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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어둠의 대결 (3)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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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대결 (3) (요 3:16-21)
 

이 세상에는 두 문화가 흐르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문화, 성과 속의 문화, 의와 불의의 문화 등이 바로 그 예입니다. 그런데 이 두 문화는 서로 공존하며 대립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중에서 가장 극렬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의 충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빛이다”(요 8:1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원래 빛에는 여러 종류의 빛이 존재합니다. 먼저 1차원적인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사람이 최초로 발견한 빛으로 부싯돌로 일으킨 불에서 온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이 불로 살아갔습니다. 이 불은 태우고 데우는 기능만 할 뿐입니다. 2차원적인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기불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세상에 퍼져있는 원자와 전자를 발견함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음양이 합쳐졌을 때 빛이 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기입니다. 이것을 2차원적인 빛이라고 합니다. 이 전기로 데우고 태우고 빛을 내고 움직이는 동력을 발생시켜서 근대산업을 일으켰습니다. 마지막으로 3차원적인 빛이 있는데 그 빛이 원자력입니다. 사람들은 소량의 원자를 발견하여 이것으로 대량의 화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도 있습니다. 그 한 물질을 쪼개면 분자가 되고 더 쪼개면 원자가 더 쪼개면 소립자가 됩니다. 그때 더 쪼갤 수 없는 소립자를 에너지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이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에너지를 보이는 물질로 변화시키는데 이것이 원자력입니다. 이 에너지가 움직이면 엄청난 힘이 만들어집니다. 이 힘을 선용하면 문명의 이기가 되지만 악용하면 재앙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종류의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같은 빛과는 또 다른 차원의 빛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의 빛입니다. 이 빛은 사람이 발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빛에는 신비적인 힘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 생명을 살리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이 빛으로 모든 식물들이 싹을 내고 자라게 됩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이 이 빛이 갖는 힘입니다. 또 이 빛에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도 들어 있습니다.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따라 바닷물이 몰려가기도 하고 몰려오기도 합니다. 몰려올 때를 만조라고 하고 물러갈 때를 조금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태양과 달의 빛이 내는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이 빛은 땅 속도 움직입니다. 우리들이 볼 수는 없지만 태양빛은 땅속을 움직여 질서를 만듭니다. 땅속에는 물과 기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물과 기름은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물이 고여 있고 또 한쪽에는 기름만 고여 있습니다. 이것이 태양의 빛이 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의 빛입니다. 이 빛을 도덕의 빛이라고도 합니다. 이 빛도 태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발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빛은 지금까지의 빛과는 구별되는 빛입니다. 이 세상은 이 빛이 밝게 빛날 때 밝아지고 건강해지며 힘이 있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 양심의 빛이 약해지면 온 세상이 힘을 잃고 어두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지고 모든 것이 값을 잃게 됩니다. 

양심자는 손해를 입게 되고 불의자가 득세하게 됩니다. 원래 깜깜한 밤중에는 화려한 옷도 값이 없어지고 아름다운 색상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밤 나들이를 할 때는 아무 옷이나 입고 화장도 하지 않습니다. 색상이 빛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있거나 밤이 되어 어둡게 되면 아무렇게 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혼자 있을 때, 좀 어두울 때 보아야 합니다. 어느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분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입니다. 분명 그 집인데 다른 여자분 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실례했습니다.”하고 뒤돌아 나오려는데 “목사님 왜 가세요?”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집에 혼자 있으니까 아무 옷이나 입고 화장도 안 해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집에 혼자 있을 때에든지 어두운 밤에는 무방비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양심의 빛이 약해지면 이렇게 됩니다. 진리보다 비진리가 빛나는 세상이 되고 정의보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양심자가 손해를 보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 양심의 빛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양심의 빛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이 양심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양심자가 힘을 얻고 선한 사람과 약한 자가 보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이 빛을 싫어했습니다. 이 빛이 비취면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의 빛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이 빛이라고 말합니다. 이 빛이야말로 빛 중의 빛입니다. 또한 그 어느 빛보다도 중요한 빛입니다. 이 빛은 능력의 빛이고 신비스러운 빛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며 죽을 것을 죽지 않게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는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장 19절에서는 “이 빛이 세상에 왔으되”라며 주님 자신을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도 그냥 빛이 아니고 생명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빛은 헬라어로 “포스(pow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원래 이 말은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빛의 반대가 어두움인데 이 어두움은 헬라어로 “스코토스(skotos)”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완전한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영적 죽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9절에는 사람들이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죽음 상태, 어두움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 예수님을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빛에는 세 가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드러나게 하는 힘입니다. 이 빛은 감추어있는 비밀과 죄, 부정과 감춤을 모두 드러나게 합니다. 밝은 빛 아래에서는 미세한 먼지나 작은 주름까지도 자세히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불안해합니다.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숨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3장 20절 말씀에는 “사람들이 이 빛을 미워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라며 그 속성을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이 속성이 현대사회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래서 GNP 2만 불 시대가 되면 익명의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자기의 신상을 가능하면 숨기려는 의식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 속에 들어가 묻히기를 선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과 가능하면 담을 높이 쌓고 교류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과거를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불안하게 생각하여 멀리 합니다. 대다수는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큰 무리 속에 묻혀 자신을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빛으로 하여금 다 보이게 하십니다. 감추었던 것을 드러나게 하시고 묻어두었던 것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하셔서 자기의 추하고 무능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회개하고 뉘우치며 바로 잡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수를 핍박하였고 마침내는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약점을 말하고 지적한다면 그 누구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약점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자연스럽게 피할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는 “이 세상의 악행자는 빛을 미워하나니 이는 자기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는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에 충돌하고 대립하고 핍박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빛으로 영적인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때때로 충돌도 하고 핍박도 받게 됩니다. 내가 이 빛을 받아서 그 빛이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매사 평안하리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맹인이 눈을 뜨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평생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뜨게 됐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눈을 떴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맹인으로 있을 때는 조용했고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눈을 뜨고 나니까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어떻게 눈을 떴느냐, 누가, 어떻게, 왜 안식일 날에, 네 부모는 누구냐는 등 고발한다며 시끄럽고 귀찮게 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이 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 당한 것입니다. 

