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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따르는 자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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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따르는 자 (마 16:21-28)


주후 4세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교권과 아리우스의 이단설에 맞서 싸웠습니다.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를 지키려던 아타나시우스는 20년 동안 6번이나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타락한 교권과 로마의 황제는 자객을 보내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를 지켜보았던 그레고리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겸손하고 낮은 데 마음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덕행은 비길 데 없을 정도로 숭고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쉽게 그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온유했고, 친절했고, 열정적이었고, 그리고 상냥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삶은 천사의 삶이었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항상 부드러웠습니다. 

결코 난폭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항상 설교의 현장이었습니다. 누구든 그를 닮고 싶어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유한 자들의 부정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겸허한 자들에게 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야말로 주를 따르는 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의 사역 중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고난이나 죽음 같은 것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며 근본적인 잘못을 지적하시며 베드로를 사탄으로 여기셨습니다. 어찌 하나님께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대로 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어 제자들이 살아야 할 제자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의 ‘따를 것이니라’ 의 원어 ‘아코루데이토’ 는 현재 명령형으로 한 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부단한 노력을 통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주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주의 뜻을 알고, 끝까지 동행하였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순절기에 주를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진지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이익을 바라고 주를 따르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태도로 주를 따르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를 따르는 자가 되려면, 
 
첫째로 십자가 지고 가야 

예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주시며 당신은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 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둘째 제자는 무척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진 지 하루 만에 첫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예수께 넘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등을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둘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그는 십자가를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다니요! 이제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마음이 상하신 예수께서 그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아니 그렇다면 왜 앞사람은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저는 쩔쩔 매었습니까?” 예수께서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라.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가 늘어났던 것이다.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주어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면 은혜를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을 때 은혜를 받아 예수 믿게 되었고 자손들이 유능한 전도자가 되어 바울과 함께 선교를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장식으로 걸고 다니는 십자가가 아니라 스스로 지고 가는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할 희생과 충성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버리거나 끌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Thmas A Kempis)는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훗날 그 십자가가 우리를 끌고 갈 것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져야 다른 이의 목숨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주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기를 부인해야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의 수도원에 두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수도사가 될 수 있도록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그 때 프란시스가 말했습니다. “배추 모종을 심고 있는데 너희들이 한번 심어 보아라. 뿌리를 땅에 심지 말고 잎이 땅속에 묻히도록 거꾸로 심으라” 한 청년은 프란시스가 시키는 대로 거꾸로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청년은 “왜 거꾸로 심어야 되나? 농사도 안 지어 보았나?” 하며 배추를 바로 심었습니다. 그러나 배추를 거꾸로 심었던 사람은 수도사가 될 수 있었고 자기 생각대로 바로 심었던 사람은 수도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합리적이냐 논리적이냐 농사법에 맞느냐 아니냐를 시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할 수 있느냐를 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 생각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혹 내 생각 내 뜻 내 방식이 아니면 방해하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때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여기의 ‘부인하고’ 의 원어는‘아파르네오마이’ 로서 ‘제 것이 아니라고 말하다’ 라는 뜻입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 명예, 재물, 재능, 건강, 자녀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삶의 순간순간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자기를 주인의 자리에서 내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같이 낮아지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십시오. 그들은 제자가 되면서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소중한 생명은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 영광 버리고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주를 따르는 자가 되는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그 때를 기억해야

어느 부자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집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천사에게 자기가 거할 집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천국 안에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저택들이 즐비했습니다. 좋은 집을 지날 때마다 자기를 위한 집이 아닌가하고 천사에게 연신 물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고개를 계속해서 가로저었습니다. 화려한 저택들이 지나가고 집의 질이 점점 떨어지자 부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당신이 착각해서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천사는 “아니오” 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마침내 허름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당신이 머무를 집입니다.” 부자는 놀라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지나온 그토록 화려한 저택이 아니고 왜 이런 초라한 집이 제 것이 되어야 합니까?” “지금까지 당신이 세상에서 천국에 투자한 것으로는 겨우 이 집밖에 지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의 “갚으리라”는 말은 원어로 ‘아포도세이’ 라고 하는데 ‘보상해준다’ 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온 사람에게는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잃고 헌신하는 사명을 감당하면 반드시 목숨을 찾으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즉 주를 따라가는 자에게는 상급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라 가는 길은 결코 후회함이 없으며 가치 있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주를 따른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프랑스 남부 도시 미알레(Mialet)에 옛 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돌로 된 건물이 있습니다. 16세기에 지속된 위그노 즉 프랑스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광야 박물관(Musée du Désert)입니다. 박해를 피해 개신교도들이 예배드리던 현장과 유물을 보전하기 위해서 만든 곳입니다. 당시에 교인들은 잡히기만 하면 뼈가 부스러지고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여자들은 탈출이 불가능한 망대 감옥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갔으며, 남자들은 노예선으로 끌려가 쇠고랑을 찬 채 노를 젓다가 죽었습니다. 

박물관에 노예선에서 발견된 나무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손과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노를 젓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데, 그 밑에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손목의 쇠고랑을 당신과의 혼인반지로 삼게 하시고, 제 발목의 쇠고랑을 당신과 사랑의 사슬로 여기게 하소서.”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놓으며 주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 증거였습니다. 모름지기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십시오. 부활하신 주께서 삶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부디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어 자기를 부인하며 주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급을 주시는 그 때를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주를 따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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