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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 사도로 부르심을 받다!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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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로 부르심을 받다! (롬 1:1-7)

[로마서 1: 1-7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발신: 사도 바울은. . .
내용: 그리스도에 대하여. . .
수신: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
인사: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 .

오늘 말씀은 아주 명쾌하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 그리고 편지의 내용과 인사말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아직 제국의 수도 로마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서를 쓸 당시에 바울의 명성은 이미 충분히 그리스도인 사이에 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당시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알만한 신분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할 때, 아마도 이방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 혹은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던 사람들에게, 성지(聖地)의 사도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유대인 중에서 그가 자랑할 수 있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베냐민 지파”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선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도행전 22장 6-11절에 나와 있는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체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세상적으로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출생은 얼마든지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을 볼까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 결박당했을 때, 천부장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소동을 일으킨 유대인들에게 히브리말로 자신의 신분을 소개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다소는 제가 지난해 터기 성지순례를 하면서 방문했던 도시입니다. 근처에 트로이 목마 유적이 있는 곳, 에게 해를 끼고 참 아름다운 지역입니다. 당시에도 문명이 아주 발달했고요. 다소는 당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대학들보다 훨씬 뛰어 났다고 하니, 
그가 그곳에서 자라, 당시 명문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는 것 또한,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보면, 그에게서 자신의 신분을 주장하는 것이 참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도성’, ‘학문성’, ‘신뢰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그런 욕망들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더는 신분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자랑스러워하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입니다. 

사실 당시 문화에서 ‘종’이라는 희랍어의 ‘둘로스’는 로마인들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단어였다고 합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이고,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doulos’라는 말은 또한, 출애굽기 13장 3절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배신으로 불의하게 노역한 것(창 29:18)을 의미했습니다. 당시에 아무도 종이라는 말 듣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꺼이 ‘종’으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늘 두 가지 차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의에 의해 종이 되는가? 아니면 타의에 의해 종이 되는가?
그가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했을 때, “종 됨”은 수치가 아니라 그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보았던 최춘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맨발로 추운 겨울에도 길을 걸으며, 어쩌면 미친 사람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간 사람,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기꺼이 자신의 재산과 과거의 경력을 다 버리고 그렇게 종 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그때 불렀던 찬양입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동을 주려고 애쓰는 사람” 과 “살다 보니 감동을 주는 사람” 말입니다. 
감동을 주려고 종이라 스스로 낮추는 사람과 그저 자신을 종이라 부를 수 있는 겸손함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위선”과 “겸손”이 갈리지요.
이 부분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하지만 위선도 연습하다 보면 겸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고 그렇게 살려다 보니까 로마서에서 자신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냥 말씀을 묵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할 수 있는 위선이라면 괜찮다!”

