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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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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눅 23:39-43)


오늘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은 우리 언양 영신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1,492년까지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던 지브랄탈 해역에는, '네블루스 울트라'라는 라틴어의 세 글자로 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NO MORE BEYOND'인데, 이 말은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스페인 사람들, 그리고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구는 여기에서 끝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가 끝이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람이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저 건너편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지구의 끝, 그리고 참담한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지구의 끝을 넘어서서 거기에 미지의 새로운 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표지판은 바뀝니다.  사람들은 첫 글자를 뗐습니다.  '네어' 라는 단어를 빼버렸습니다.  네어가 영어로는 노(No)입니다.  NO라는 단어가 빠지니까 이제는 'MORE BEYOND', 그러니까 "저 건너편에는 많은 것이 있다! 놀라운 것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음 앞에 서서 우리는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현상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최대의 연구가로 불리는 하버드대학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는 연구팀을 만들어 소위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합니다.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던 사람들, 우리가 보았을 때 죽었던 사람들, 그런데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의식 세계만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연구했습니다.  그가 쓴 책은 학문적으로 어렵지만 그의 조수들이 쓴 책들은 세상에 많이 소개가 되었습니다.

죽음 건너편에 뭐가 있는가?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던, 아니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했던, 그래서 이 사람은 이미 생명이 끊어졌다고 선언을 했던 사람들이 극적으로 다시 살아난 드문 경우들을 연구하면서 그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돌아왔는지를 연구합니다.

이때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악몽을 경험하고 옵니다.  아주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두 가지 현상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돌아옵니다.  그것은 터널을 잠시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의 세계에 잠깐 발을 디뎌 놓는 순간 너무너무 좋았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할만한 메세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도 천국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반반 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던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한다면 준비만 했었다면 갈 수 있었던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그래서 자기를 도박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죽기 직전에 극적으로 죽은 이후에 천국이라는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더불어 양쪽에 두 사람이 매달려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강도였고 행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마음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죽어가면서 저주하고, 죽어가면서 욕설을 퍼붓고, 죽어가면서 몸부림을 치는 그를 향해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한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그 정죄를 받고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우리 가운데 매달린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옆에 매달린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때 예수님은 역시 똑같은 고통의 몸부림 속에서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거야.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서 깨어 날거야"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병을 앓고 거의 죽어 가는 분에게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받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권면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강도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사람은 아파도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까?  선생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제 자신을 위해서 살았겠죠."
이분이 마침 은행계통에서 일하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 지점장도 많이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뉴욕은행의 지점장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지점장으로서 본부의 지시와 전혀 상관없이 마음대로 돈을 쓰시고, 그리고 본점에 하나도 보내지 않고 다 쓰셨으면 그런 사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강도겠네요?"
이때 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그것이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강도가 아닙니까?  자기 이기심의 만족을 위해서, 내 작은 이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만이 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강도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이 아침에 여러분과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는 슬픈 소식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강도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강도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을 기독교의 용어로 말하면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회개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천국을 보장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0절에 보면 강도 한 사람이 다른 강도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41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처형을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강도로서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에 해를 끼쳤을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죄값이다는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은 분명한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여기 서 있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사람들은 의인을 말합니다.  영웅을 말합니다.  성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견해일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내 심장을 꿰뚫어보시고 겉으로 표출된 내 행동의 배후에 있는, 내 삶의 동기를 살피시며 가장 은밀한 곳,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고 있었던 내 삶의 모든 모습을 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다 죄인인데 이 땅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예수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의사야, 나는 병자를 위해서 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 앞에 나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아픕니다.  여기가 아픕니다.  막 쑤시고, 결립니다."  이것이 정확한 진단에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치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건강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내 삶이 끝나는 그 순간, 용서받은 자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국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첫째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 강도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는 것이 옳아.  좀 원색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죽는 것이 싸.  강도질하고 살아왔던 인생, 나를 위해서만 살아왔던 내 인생은 이렇게 죽어도 마땅해, 나는 죄인이야.  우리는 정죄된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천국을 보장받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이것이 그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회개한 강도의 부르짖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본문 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 강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두려움,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이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그가 죄를 범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가 나를 심판하신다, 내 말도 심판하고, 내 행동도 심판하고, 내 의식과 생각까지도 심판하신다.  내가 쏟아놓은 모든 말, 내 모든 행동들이 어느 날 나의 창조자이신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심판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믿는다면 죄를 짓겠습니까?

