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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의 주연과 조연 (마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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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의 주연과 조연 (마 21:1-9)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入城)에 관한 기사로, 고난주간의 첫날에 관한 기록에 해당합니다. 본문은 막 11장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사도 마태의 주 관심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보도를 통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10절)를 밝히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되고 있는 바, 왕 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을 종려주일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고난 받으신 일을 뒤돌아보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마음에 새기며, 부활의 소망을 다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수님의 33년간의 생애 가운데 한 주간에 불과한 이 기간의 일을 마태복음 전체 28장 가운데 무려 8장을 할애하여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수난과 부활의 사건이 중요한 사건임을 시사합니다. 
 
본 단락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을 행하시면서 제자들과 같은 일부의 특정한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신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감추셨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수난을 통해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기 이전에 천국 구원에 대한 신약 복음을 방해받지 않고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떠난 후 당신의 교회를 설립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십자가 수난의 때가 임박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왕으로 입성하심으로 마침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전에도 유월절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그냥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시고 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상시에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먼 길을 전도 여행 하실 때도 그렇고 전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실 때도 나귀를 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짧은 거리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종려주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입성하던 나귀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1.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종려주일의 주인공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연도에서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당당하게 도성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사복음서에서 주님의 승리의 입성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1) 예언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 

4-5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구약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일에 특별한 열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어서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을 때 예수님은 주저 없이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천지 창조의 주역이신 제2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요 1:3) 만물의 주인 되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행위였음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5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본절은 사 62:11과 슥 9:9을 복합적으로 인용한 것으로서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이는 마태복음이 구약 예언에 관심이 많은 유대인을 독자로 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나귀 새끼만을 언급한데 비해(막 11:2, 눅 19:30) 마태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같이 언급합니다. 유대인을 일차 독자로 기록한 마태는 이처럼 구약 예언의 정확한 성취라는 측면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모두 언급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열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된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타는 열심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2) 평화의 왕의 모습

5절= “···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되 전쟁에 사용되던 말 대신에 주로 농사와 짐 수송에 사용되던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평화의 사신들이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거리는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엄한 경계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적진을 향해 가는 예수께서 호위병을 앞세우거나 따르는 군중들을 동원하거나 말을 타고 무장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겨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야로서 평강의 왕이신 동시에 겸손한 왕이신 것을 나타내 줍니다. 

나아가 이처럼 예수께서 말 대신에 나귀를 타신 것은 당시 무리와 제자들에 의해 오해되고 있는 메시야직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당시 사람들이 고대하였던 압제받고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전쟁을 통하여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쳐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시키기 위해 오신 평화의 메시야임을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실로 예수님은 왕으로서 구약에 오리라고 예언된 그 메시야이신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은 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도리어 이 땅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은 바로 무거운 멍에를 메고 가는 짐승이 걸어가야 할 길과 같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가듯이, 속죄양 되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무거운 짐을 다 지시고 골고다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로써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줄 평화의 왕이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어리고 힘없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귀입니까? 그 이유는 ‘겸손하기 때문’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초라하기만 했던 왕의 행차의 모습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자기를 낮추셨는지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라 할 만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단지 자기를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위대한 겸손에 이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3) 승리자의 입성

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왕의 행차 치고는 소수의 군중들이 따랐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소리 지르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진이었습니다. 

화려한 개선장군의 행렬이 아닙니다. 웅장한 왕들의 행진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승리의 개선가의 행렬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치 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승리자의 입성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처음부터 승리자이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주님은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무섭게 몰아치는 광풍과 파도를 말씀 한마디로 잔잔케 굴복시키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고칠 수 없는 불치병들을 거뜬히 치유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임의로 하실 권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그 새끼와 함께 풀어서 끌고 오려 할 때에 그 주인이나 다른 사람이 뭐라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 마 28:18에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잘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주님께서 자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고 하나님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은 폭력이 아니라 무저항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예언대로 나귀를 타심으로 왕의 입성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은 패자의 입성이 아니라 승자의 입성이었습니다. 진리의 승리요 공의의 승리였습니다. 할렐루야!  