둘째로 이 빛에는 깨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빛이 비취면 감추어졌던 비밀이, 깨닫지 못했던 진리가, 생각지 못했던 신비함이 깨달아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천국과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빛이 비출 때 그것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밀은 영어로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씨크릿(Secret)과 미스터리(mystery)라는 단어입니다. 둘 다 비밀을 말하지만 씨크릿은 보여주지 않아서 모르는 비밀을 말하고 미스터리는 보여주었는데도 모르는 비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다 보여주셨고 알려주셨고 말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천국은 미스터리입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대단은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어떤 이가 결혼대상자를 만났습니다. 조건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 상대자가 불신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이 “결혼해서 구원시켜야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고 신앙의 문화 속에서 자랐으며 집에는 종교서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고백하기를 도무지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도 얼마나 고민이 크겠습니까? 그래서 이 믿음의 세계는 미스터리인 것입니다. 19세기 중국에서 천주교인들이 영세를 받고 우리나라로 귀국했습니다. 귀국하고 보니까 그들의 눈에 우리나라는 온통 우상숭배 천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조상제사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우상숭배와 조상숭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천주교인이 1만 여명이나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조상숭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모두 높은 뜻을 품게 되어 사명을 발견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나 공산주의가 한결같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살아도 죽어도 주의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모두 이 빛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빛을 받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자들이기에 모두 높은 뜻을 품고 사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빛에는 생명력을 공급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빛은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회복하고 치유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18절에는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햇볕이 뜨겁게 내려쬐면 뿌리 깊은 초목은 왕성하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뿌리가 약한 초목은 금세 말라 죽게 됩니다. 이것이 햇빛이 가진 두 가지의 기능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회복과 심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빛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빛 그 자체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빛이 내 안에 내주하시게 되면 나는 충만한 생명력을 공급받아 확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후 나는 고백이 분명하게 되고 증거의 삶을 살게 되며 사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햇빛 아래의 뿌리 깊은 초목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이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없으면 삶이 어둡게 됩니다. 

어떤 대학생이 세상을 어둡게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보는 것 모두가 그에게 는 좋게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매일 분노가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마음과 생각이 어둡고 차갑게 바뀌고 그렇게 되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강조하며 말씀합니다. 이는 기쁠 때 기뻐하고 감사할 때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고 비록 오늘의 현실이 어둡고 미래가 암담할지라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기뻐하고 감사해야 그 마음이 따뜻해지고 밝아집니다. 

그래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과 생각이 어두워지게 되고 마음이 차갑게 되어 병이 발생하게 됩니다. 암 같은 병들이 그래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마침내 병이 들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니 위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수술을 하고 오랜 동안 어두운 병실에서 누워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퇴원을 하게 되어 병원 밖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그 날 병원 문을 나설 때 햇빛이 강하게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유난히도 찬란한 햇빛 가운데 이 젊은이는 밝은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왜 이제까지 이 찬란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가!” 마음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어둡고 차갑고 쓸쓸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생명력을 주시고 회복을 주시고 치유와 확신을 주셔서 감사함의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빛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소망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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