 본래 의사는 아니지만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절하고 도망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억지로 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직업을 볼 때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직업은 노래 부르는 사람 같습니다. 어느 나라나 다 똑같습니다. 마이클 잭슨,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타났다 하면 온 세상이 난리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원고 쓸 필요도 없고 장비도 필요 없고 몸만 가면 됩니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수만 명의 관중이 준비되어 있고 모든 무대가 자기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고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고 좋아하는 노래 한 곡만 부르면 돈도 많이 생기고 명예도 생기고 말도 못합니다. 비틀즈, 케이팝을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가수 한 분은 노래 한곡을 가지고 40년을 사십니다. 

‘이야! 저 직업 괜찮다. 골치 아플 거 하나도 없고, 자기 좋아하는 거 하고,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고, 명예 얻고….’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옛날 시골에는 시골 교회들이 동네 건달패들이 시골 교회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건달패들이 다 교회를 거쳐 갔습니다. 왜냐하면 시골 마을에 처녀들이 모이는 곳이 그래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 두 가지가 항상 생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시골에서 부흥회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안와도 건달패들은 모두 옵니다. 무슨 행사이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고등학교 2, 3학년이 되면 다 이상하게 깡패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등학생들은 폭력이 문제가 됩니다. 이때는 모자도 찢어서 삐딱하게 쓰고 교복도 풀어헤치고 행동도 반항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시골에 부흥회를 한다고 하니까 건달패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옛날 부흥사들은 지금과 스타일이 다릅니다. 무엇을 시키기 잘했습니다. “어이! 거기 파란 잠바 입은 사람 일어나! 요한복음 3장 16절 외워봐” 이런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헌금도 “천만 원 낼 사람 일어나! 없어?” 막 야단치고 눈감고 손들라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다 눈 감아!” 그러시더니 “이 교회에서 목사 될 사람 손들어!” 하시는 겁니다. 시골 교회에서 누가 목사가 됩니까? 아무도 안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강사가 자존심 상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목사 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빨리 손들어!” 그래도 한명도 손들지 않습니다. 목사 체면은 말이 아니고 분위기는 썰렁해졌습니다. 목사가 계속 소리를 치니까 고등학생 건달패들이 “너 들어, 임마!” 그런데 나중에는 한 사람도 손을 안 드니까 그 부흥목사가 불쌍해 졌습니다. “너 들어, 빨리!” “네가 들어!” 할 수 없이 그 건달패 중에 한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와! 너 누구야? 일어나!” 교복을 입고 일어났습니다. “이야! 그래도 이 교회에서 목사 한명 나왔네. 너 아주 훌륭한 목사 될지어다.” 축복기도해주고 “앉아!” 말씀하셨습니다. 깡패인데 목사가 되긴 뭐가 됩니까? 그런데 이 친구는 노래를 잘했습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했다 하면 고등학생들이 모두 반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나갔습니다. 10대 가수 남진, 나훈아와 함께 나갔습니다. “와!” 20대에 대한민국의 10대 가수가 되었으니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렇게 손 든 이후에 학교에서 친구들 간에 별명이 목사가 되었을 거 아닙니까?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손들어 축복기도 좀 해주십시오.” 낄낄대고 놀려댔습니다. “내가 그 부흥목사 불쌍해서 손들었지 내가 무슨 목사냐?” “와! 목사님 되실 분!” 이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 미국에서 저와 이웃에서 지금 30년째 목회합니다.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잘하니까 기타 들고 나섰다 하면 젊은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우리교회 와서 설교하라고 했더니 지금 내가 말한 게 그때 간증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손 든 사랍니다. 그런데 그 억지로 든 손에도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내가 이렇게 목사를 합니다.” 그런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서 오늘 이 성경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이때를 우리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때 잠시나마 신체적 고통이 멈추었습니다. 그가 대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시몬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생각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아이큐가 장애인 수준이 아니라면 “아! 시몬아! 고맙다. 너는 아무 죄도 없다. 네 두 아들이 사는 이 예루살렘에 유월절 휴가를 받아서 즐기려고 여기 왔다가 공연히 나 때문에 로마 군인의 징발법에 의해서 선택되어서 이 피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금 지고 가니 미안하다.” 

