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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의 입성 (눅 19: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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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입성 (눅 19:28-48)

아내 제이와의 사이에 딜런, 로건, 클로이 등 3명의 자녀를 이 가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카네기 멜론 대학 컴퓨터공학 교수로 탄탄대로를 걷던 랜디 포시입니다. 랜디는 2006년 8월 췌장암 진단을 받고 몇 차례 항암치료와 수술을 받았지만, 이듬해 결국 암세포가 간과 비장 등에까지 퍼져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2007년 9월 18일 피츠버그 캠퍼스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강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남은 삶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보낼 시간도 모자라지만, 랜디는 반대하는 아내의 허락을 얻어 강의준비를 시작하게 되었고, 간으로 전이된 암을 ‘방안의 코끼리’라고 표현하며 유쾌하게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랜디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 되고 싶었던 것을 모두 이루지는 못했지만, 후회 없는 도전을 끊임없이 했던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앞에 벽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랜디가 남긴 어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세 단어는 ‘to be honest(정직하라)’이라면서 여기에 세 단어를 추가한다면 ‘all the time(언제나)’이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꿈을 크게 꾸어라', '성실함이 겉멋보다 낫다', '불평하지 말고 그저 노력해라', '모두에게서 장점을 찾아라', '말이 아닌 행동을 보여라', '빛나는 실패를 경험해라', '진심으로 감사 편지를 써라', ‘은혜에 보답하라,’‘공동체 주의자가 되어라’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강의의 마지막에 랜디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내의 생일을 400명 관중의 합창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무대 위로 올라온 아내 제이가 남편을 껴안으며 “제발 죽지 말아요” 라고 속삭이며 랜디와 아내, 관중 모두의 눈물로 강의를 마쳤습니다. 랜디는 2008년 버지니아주 체사피크의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숨졌습니다.

만일 자기에게 남은 날이 닷새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서둘러 자기 재산을 정리하겠습니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었던 곳을 가보고 먹고 싶었던 것을 실컷 먹겠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가야 하다니’ 하며 탄식하겠습니까? Spinoza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자기의 삶에 충실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닷새 후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두려움이나 염려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에 약속된 예언들을 하나하나 이루어가십니다. 생의 마지막 주간에도 여전히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신 사명에 충실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거의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구속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그분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하이라이트의 시작을 알립니다. 본문은 그때 있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입성(28-40절)

“앞서서 가시더라”(28절)

생애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그리고 무리들의 환호 속에 가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는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전에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비밀로 하기 원하셨고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실 때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미리 아시고 피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에 그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대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종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습니다. 예수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 보내신 아주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잡히시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도 이곳에 있고 마지막으로 승천하신 곳도 바로 이 감람산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동쪽으로 2.7km 떨어진 감람산의 동남 기슭에 있던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감람산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서 출발하여 벳바게로 갔습니다.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마을인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여기서 나귀를 구하여 타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31절) 

예수께서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셔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나귀가 있으며 그 나귀는 아무도 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누가 나귀를 푸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볼 때 “주께서 쓰시겠다”는 답변까지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귀 위에 그들의 옷을 펴서 안장으로 삼고 예수님을 태우고 또한 자신들의 옷을 길 가에 펴 예수님이 지나가시도록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스가랴 9:9절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시 용사나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처럼 군마를 타고 칼을 높이 들고 입성하지 않고 나귀를 타심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왕은 왕이지만 무력으로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잘못된 생각으로 주님을 따랐기에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다 도망갔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환호한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열정과 환호는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2:28을 보면 처음에는 제자들이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내리막길에 이르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예수님의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능하신 일’이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일들, 즉 권위 있는 복음의 선포, 병자를 고치심, 귀신을 쫓아내심 축출, 죄인들을 영접하는 것 등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 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라고 외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시편 118:26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주요 절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환영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들의 땅에 임하기를 기원하며 불렀던 이 시편이 지금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불립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서와 달리 누가는 “호산나”라는 칭호를 생략하고 대신 ‘평화’의 메시지를 뚜렷하게 부각시킵니다. 무리는 하늘의 평화를 땅에 가져다줄 왕을 향한 자신들의 갈망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왕이 군림이 아닌 죽음을, 영광이 아닌 수치의 십자가를, 선동이 아닌 섬김을 통하여 평화를 이룰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절)

다들 기뻐하는데 한 쪽에서는 씩씩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구나 시 118편이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불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받아야할 관심이 예수에게로 쏠리는 것을 시기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령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도구가 되어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는 바리새인들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과 시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입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주님을 높이는 소리를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고소에 대하여 주님은 강한 어조로 대답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제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영적인 출애굽이 전개될 것입니다. 그것은 돌들이라도 일어나서 찬양해야 할 일입니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고 주님을 높이지도 않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지도 않을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방법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또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눈물(41-44절)

