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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제나 주와 함께 (요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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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주와 함께 (요 15:1-11) 


얼마 전 카이스트 대학교 학생이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다.’라는 유서를 남긴 채 투신 자살을 하였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사람이 꿈꾸는 소위 로망으로 삼는 최상위 대학 중에 하나입니다. 그곳에만 입학하면 인생의 성공이 다 보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대학 중에 하나입니다.

그 대학엘 입학하고 그리고 그 대학을 졸업하면 항상 기쁘고, 범사가 감사하고, 언제나 행복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대학엘 가려고 우리들이 투자하고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대학엘 다니는 학생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자살의 이유가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카이스트 대학생의 자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벌써 여러 명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스트로 대표되는 모든 세상적인 성공 속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생명의 풍성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오르고 있는데 정작 그곳을 정복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메시지는 ‘여기에 기쁨이 없다.’, ‘여기에 구원이 없다.’, ‘여기에 생명이 없다.’, ‘여기에 행복이 없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 우리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을 일등이라고 할 때 이등 쯤 되는 피조물이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일 겁니다. 그런데 이 일등과 이등의 차이가 정말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라면 저는 진화론을 믿겠습니다. 그런데 원숭이와 사람의 차이는 차이가 나도 보통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서 다른 피조물과 비교도 안되는 탁월함과 뛰어남을 가지고 엄청난 문명과 문화를 개발하며 꿈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해서 우리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보다 더 탁월하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삶의 품질은 오히려 다른 피조물들만 못합니다. 세상에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으려고 하리만큼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만이 자살을 합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만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자살이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것 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표현을 하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답을 ‘궤도 이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독 우리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도 우리에게 선택 받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사랑받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선택할 수 있으려면 거부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거부할 자유가 있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는 선거를 하였습니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정말 선거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도 투표가 있고 선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보면 100% 참가에 100%의 찬성으로 투표가 종료되곤 합니다. 그것이 선거와 투표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투표를 통하여 당선되는 사람은 우리 남한과 같이 치열한 경쟁 그것도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선택받고 당선되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받고 선택받고 싶으셔서 우리들에게 소중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자유의지가 아닌 그냥 본능을 주셨습니다.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식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과 룰을 이탈하지 못합니다. 궤도로만 달리는 기차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과 법을 선택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받고 싶으셔서 우리들에게 거절 받으실 위험을 무릅쓰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는 아픔을 격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이지만 우리들같이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때문에 말도 못하시게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선택은 하나님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복이 됩니다.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받는 축복은 하나님을 거부하지 못함으로 불행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피조물들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거절은 하나님에게만 고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도 고통이 되고 불행이 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거절하고 거부함으로 받는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을 거절하지 못하는 다른 피조물들의 삶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힘들고 어렵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가 만든 세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절로 생겨난 세상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럼으로 세상이 굴러가고 움직이는 원칙이 있습니다. 룰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본능적으로, 기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식과 법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저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명은 늘 일정합니다. 천국을 사는 것과 같은 기쁨과 행복은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지옥을 사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이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할 때에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는 다른 피조물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살지만 세상이 아닌 천국을 살게 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거절하고 거부할 때에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못하는 다른 피조물들이 느끼지 못하는 고통과 아픔을 대신 느끼고 살아야만 합니다. 세상을 살지만 세상이 아닌 지옥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나름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넓은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그 길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다니기 때문에 그 길을 거부하고 딴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잘못된 길입니다. 길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시는 것입니다. 세상과 함께 창조된 피조물인 우리가 내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길 같아 보여도 길이 아닌 길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카이스트와 같은 길을 만듭니다. 그리고 신뢰하고 확신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면 그것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기쁘고 늘 감사한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카이스트에 붙으면 생명이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떨어지게 되면 죽고 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늘 불행하고 힘들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카이스트로 대변되고 대표되는 세상적인 성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바울의 로마시민권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잘 사용될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궁극적인 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카이스트에 합격했다고 구원을 얻은 것도 아니고, 거기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우리의 삶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분명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신뢰하는 것만큼의 의미와 가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카이스트에 합격한 학생이 죽음으로 우리들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잘 아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가지로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카이스트도 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카이스트에 붙어도 그 카이스트 때문에 구원을 얻지는 못합니다. 카이스트는 포도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은, 성공은, 출세는, 명예는, 권력은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붙어있어만 하는 생명인 포도나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카이스트에 떨어져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떨어져 있으면 카이스트에 붙어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세상에 돈도 좋고, 권력도 좋고, 명예도 좋고, 지식도 좋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창조주는 세상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이신 하나님께 붙어있어야만 많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진리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2절에서 다윗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카이스트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도, 명예도, 출세도, 세상적인 성공도 다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그 자체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그 모든 것이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근본적인 복이요, 카이스트로 대변되는 복들은 지엽적인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이 있으면 지엽이 살지만, 근본이 죽으면 지엽 자체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지엽을 근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지엽에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근본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하나님보다는 카이스트에 더 목을 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로 가려하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식과 법대로 타협하며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 식대로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길을 걷기 때문에 세상에서 저들과 함께 살면서 저들과 타협하지 않고, 저들과 함께 걷지 않고, 딴 길을 걸으며, 딴 식을 고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길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것이지 쉬우냐 어려우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쉽고 넓어도 길이 아니면 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이 길이라면 그리고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가 붙어 있어야 할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길 맞습니다. 하나님이 포도나무 맞습니다. 딴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을 다 얻었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잃었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혹시 다 잃었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붙어 있어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면 별것 아닙니다. 사는데 지장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상 모든 사람이 꿈꾸고 욕심내고 바라는 자리를 정복하였던 학생 하나가 ‘무슨 일을 해도 기쁘지 않다.’는 유서를 우리들에게 큰 교훈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우리가 붙어 있어야 할 포도나무이신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아멘.
세상도 붙잡으면 좋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혹 그것을 놓친다고 하여도 죽는 것 아닙니다. 세상도 붙잡으면 좋지만 그것 붙잡는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만큼 세상 성공적으로 붙잡는데 성공한 나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작년에 저는 아프리카 말라위를 다녀왔습니다. 우리나라 50년대 같았습니다. 지난 주 저는 중국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중국의 발전은 참으로 눈 부시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80년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중국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자주 미국과 유럽 같은 소위 선진국도 다닙니다. 예전엔 다 우리나라보다 깨끗하고 아름답고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젠 그에 못지않습니다. 정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행복해 지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삶에 기쁨이 넘치십니까? ‘무슨 일을 해도 기쁘지 않다.’는 고백이 비단 어느 한 학생만의 고백이겠습니까? 그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실존적인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왜 그런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행복이, 기쁨이, 구원이, 생명이 오직 주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좁고 힘들어도 주의 길을 고집해야만 합니다.
언제나 주와 함께 주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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