그랬을 거 아닙니까? 우리들도 마땅히 내가 받고 당해야 되는 고통을 나를 대신해서 어떤 사람이 받았다면 미안하고 무엇인가 보상해주고 싶은 감정이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어떠십니까? 그 잠시의 사건이 흘러갔습니다.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그의 가정은 영적인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서 자기가 만나러 왔던 알렉산더와 루포, 예루살렘의 두 아들은 초대교회 아주 유명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내는 로마서 16장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을 어머니같이 돌봐주고 협조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택함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갈보리를 향하는 250만 인파 중에 가장 큰 축복받은 자는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여러분! 일평생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이 십자가라는 사명을 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든든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놓치지 말아야지!’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네 가진 것을 굳게 하라. 빼앗기지 말라.”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가룟 유다는 12사도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굳게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떤 자리입니까? 하늘나라의 열두 보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십자가는 지금은 괴롭고 손해나고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것 좀 하시지요.”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나는 아직 시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십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시간이 되시는 겁니까? “♪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 여러분 가운데도 억지로 시작한 신앙생활 많이 계십니다. 어떤 이는 학교에 입학을 하고 보니까 미션스쿨입니다. 진짜 싫은데 학점에 관계되니까 억지로 나가서 예배드렸다가 오늘에 이른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는 결혼을 하고 보니까 배우자가 기독교 신자입니다. 

억지로 끌려 나와서 오늘에 이른 사람도 있고 나는 태어나고 보니까 예수 믿는 집안입니다. 이런 경우도 많습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갔다가 교도소 예배에 강제로 끌려나왔다가 믿음이 생겨서 교도소 출신 목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처음에는 억지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거기에 영적 축복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혜롭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십자가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찾습니다. ‘내가 할 것이 뭐지? 어떤 희생이라도 내가 지불할 수 있어!’ 하는 것입니다. 

취직을 했는데 사장이 예수쟁이인 것입니다. 직장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밥 먹고 살려니 할 수 없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런 경우 많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여행 왔다가 세상 말로는 아주 재수 없게 걸렸는데 그 자체가 이렇게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은 그것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사건을 그래서 기록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무거울수록 좋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리라.” 그게 어떻게 되는지 해보십시오. 

제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현지인 목회자 수련회를 와달라고 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저를 오라고 초청한 선교사 목사는 대학 교수입니다. 처음에 그곳에 가실 때 한국 사람은 그 도시에 자기와 자기 부인 두 사람이었습니다. 주일이 되니까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대학 교수이지만 아내와 둘이라도 예배를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주일 예배를 둘이 드리니까 주변의 사람들이 “교수님, 뭐하십니까?” “우리 주일날 예배드립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나중에는 100명, 200명이 교수님 댁에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교수 일보다도 이 주일설교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성경을 많이 보고 설교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200명씩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교단에서 나와서 “당신 목사 되십시오.”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대학 교수로 왔습니다.” “그거보다 이게 더 중요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몇 백 명이 와서 “우리 당신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대체 이게 뭐야?’ 자기는 싫은데 교단에서 계속 요청하니까 억지로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은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목회를 하는데 제가 갔을 때만 해도 수백 명의 현지인 목회자들이 참석을 하고 수련회를 해달라고 해서 해주었습니다. 

그 카라카스에 한인으로 제일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입니다. 그러나 사양하지 않고 순종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주어지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이 조명하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거 무거운 십자가를 든든히 지고 가야지 약삭빠르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지금 제자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없고 한명도 없습니다. 사실 이 십자가는 열두 제자가 번갈아 지고 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간 것입니까? 구레네 시몬만이 강제 징발 당해서 예수님을 도와드렸는데 그것이 그렇게 큰 영적 축복이 되어서 사도바울 선생이 구레네 시몬의 아내 때문에 세계 선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어머니 역할을 하는 영적 축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약삭빠른 교인이 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지는 제자가 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무거울수록 ‘내가 무엇을 좀 더 희생해서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쓰일 것인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사순절에 이런 것은 각오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십자가를 지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가 축복을 받아서 그 집안이 그렇게 큰 쓰임을 받았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십자가는 안 지려고 하는 그런 약삭빠른 교인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가 되는 영적 축복을 모두에게 내려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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