무리들의 환호 속에 감람산을 내려오시다가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자 예수님은 우십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우신 적이 세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셨을 때요(요 11:35). 두 번째는 지금 본문이요,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 히브리서 5:7절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반면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구절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평소에 많이 웃으셨을까요 우셨을까요? 예수님은 거의 우신 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 기자들이 기록했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 7:34)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밝고 온화한 모습으로 소외되거나 연약한 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위로하시거나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면서 왜 우셨을까요? 자기가 당할 고통을 생각하여 두렵거나 슬퍼서 우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영안이 어두워 화평케 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00년전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애통해 한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렘 15:5-6).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거부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님도 예레미야처럼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언한 이 종말의 날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문자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3일 만에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을 때,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백만 명이 훨씬 넘는 유대인들이 성안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었고, 성전을 포함한 모든 건물은 다 불태워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성전 기둥과 내부를 금으로 장식해 놓았는데 불에 태우니 금이 녹아서 틈새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약탈하는 로마 군인들이 그 금을 찾으려고 불타버린 조각들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성전 정화(45-48절)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제일 먼저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눅 2:49)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에 대해 품고 있는 열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성전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타락 속에서 그 본연의 거룩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돈벌이 장소로 전락된 것을 보시면서 거룩한 분노를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 이후로 날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성전 안에서 참된 권세와 리더십을 놓고 예수님과 산헤드린 공회원들 간의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일어납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성전세를 내는 백성들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소위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판정을 받으며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쓴 책의 전편이요 사도행전은 후편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으로 퍼져가는 가를 기술합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출발점 역할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순례의 목적지가 아니라 새로운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될 것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섬기려면 그분이 누구신지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신 performance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오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말이나 병거를 타고 개선 행진을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겸손인데 이제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심으로 더욱 겸손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구세주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구원해 주시옵소서 (save us)”라는 뜻을 가집니다. 물론 예수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제압하고 유대를 해방시키려 오시지 않았습니다. 무리의 기대와 달리 고난의 메시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당신에 대하여 예언된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며 순종과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2)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왜 무리가 주님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환호하였습니까? 주님께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주님을 따르던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생애의 목표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주님을 위한 열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만족과 목적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정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열정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태도와 생각이 어떠한 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병도 낫고 돈도 잘 벌고 복을 받아 만사가 잘되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생까지 누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대속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의 고통의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감격하면서 하나님이 긍휼하심을 입은 것을 감사하며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정죄가 아닌 용서의 심정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다시 오실 그분을 사모하며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기도의 집으로 날마다 세워나가야 합니다. 


3) 우리의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를 돕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나귀새끼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나귀 새끼의 임자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하여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땀에 찌든 겉옷이었지만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겉옷을 벗어 나귀새끼 위에 얹어 안장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아가는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아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이 들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움을 인하여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이란 엄청난 사건의 배후에 이런 부족한 자들의 보이지 않는 작은 헌신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오래 믿었거나 성경지식이 많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이 모아져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신의 계획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을 사용하실 수 있는 왕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을 쓰실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주신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헌신의 동기는 ‘주께서 쓰시겠다’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달란트와 물질을 기꺼이 드리면서 주님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채워야 합니다. 순종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상급을 베푸십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주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우리의 사명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온전한 사랑을 인하여 우리는 자신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깨달았던 시인은 시편 118:17절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생명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세상에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부족과 연역함, 무지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여 주시고 성령을 인 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우리가 ‘돌들’ 취급하던 이들이 그 찬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한 심령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하는 우리 형제자매를 위하여 주님과 같이 울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제대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님과 같이 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 아침에 우리 각자를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기뻐하심. 안타까우심, 칭찬하심. 섭섭하심? 주님의 사역을 돕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사역을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까? 이 아침에 나의 입술을 통하여 어떤 소리가 주님께 올라갑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 건져주신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하는 감사의 소리? 아니면 나의 생각한 대로 도와주지 않는 답답한 주님에 대한 원망의 소리? 아니면 나의 욕구를 빨리빨리 채워달라는 요구의 함성입니까? 말과 행동으로 열심을 다해 섬기고 감사와 찬양을 드림으로써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주 안에서 더욱 풍성해집니다. 

내일부터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길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의 입성은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분이 타신 것은 백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였습니다. 금장식이 된 안장대신 제자들의 땀에 젖은 겉옷이 나귀의 등에 깔려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부활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입니다. 마귀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순종할 준비를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다시 한 번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였던 것을 회개하며 주님을 따르시고 그로 인한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체험하며 더욱더 순종의 결단과 찬양을 높이 올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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