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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의 고난 (사 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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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사 53:1-9)

만일 여러분이 다음 주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모르고 살다 죽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내가 언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삶의 의욕을 송두리째 잃어 버리거나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언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지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시고 갈 길을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육체로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길이었지만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기에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죄에서 사함을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사건은 우연히 돌발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된 것으로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일임을 증거하고 있는데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도 고난당하는 한 수난자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수난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받고 아주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고 있는 슬픔과 고난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저지른 잘못이나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슬픔을 대신 당하며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대신에 고난 받고 슬픔을 당하는 이 수난자를 향해서 오히려 손가락질하고 모욕을 하며 배반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700년 전 이사야서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고난 당하는 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 가운데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여기에서 ‘누가 믿었느냐?’ 라는 말은 아무도 믿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라는 이 질문은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아예 처음부터 사람들에 의해 거절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건만 처절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서 조차도 버림을 당하셨으며 심지어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도망하였으며 가룟 유다는 돈을 위하여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는 자리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싫어 버림을 받아야만 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약해 보이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뿌리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었으며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과 같은 위풍당당한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도 전혀 없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볼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배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그 때에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여러분 예수님은 살인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흉악한 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철저한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간고’ 를 많이 겪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고통을 많이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을 치면서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면서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죽는 순간에는 불쌍하게 여깁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측은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만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면서 부르짖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상 어느 누가 예수님만큼 이나 처절하게 버림을 받았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남들에게서 멸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무시를 당할 때도 있고, 조롱당할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버림을 받으셨으며 우리보다 더 처절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버림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당하는 이러한 일들로 너무 고통스러워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지금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원하기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참된 위로와 소망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고난 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매를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에 큰 화상 흉터가 있어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하며 반항하며 삐뚤어진 행동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던 한 사람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예전에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자신이 갓난 아기시절 집에 큰 불이 나 모두가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에 자신의 어머니가 불길 사이로 뛰어들어 자신을 구하고 얼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 얼굴에 큰 화상이 바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달려가 흐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동네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셨고 나는 어머니 때문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어머님이 제일 미인이십니다.”
그 때부터 두 번 다시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픔을 당하신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세상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 부끄러워 하거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실상 왜 우리는 세상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고 밝히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의 이마가 가시 면류관에 찔리셔야 했으며, 왜 예수님의 손과 발이 굵은 못에 박히셔야 했으며, 왜 예수님의 허리가 날카로운 창에 찔리셔야 했습니까?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그가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모두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채찍을 맞으시고 찔리시며 상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 하더라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그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이 목자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릇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릇 행하다’ 는 말은 제 멋대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목자를 떠나서 제 멋대로 행동하는 양은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죽임을 당하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서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그로말미 암아 우리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8절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셔야 했던 것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은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림을 당하고, 갖은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과연 힘과 권세가 없으셔서 고난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멸하실 수 있고 피하실 수 있음에도 그리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고난당하신 것은 바로 은혜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지만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스스로 싫어 버린바 되어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9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께서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강포를 행하다’ 는 말은 폭력을 휘두르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입에 궤사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인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를 위해서 예비해 두었던 새 무덤에 모셨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고난주간을 앞두고 예수님의 고난이 아직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나를 위해 행하신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고난주간을 통해 더욱 깊이 생각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아니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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