진짜 겸손함이라는 것은 “겸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에게서 스스로 ‘종’이라 불러도 될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단서가 바로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사실 앞에 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한 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은혜 가운데 산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빌립보서 3장 7-8절을 보세요.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가장 귀한 것을 위해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김이 당연하지 않은가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꿔주신 은혜가 그 어떤 것을 대신할 수 없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무엇으로 불러 주셨습니까?” 적어도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사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도로 불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엄마와 아빠로 불러주신 것이 감사해야 자식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서 가진 직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야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자랑스러워야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쯤은 배설물로 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것, 장교 훈련을 받으면서도 자랑스러웠던 것이, 훈련 받는 동안 “품위 유지비”로 월 5만원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교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절도 있게 손을 올리고 갑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습니다. 우비를 입고 품위 있게 걷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확고한 소명의식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기꺼이 “나는 ‘종’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둘째는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있는데, 불림을 받았다는 것도 좋은데 주신 사명이 너무 귀하다는 것이지요. 
“복음을 위하여”
복음이 무엇인가요? 복음이 자랑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찰스 스윈돌이 쓴 [로마서 주석]의 첫 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이 100% 천연인데다 100% 효과를 내는 모든 종류의 암 치료제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이 기적의 치료제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보급하기 위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시간, 에너지, 돈을 쓰겠는가?
바울은 사명감으로 불타는 사람이다. 그 사명은 바로 세상이 지금까지 받은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 - 복음, 죄라는 치명적 질병을 100% 치유하는 하나님이 제조하신 치료제 -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복음 - 바울의 언어로는 ‘복된 소식’ -은 그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집착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가져가려고 하던 그는 로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협조를 구한다. 그들은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복음이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인생을 순식간에 뒤바꿔 놓았던 삶의 혁신이 누군가에게도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만족하지 못했던 삶이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인생의 바꾸어 놓는 것보다 위대한 일이 있을까요?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그의 책 “예수를 전염시키는 사람들”에서, 자신이 전도하는 이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한 생명이 예수를 믿을 때마다 천국에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는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는 가족 한 사람의 죽음에 애간장이 타고 끊어지는데, 그 아픔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당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 안에서 생명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는지 모릅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가면 루비 켄드릭의 묘가 있습니다. 1907년 급성맹장염으로 25세의 청춘을 조선 땅에 묻은 여선교사입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를 파송한 텍사스 청년단체에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아침저녁으로 조선에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만약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의 있다면 나는 천 개의 생명을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다음은 그녀가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입니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아요.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조선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다들 철수하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는 자기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도 집에 가고 싶어요….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 엄마∼ 사랑합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역사를 증명합니다. 본문 2-4절을 보세요.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이 전하기를 원하는 내용이 “복음의 정통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복음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를 통해 구약을 60여 번 인용합니다.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인성’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는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즉, ‘신성’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되심을 공동체에 이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어떤 민족과 학식의 배경을 가지든지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주 중요한 신학적 내용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단적 배경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학의 전통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달라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고, 아무리 비슷한 척을 해도, 같을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1990년 대 중반 미국에서 일어났던 Promise keeper's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워싱턴에 100만이 넘게 모였습니다. 
그때, 총재가 회중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의 교파가 무엇입니까?” 
각자 자신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혼돈이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그때 똑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Jesus Christ!”
너무나 명쾌한 대답이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때에도, 계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보면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전 3:4)
복음의 전성기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여의도 광장의 Explore 74 대회를 기억하시나요? 그때 사람들은 교파가 무엇인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을 뿐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오늘 말씀의 결론이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복음을 받는 자들의 정체성에 대하여도 명확하게 말합니다. “성도”라는 말이지요. 이 말의 형용사는 “거룩한”입니다. 즉 거룩하게 구별 받은 자들을 가르칩니다. 세속 도시 로마에서 살지만 때 묻지 않은 거룩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그렇습니다. 그곳은 우상을 숭배하는, 황제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권력의 핵심부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들의 삶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을 누가 주는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평강’이란 유대인들이 인사할 때 ‘샬롬’이라 말하는 것으로 ‘회복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모든 축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은혜”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축복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강을 누리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을 보세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을 원하는 데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시공을 초월한 은혜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른 하나는, 본질적인 평강입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된 평화에 속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질을 벗어난 평화는 틀림없이 문제를 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불확실성 속에 살아갑니까? 어느 날 깨어질 수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주시는 평안입니다.

하워드 슐츠가 쓴 [Onward]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008년 6월 30일. CEO로 복귀한 하워드 슐츠는 7100개의 매장 중에서 600개의 매장을 영구적 폐쇄를 결정합니다. 이 폐쇄조치로 스타벅스는 3억 4000만 달러의 비용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분노를 산 것은 폐쇄하는 매장의 70%가 최근 3년 사이에 문을 연 곳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3년간 2300개의 매장을 공격적으로 열면서 성공을 이룬 시기였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3년 동안 그저 성공한 척했던 것이죠!”
“600개 매장이 적힌 목록을 응시하는 동안 마음속에서 하나의 교훈이 아로새겨졌다. 덩치가 얼마나 커졌는지에 따라 성공을 규정한다면 그 성공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한 때 나를 사로잡았던 매장 4만 개라는 큰 숫자는 결코 중용한 것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중요한 숫자는 오직 ’하나‘야. 한 개의 컵, 한 명의 고객, 한 명의 파트너, 한 번의 짜릿한 경험.’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한두 시간이라도 잠을 청하려 애썼다. 우리의 과거 행동은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취하는 행동은 반드시 자랑스러워지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모든 자”가 아니라 그 앞에 붙어 있는 조건입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가장 번화하고 세속적인 도시, 풍요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거룩함을 상실한 도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
성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리 가운데서 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리였던 우리가 양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자에게 사도 바울이 가졌던 특별한 애정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강입니다. 주님께서 내 맘에 들어오실 때 주시는 평안입니다. 
은혜는 기쁨입니다. ‘joy’ 환경과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쁨이 동적인 축복이라면 “평강”은 ‘peace’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강 같은 평화”입니다. 정적인 축복이죠. 잔잔하게 우리의 가슴에 흐르는 평안함입니다. 요동치는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의 중심을 잡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확신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거대함 맘모니즘, 욕망과 권력을 쫓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살아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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