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26)

첨부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26)

생명이란 참으로 존귀하고 신비합니다. 에집트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에는 람세스 6세및 투탕카문왕의 유물과 미이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내하던 가이드로부터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000년된 미이라의 관에서 씨앗하나를 발견해서 과학자들이 심었는데 거기서 싹이 났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생명이란 이 처럼 신비한 것입니다. 3000년동안 미이라의 관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때로 아내를 돕기위해 슈퍼에 계란을 사러 갈때가 있는데 유정란과 무정란의 가격차이를 보면 생명의 가치를 느낍니다. 유정란은 평균 무정란에 비해 두배이상 가격이 비쌉니다. 생명이 있는 계란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동해안 대포항을 갔는데 때마침 태풍이 일어서 오징어 값이 비쌀 때였습니다. ‘10마리에 1만원’이란 간판이 있어서 가보았더니 그것은 이미 죽은 오징어였습니다. 그런데 옆에 펄떡 펄떡 뛰는 살아있는 오징어가 있는데 그 가격은 1마리에 1만원 이었습니다.

기독교에는 성탄절 감사절 부활절등 큰 절기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부활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생명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죽은지 사흘만에 죽음의 무덤을 깨치고 생명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날이기에 부활절은 매우 귀중한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한 죄의 노예로 살아갈 것이고 죽음의 공포 앞에 떨면서 살다가 결국 지옥의 형벌에 떨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가 부활절 전 토요일에 길을 가다가 한 소년이 새장에 갇힌 새를 들고 학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새장을 던지기도 하고 볼펜으로 새를 찌르기도 하였습니다. 새도 생명인지라 안되보여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너 왜 불쌍한 새를 괴롭히니?” 소년은 대답합니다. “내 것인데 뭐 어때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괴롭히다가 어떻게 할건데?” 소년은 대답합니다.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죽여 버릴거예요” 그 말을 듣고 가슴에 섬짓함을 느낀 스펄젼 목사님은 소년을 타일러서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새를 사서 새장을 열고 날려 보내 주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부활절 아침에 목사님은 길에서 만난 한 소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소년처럼 사탄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싫증나면 지옥에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아주 비싼 댓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사탄에게서 되찾아 참 자유와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때 성도들은 부활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괴롭히고 노예로 만드는 죄와 사망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유래를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을 만드셨을 때 그때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위장한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에게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창3: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롬5: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 죄와 사망가운데 빠진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다가 우리 죄의 짐을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요10:10“도둑이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너희의 부활이요 나는 너희의 생명이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예수의 생명이 내안에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잠시 잠든 것과 같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때 “우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생애가운데 죽은 사람을 살린 기사가 3번 소개됩니다. 첫째는 눅7장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죽어서 상여에 실려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상여를 멈추게 하신후 죽은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둘째는, 막5장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입니다. 예수님이 지체하시는 사이에 병든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 가셔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후에 ‘달리다굼’하십니다. ‘소녀야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는 말씀입니다. 그때 소녀가 일어나 앉았습니다. 

세 번째는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 마다 자주 들르시는 곳이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선교 여행 중에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예수께서는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몇일후 돌아와 보니 이미 나사로는 장례지낸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일으키십니다. 돌문을 옮기게 하고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할때 베를 동인채로 나사로가 걸어나왔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생명의 주인임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스스로 죽음의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목사님께서 호기심 많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시골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논두렁의 콩을 보고 아들은 묻습니다. “아빠 저건뭐야” “아, 콩심고 있는 거지” “아빠 저건 뭐야?” “고추지, 고추심고 있는 거야” 공동묘지옆을 지나갈 때 아들은 또 묻습니다. “아빠 저건 또 뭐야?” “저건 죽은 사람을 묻는 곳이야” 그때 아들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아 저건 사람을 심는 곳이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때 목사님의 뇌리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땅에 묻히지만 부활의 사람들은 땅에 심는 것이구나...’ 

옆에 분들과 인사합니다. ‘당신은 묻힐 분이십니까? 심기실 분이십니까?’ 

고전15:42-44“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

퀴즈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라면이 무엇인지 말씀해보세요’ 정답은 ‘주님과 함께 라면’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이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기에 부활은 소망이요 부활은 승리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이라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삶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픈 30대 주부가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간 남편은 소식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하루 하루를 살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어느날부터 문득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죽으면 모든게 평안하겠지. 약방을 지날때마다 불면증 핑계를 대고 수면제를 조금씩 모았습니다. 어느날 결심을 하고 아이들을 잠재워 놓은뒤 수면제 봉지를 여는데 부엌에 켜 놓고 들어온 라디오에서 설교가 들려왔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는다고 모든게 해결되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없이 죽는 사람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영접하십시오. 당신의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내어 놓으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짐을 대신 져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 말씀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약봉지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릴때 친구따라 주일학교에 몇 번 따라가서 배웠던 예수님께 무릅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너무 힘들어요. 제 짐을 맡아주세요’ 그 순간 그녀는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다시 일어섰습니다.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80세의 노권사님이 되셨습니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행복하게 자라갑니다. 40년전의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그때 만약 잘못된 선택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오늘의 이 행복은 누릴수 없었겠지? 

누구나 인생에 힘들고 어려운 일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난처 되신 주님의 날개아래 피한다면 주님의 보호를 받을수 있습니다. 

큰 선박에는 ‘시타텔’이라고 부르는 선원 긴급피난처 설치를 의무화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작년 소말리아 해적의 공격을 받았던 한진 텐진호에는 시타텔이 있었기에 선원20명이 긴급대피 할수 있었습니다. 비상 사태시 선원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시타텔’은 총격에도 견딜수 있는 두꺼운 철판으로 문이 되어있습니다. 선원 모두 피신할수 있는 크기의 공간으로 2-3일동안 견딜수 있는 물과 비상식량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가까운 거리에서 교신 가능한 통신장비도 갖추고 있습니다. 시타텔이 있었기에 텐진호의 선원들은 무사히 숨어있다가 국군에 의해 구출될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도피성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을 한 사람들은 공정한 재판때까지 생명을 보호받도록 도피성에 피신해 있도록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잘 닦여져서 14미터 넓이의 길이였다고 합니다. 또 군데 군데 팻말이 있어서 도피성을 잘 찾을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도피성이 되십니다. 그분의 날개아래 우리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은 시편16:1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편27:5절에 “여호와께서 환난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위에 두시리로다”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인생을 의탁하십시오. 그분의 보호의 날개아래 거하십시오. 지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여러분의 구주로, 여러분의 인생의 동반자로 모셔들이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