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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 (눅 9: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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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  (눅 9:22-23)


지난 주간에 서울에서 핵안보 정상회의가 열렸다.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회의란다.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아홉 나라이다. 왜 핵무기 만드나? 평화적으로 이용하려고 만들까? 핵무기의 능력을 어디에 쓸까? 사람에게 쓴다. 한 번에 수만, 수십만을 죽이는데 쓴다. 미국 러시아의 핵무기가 다 터지면 지구를 수십 번은 박살낼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죽이는데 자기 능력을 쓰려고 한다.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자이시다. 그 능력을 어디에 쓰시나? 사람에게 쓰신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쓰신다. 사람을 살리는데 쓰신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했다. 이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로 지킨다.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주간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이다. 교회 절기상 가장 의미 있는 한 주간이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셨나?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가? 

1. 죄인의 십자가 

십자가는 본래 사형도구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가 흉악한 죄수를 사형시킬 때 사용하던 도구이다. 사람들을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시켰다. 
십자가 사형은 사형당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수치심과 최고의 고통을 준다. 인권을 최대한 무시하는 거다.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준다. 죄를 억제해 보려는 거다. 

본래의 십자가는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을 자기가 받는 것이다. 자기 죄에 대한 십자가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죄수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우리는 우리 죄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있다. 그러니 당연하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우 고통스런 일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십자가는 절대로 지지 말아야할 일이다. 
십자가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할 일이다. 십자가는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인 것이다.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문제로 정치권이 매우 요란하다. 힘 있는 사람들이 권력의 칼을 함부로 휘두른 모양이다. 자기들이 휘두른 칼로 자기가 찔리게 되었다. 칼은 칼로 망한다. 
사찰을 당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비리나 범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은 어떨까? 저지른 만큼 두려움도 클 것이다. 
비리도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 사찰하려면 해라. 별로 신경 안 쓸거다. 
남모르게 선한 일을 많이 행한 사람이라면 심정이 어떨까? 사찰 당했는데도 기분이 좀 으쓱해지지 않을까!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찰하신다. 모든 사람의 죄를 사찰하여 살펴보신다.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롬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이 사찰해 보신 인간의 현실이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가? 부정하고 싶은가?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죄수처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2. 주님의 십자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죽음을 말씀하신다. 눅9:2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는가? 예수님 곁에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이렇게 말했다.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나?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이다. 
죄인들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이다.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대신 죽으신 것이다. 
누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나? 더러운 내 죄를, 흉악한 내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찬송가 143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되 다 시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능하다고 무시했다. 비웃고 조롱했다. 마27:39-42 “지나가던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며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님이 무능해서 어쩔 수 없어서 십자가를 지셨나? 우리 주님은 나를 대신해서 그냥 모욕 당하셨다. 조롱 당하셨다. 왕따 당하셨다. 그러면서 그냥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왜냐고?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왜 나를 사랑하냐고? 
사람은 사랑스러워야 사랑한다. 죄인에게는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벌을 주라고 외친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분이라서 사랑하신다. 그 사랑 때문에 연약한 나를 대신해서, 죄인인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정의는 너에게, 사랑은 나에게 주라고 아우성이다. 예수님은 사랑은 죄인인 너에게로, 정의는 너의 죄를 대신하여 내가 십자가로. 그래서 사랑과 정의의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결코 즐거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고민과 슬픔의 십자가였다. 마26:37-38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눅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래서 갈등하며 기도하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남이 져야할 십자가를 내가 지셨다.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셨다. 남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다. 
남의 죄를 내가 대신하는 십자가로! 남의 죽음을 내가 대신 죽는 십자가로! 
*국민일보 겨자씨의 최낙중 목사님 글이다.<둘째아들 집에 갔다. 저녁식사를 위해 둘러앉았을 때다. 초등학교 2학년 손녀에게 “예림아! 십자가가 뭐지?”하고 물었다. “응, 십자가는 동생 예나가 잘못했는데, 아빠한테 내가 혼나는 거!” 아이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남의 잘못을 내가 대신 책임지는 것이 십자가임을 알고 있는 손녀딸이 자랑스러웠다.> 

우리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 
예수님은 오늘도 남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사람을 찾고 계신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에게 요구하신다. 진심으로 나를 따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주님의 마음으로 내가 져야할 십자가 지라고 요구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십자가가 있다. 주님이 맡겨주신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받아들여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내 십자가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주님이 가정에서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있다. 이제는 주님 것이 아니라 내 십자가이다. 
주님이 교회에서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있다. 목사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십자가이다. 
주님이 직장에서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있다. 도시와 민족과 열방 가운데서 맡겨 주신 십자가가 있다. 
*우리 교회에게 맡겨주신 우리 교회의 십자가가 있다. 전도의 십자가가 있다. 
선교의 십자가가 있다.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섬겨야할 십자가 있다. 

주님도 고민하셨는데, 우리야 말할 게 없다. 그래서 주님 맡겨주신 내 십자가는 고민스럽다. 
못 본체 하고 싶어진다. 남에게 떠넘기고 싶어진다. 계속 미루다가 평생 보낼 수 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려면, 날마다 고민스럽고, 날마다 갈등할 수 있다. 
당장은 고민스러워도 모든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십자가 외면하게 된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기도해야 할까! 
*고난주간 특새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저녁에도 특별저녁기도를 한다. 셀별로 릴레이 기도도 한다. 개인적으로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하자. 

고민스럽지만 영광으로 받아들이자. 고통스럽더라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자.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이기적인 사람에게 주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영광으로 알고 맡겨 주신 내 십자가를 지자. 

맺는 말 

우리 교회는 종탑이 없지만, 대부분 교회마다 십자가 종탑을 높이 세워놓는다. 
종탑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우리 교회도 주님처럼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대신 십자가 져 드리겠다. 대신 책임져 주겠다고. 
십자가 목걸이라도 다 걸자. 목에 걸 십자가 없으면, 마음에 새겨놓자. 
십자가 목걸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나도 주님처럼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결심해 보자. 내가 대신 십자가 져 드리겠다고. 너의 십자가가 이제는 내 십자가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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