2. 예수님을 태우고 입성하는 나귀 새끼

종려주일의 주연(主演)이신 평화의 왕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자로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태우고 간 나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종려주일의 조연(助演)인 나귀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나귀는 성도들을 상징하고,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일꾼들, 더 나아가 주의 종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나귀와 같은 일꾼들을 타고 다니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태우고 천국을 향하여 가는 나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나귀와 같은 사람은 어떤 일꾼입니까? 

1) 겸손한 일꾼 

나귀는 겸손합니다. 주님은 겸손한 일꾼들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너무나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입성에는 힘도 약하고 빨리 달리지는 못하지만 겸손한 나귀가 사용되었습니다. 주인이 다칠까봐 조심하며 걸어가는 나귀와 같은 일꾼들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나귀는 주인을 치받지 않습니다. 나귀는 자기 성질대로 움직이는 고집도 없습니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주인의 눈치를 살펴서 일을 하는 짐승입니다.  

소는 힘이 세지만 고집이 있고 성질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집이 세면 코를 뚫어 끌고 다니겠습니까? 우리는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일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원하여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2) 순결한 일꾼  

예수님은 어린 나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힘 있는 어미 나귀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힘 없는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까?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험한 언덕 길이요 돌 투성이의 길이었습니다. 어린 나귀가 장정을 태우고 가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린 나귀는 순수하고 순결한 일꾼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경험이 없고 힘은 없지만 죽을 힘을 다하여 충성하는 순수한 성도들, 깨끗한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 나귀는 멍에를 한 번도 메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어미 나귀도 힘이 들고 등이 터지기도 하는데,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어린 나귀가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웠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에 더럽혀지지 않고 신앙 인격에 금이 가지 않은 진실한 종들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잘하는 것보다 순수한 것을 원하시고, 많은 것보다 오히려 순결한 것을 원하십니다. 


3) 주인이 직접 선택한 일꾼 

본문의 나귀는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신 나귀입니다. 나귀가 자원하여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매여 있었습니다. 매여 있었다는 것은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필요할 때 쓰임받을 수 있도록 항상 대기하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일꾼은 주님으로부터 선택되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원하여 일꾼이 된 것도 아니고, 목사가 추천하여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선택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나귀의 행복은 예수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 나귀는 다른 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타신 나귀가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 누구를 위해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로 인정받는 무디 선생은 가진 것도 없고 대학공부도, 신학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의 설교는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세상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한 사람과 함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진 적은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국과 유럽을 뒤흔들고 교회로 하여금 위대한 복음적인 사역을 감당하도록 무디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서울 충신 교회에 회갑을 맞은 어느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지금까지 뭘 했나, 남은 여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등 심각한 자기 성찰을 하다가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죽은 다음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시내 모 의과대학에 연락을 했더니 그 대학에선 쌍수로 환영을 했습니다. 어느 날 대학 당국과 권사님 사이에 사후 시신을 실험 연구용으로 기증하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했습니다.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권사님의 따님과 목사님이 서명을 했습니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로 한 다음부터 권사님은 자신의 몸이 소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하게 보존해야지, 건강하게 관리해야지, 손가락 발가락 하나라도 망가뜨리면 안 되지, 깨끗하고 소중하게 갈무리하다가 넘겨줘야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몸이 그토록 소중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인생 마무리입니까?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술, 아편, 담배로 썩고 병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한 생명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마귀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도라면 내 육체도, 내 물질도, 내 건강도, 나의 재능도 낭비하거나 허비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드려야 하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가 쓰시겠다” 라는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시간, 물질, 재능, 건강,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설명할 때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못을 박았습니다(갈 1:1).  

주님의 일꾼된 자들은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요동치 않는 확신이 있을 때에 그 사명을 올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선택 의식이 없는 일꾼은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를 받았습니다. 길에는 나뭇가지를 깔아주었고 등에는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나귀가 받은 영광은 예수님 때문에 받은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는 일꾼에게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우리에게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무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나귀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태우지 않고 나귀 혼자 으스대며 걸어갔다면 누가 알아주었겠습니까!

주기철 목사님이 마산 문창교회 시무할 때 강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재산도 없습니다. 나는 재간도 없습니다. 나는 배운 지식도 많지 못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을 가졌다면 피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위하여 이 피를 바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태우고 가기만 하면 신령한 영광이 따라옵니다. 십자가를 지는 성도에게는 영광과 상급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예수님이 타고 가셨던 그 어린 나귀처럼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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