시편에 보면, 시편 기자가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보셨나이다.  나의 생각을 통촉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행동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내가 하늘 저 높은 곳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가 저 음부의 깊은 곳에 가서 눕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저 바다 끝으로 새벽날개를 치면서 가서 거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나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인생을 지어 만드신 창조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살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무슨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데….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불꽃같은 안목으로 나를 꿰뚫어 보시고 내 깊은 생각의 밑바닥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이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시작입니다.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내가 주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내가 이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경외라고 말합니다.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진지한 회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의 어떤 공적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인생을 살면서 조금 잘해놓은 일, 내가 조금 한 자선사업,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 번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강도처럼 우리가 해야할 세 번째 일은 예수님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믿고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께 매달려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다니고 핍박을 받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강도는 그 예수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

오늘 이 말을 기독교인들은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으실 때 두 번째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전에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골고다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놓고, 몸부림치면서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예수를 향해서 야유와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군중들과 로마의 병정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때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옆에 있는 강도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분은 남을 용서하고 있다.  자기를 저주하고 못박은 원수들을 용서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의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고통이 너무 심하면 다른 생각을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한 때 저도 이것을 경험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경희의료원에 40여 일을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때 일리자로프라는 기구를 차고 있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40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 본 것은 4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마약에 가까운 진통제를 맞고서 잠을 잤습니다.  거의 매일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데, 제 머리에는 그저 "아프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극한의 고통에 이르게 되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 밖에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의 극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옆에 있는 강도에게 충격을 준 것입니다. 

아니 저 분이 누구야?  그 동안 세간에 떠돌던 소문처럼 저분이 메시아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계신 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올 수 있는 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하시는 분….  그렇다면 저분이 나를 용서해 주신다면, 지금 저들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저 분이 나를 용서할 수 있다면 나도 용서받고 저 천국 그분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말을 바꾸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제는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를 위해서 매달립니다.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그리고 예수님을 용서할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방금 전에 예수님의 용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격렬한 고통과 저주와 야유와 조롱을 받고도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기보다도 이웃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저 분은 메시아다, 맞았어, 약속된 메시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이시는 바로 그분이야, 그렇다면 내가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잎새 같은 최후의 소망, 그 소망을 예수에 걸고, 옆에서 같이 고통을 토하지만 자기와 전혀 다른 그분을 향해서 외칩니다.
"주 예수여, 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은 낙원입니다.  파라다이스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파라다이스를 말했습니다.  이상향을 말하고 유토피아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도 유토피아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진정한 낙원, 우리가 그리던 그 이상향, 우리의 꿈,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소망이 충족될 수 있는 그 진정한 나라, 천국은 낙원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천국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저는 예수님이 없으면 천국에 갈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 분,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이 있어서 천국은 진정한 파라다이스일 것입니다.

이민을 간 우리 한국의 교포들 가운데는 친척들이 모두가 미국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에 별로 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조국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신 예수님, 우리를 사랑해주신 예수님,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내게 꿈을 주시고, 내게 기쁨을 주시고, 노래를 주시는 그 예수님,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강도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회개하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무나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내 생명이 끝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얼마나 평안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맞아! 나는 그 분의 낙원에 저 분과 함께 있게 될 것이야.  그 낙원에 있게 될 것이야."

물론 저는 이 강도에게도 후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을 일찍 만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나는 강도가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인생을 헛되게 살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죽음의 마지막 문턱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은혜였습니다.  크나큰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그 강도의 심장이 멎는 순간 그의 앞에는 낙원으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려져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복음성가에 보면, 한 눈먼 사람이 소리치며 찬양할 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디가 길이--냐?  어디가 길이--냐?  어디가 길이--냐?
말해다오--"

인생을 사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로 가는 그 길이 어디냐?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의 죄 많은 인생, 그의 허물 많았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보장받고 마지막 순간에 이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이 강도, "네가 말이야,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어떻게 말입니까?  그가 자기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저를 구원해 주시구요.  당신의 나라가 올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은 이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꺼야."

그의 심장이 멎는 순간 이 밝은 길을 통해서 주님의 품안에 안기는 그 순간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죄송해요 주님, 잘못 살았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염려 마라.  이제는 다 잊어버려라.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거야.  영원히 나와 같이 여기 있는 거야."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는 구원받은 강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바로 내 이야기이어야 합니다.  죄 많은 인생, 허물 많았던 내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주님께서 천국에서 나를 맞아 주신다.
이것은 먼 훗날, 아니 잠시 후에 주님 앞에서 섰을 때에 고백하게 될 우리의 노래이어야 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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