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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놀랍고 놀라운 부활 (마 22: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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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 놀라운 부활 (마 22:23-33)

얼마 전 방송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세상의 개미들의 몸무게를 다 합친 것과 사람들의 몸무게를 다 합친 것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개미 무게를 평균 3그램으로 보고, 사람은 평균 60킬로로 보고 계산했더니, 아마도 개미들의 몸무게를 합친 것이 더 무거울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개미가 정확히 몇 마리나 사는지를 잘 모르면서 그렇게 결론을 짓는 것에 무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지구촌에 개미가 정말 많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보잘것없는 개미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미가 그렇게 많다고 해도 개미는 개미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개미들이 많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들의 사랑과 문학과 신앙, 창조적 비전과 거룩한 헌신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개미들이 사람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의 논리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마음을 가진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를 위해 한 가지 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자녀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고, 그 사람도 자녀 없이 죽었습니다. 또 그 아래 동생이 형수와 결혼했고, 또 후사가 없이 죽었는데, 일곱 형제 전부가 다 한 여자와 결혼했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부활 후에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5-6절을 보면 자녀가 없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문을 잇게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이야기는 율법 조항을 근거로 한 그럴듯한 이야기였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억지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완벽해 보였습니다. 반박할 틈이 없습니다. 만약 이 질문을 우리가 받았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꼼짝없이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논리가 아무 쓸모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정교하고 치밀한 논리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인간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영역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미래 경영은 인간의 논리로 알 수 없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먼저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심각한 오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가 완벽하고, 예수님은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세계는 자신들의 논리를 초월하는 세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여러 말씀들과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들의 논리, 이성적 추리의 한계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성경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머리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적 논리로는 물 위를 걸으신 일, 오병이어의 역사, 부활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논리와 충돌하는 게 아니라, 아예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들이 모두 비논리적이라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논리>가 아니라, <탈논리>입니다. 아예 논리로써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전제로 삼고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부활 후에도 이 세상에서처럼 결혼을 할 것이고, 그 때 일곱 형제 중 누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30절을 읽겠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여기서 인간의 논리는 그 전제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활의 세계는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닙니다. 부활 후에 천국의 삶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을 길게 잡아 늘인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는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열리는 곳입니다. 

그 곳은 이 세상과 비교해볼 때 연속과 단절이 있습니다. 먼저 <연속>을 살펴봅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죽음 후에 음부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는 부자의 집 앞에서 구걸하던 바로 그 거지 나사로였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이 세상에서 저 김운성 목사는 천국에 가서도 김운성일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김운성은 이 세상에서의 김운성이 믿고 행하고 섬긴 데 따라 상급을 받고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그대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아볼 것입니다. 부부도 알아볼 것입니다. 이게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과 부활 후의 삶, 천국의 삶에는 <단절>도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서로를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다시 부부가 되어 자식을 낳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읽은 말씀처럼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이 <이 세상에서 결혼하고 살았으니, 부활 후에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겠느냐>는 질문은 이 세상의 삶과 부활의 삶 사이에 있는 단절을 모른 채로, 이곳의 모든 것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오해 아래서 만들어진 잘못된 질문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논리를 포기하십시오. 하나님의 하시는 위대한 일 앞에서 우리의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논리로, 이 세상의 삶의 방식으로 부활의 삶, 천국의 삶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부활을 이성적 논리로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생명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으로 억지로 이어가는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의식 없이 누워있던 환자가 의식을 회복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의식 없이 누워있던 환자가 의식을 회복해도 그는 여전히 병실에서 링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환자입니다. 설령 그가 나아서 퇴원을 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얼마 후엔 또 다시 병원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점점 쇠약해지다가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이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은 그렇게 시시한 게 아닙니다. 모든 연약함이 사라질 것입니다. 질병을 옮기는 모든 바이러스, 병의 원인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지고 살던 모든 장애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마비된 사람도, 저는 사람도, 부은 사람도,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약을 먹는 사람도, 온갖 지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아마 모습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약하고 늙은 모습 그대로 부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문 닫는 사람도 많아질 것입니다. 모든 병원은 사라지고 의사들은 실업자가 될 것입니다. 각종 보형물을 만드는 분들도 실업자가 될 것입니다. 가발 회사도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부활의 세계에는 모든 직업이 다 다 사라질 테니까요. 

부활은 우리의 상상과 논리를 넘어서는 놀랍고 놀라운 축복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은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하신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는 과거 한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고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실 때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 전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이삭의 하나님이셨고, 야곱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과거의 일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실 그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건 정말 놀라운 진리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수백 년 전에 죽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살아 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누리던 이 세상의 생명은 끝났지만, 그 분들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동묘지에서 시체들이나 거느리는 왕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세상에서는 죽었지만, 지금도 살아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삶이 끝난 후의 영원한 생명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영원한 생명을 증명해 보이신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었습니다. 문이 잠겨 있어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유령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져볼 수 있는 몸이 있었고, 생선을 잡숫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적 논리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 놀라운 메시지는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됩니다. 부활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놀랍고 놀라운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길 기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감격하고 놀라고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그들도 예수님께서 꼼짝 못하고 걸려드실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두개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셨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아멘! 

그렇습니다. <놀라는 것, 감탄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대답하시는 지혜만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의 생명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놀라야 합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영원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축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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