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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에 대한 증거 (요 5: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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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대한 증거 (요 5:30-47)


존 스토트는 영국 여왕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는 대관식이 행해지기 바로 직전, 즉 여왕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 서, 남, 북 각 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교가 물을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 소리로 승인의 대답을 네 번 해야만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씌워집니다.” 
스토트씨는 말을 계속 잇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들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심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 분께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이 필히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그뿐 아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됩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니 그 남은 사람들이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였습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이 군병들이야 말로 참된 증인이었던 셈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언하는 이가 여럿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요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을 찾아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시므로 그 일이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그 날에 일을 하라고 하셨는데 너희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논쟁의 불씨가 어디로 퍼지느냐 하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즉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하는 말로 인해 이제는 신성모독죄로 비약됩니다. 그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으로 주제를 바꾸어 버리십니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나 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셨고 시키는 일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결국 그 논쟁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싸움으로 이제 옮겨갑니다. 그 결과 나중에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겼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논쟁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이야기를 진전시키십니다.

문제의 초점은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이냐 하는 것입니다.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 때문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라면 감히 어떻게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느냐?’고 비난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 당시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없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성함이 여호와라고 밝혀진 것은 요즈음에 와서입니다. 사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정확한지는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성경에 하나님이란 단어를 기록할 때마다 모음만 쓰고 자음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을 기록하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말씀을 쓰던 서기관들이 쓰던 붓을 물에 빨아서 다시 썼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기만 하면 꼭 그렇게 해야만 했고 성경을 읽다가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호와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또는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웃어른들의 성함이나 부모님의 성함을 남에게 대야 하거나 불러야 할 때는 ‘김 0자 0자’라고 쓰고 부릅니다. 만일 누굽니다라고 가볍게 함자를 댔다가는  예의가 없는 자라고 멸시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별짓는 이스라엘의 관습 아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유대인들의 충격은 이만 저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말을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하라 명하신 것만을 한다’ 그가 나를 보내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공격을 받고 계십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보내신 자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지금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시킨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설득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감언이설로 자신을 증명하거나, 우리를 감동시키거나, 우리를 놀라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못 알아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어쩔 수 없어서 최후의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최후의 방법이 바로 나의 죄 값을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세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마지막까지 이를 위해 사셨고 이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이 증거한 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보라 우리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내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을 우리가 기쁨으로 따르며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신 모든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귀한 사역에 함께 동참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하늘 아버지의 증거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여기서 역사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증거 하시거나 과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까? 그것은 그가 죽으심으로 인해 중생하게 된 자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나중에 이해하고 알게 하려고 미리 해 놓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은 제자들에게까지도 이해가 다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잡혀가시자 도망가 버렸던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고 장사 지낸 바 되자 제자들은 모두 고기 잡으러 가버렸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열 두 제자들 앞에 차례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돌아온 시점에서 거꾸로 풀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그때 그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렇게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 깨닫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자신을 증명하라는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내가 누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제한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포기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공격하는 자들을 무색하게 만들거나, 심판하거나, ‘그래, 그것 봐라!’ 하는 식의 싸움을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고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과 신자의 신자 됨의 표지가 무엇이냐 하면 곧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한을 품고 죽은 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들의 이와 같은 이 세상을 사는 목적과 원리를 아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원리를 아는 세상 사람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가면서 기도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졸며 자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일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을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눈이 뜨여졌고 우리의 눈도 뜨여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압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에 그가 가진 권위, 권세, 그리고 이루어야 할 일 중에서 그는 권세와 권위를 내려놓고 오신 분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그 일을 이루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요, 목표요,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라는 간단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시작이라는 말 자체는 쉬운 단어입니다. 뭔가 시작됐다는 말이야 쉬운 말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좋은 소식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좋은 소식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단순히 순종한다는 그것만 가지고 구원받을 수가 없고 우리는 언제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중심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신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많은 유대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방 사람들이 자기 땅을 점령하여 통치하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자기들을 해방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메시야로 오시되 우리들을 영원히 묶어 매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앞부분은 시편 2편 7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편은 대관식의 시편 즉 왕으로 즉위하는 자에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자와 같이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분에 대해서 찬양을 드리는 내용으로 꽉 차 있는 시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에 앉으사 왕관을 쓰실 왕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뒷부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은 그가 오시되 어떠한 왕으로 오시느냐를 설명해 주는 말씀인데 이것은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지만 또한 아울러서 종이 되신다고 하는 예언적인 뜻을 담은 위대한 예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이러한 구주가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구주는 빨리 없애야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가 왕이 되려고 하고 대접받기를 원하지만 섬기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어려움 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증언하신 것은 왕이지만 오히려 종처럼 섬기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요 예수님은 이 하늘의 소리처럼 철저히 섬기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기까지 마지막 피한방울까지도 다 내어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를 죄에 속박과 사망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속의 은총을 얻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자가 되었음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요 따라서 비판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고 용납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자신을 낮추고 먼서 섬기기를 기뻐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거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오직 주님의 관심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누구나가 영생을 얻기를 원합니다. 천국은 다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러냐고 항변까지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도 지키고 십일조도 드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더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였더라면 너희가 나를 영접하였을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어도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고자 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도 하고 읽기도 하는데 깨닫지를 못하는 그 이유가 어디 있냐 하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들 역시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를 우리가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의 주가 되신 주님이 사셨던 바로 그 모습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거듭거듭 말씀하시기를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라 하셨고 너희가 살고자 하면 먼저 죽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욕되게 한다고 흥분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 싫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내 안에 자랑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십자가의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주님 말씀하셨는데 과연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로라 고백하던 바울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근본 죄 가운데 태어난 죄인이로되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넘어지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인자한 손길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 안에서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내려놓는 종의 삶, 비움의 도리를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약 당신이 재난의 한 가운데 처해 있다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죤 하퍼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퍼는 스코틀랜드의 목사였는데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에서 3개월 동안 설교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승객 중 얼마는 구명정에 옮겨 탈 수 있었지만 하퍼 목사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차가운 대서양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물에 떠 있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그 시간에 하퍼 목사님은 주위를 헤엄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하퍼 목사는 부서진 나무 조각 하나에 매달려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예수를 믿으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기 바로 전 하퍼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4년이 지나 그 여객선, 곧 타이타닉 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한 모임에서 그 남자는 자기가 그날 밤 두 번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퍼 목사님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혹한의 바다에서 구조된 것이었습니다.
하퍼 목사님이 죽으면서 간절히 소원했던 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삽니까? 우리는 위기에 처할 때나 편안할 때나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그 분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퍼 목사님이 마지막 순간에도 전도를 한 모습은 자신의 죄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오늘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아름다운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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