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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능력과 축복 (눅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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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능력과 축복 (눅 23:32-43)

그래도 말씀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분이 내키지 않아도 용서하라고 하시고,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그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여러 변명과 이유를 대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순종해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내가 내세우는 변명은 남을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자기중심적인 변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혼하는 부부를 보십시오. 오해에서 시작되어 감정싸움으로 발전해서 이혼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부부는 통닭 때문에 이혼한 부부도 있었습니다. 통닭을 먹을 때 남편은 자기가 좋아하는 날개 부위를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리 부위를 좋아하는 아내는 남편이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사랑을 오해하게 만들고 결국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살면서 그런 오해가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따라 행동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나의 구세주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명령에 “예! 용서하겠습니다!”라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특히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어 그 기도가 응답받기를 원하는 분들은 반드시 내 주위에 용서할 대상이 없는가를 살펴서 먼저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없으면 기도응답도 막히기 때문입니다.

4. 상처를 잘 잊어야 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은 잘못된 일을 금방 잊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군중들의 악한 행동도 금방 잊으셨고, 제자들의 배반도 금방 잊으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조롱하던 강도의 행동도 금방 잊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한이 없는 이유는 한이 없이 받은 상처를 잊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상처를 잘 잊어버려야 가능합니다. 

어느 날,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에게 용서해 대해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일곱 번까지 할까요?”라고 마치 큰마음을 가진 것처럼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8장 22절을 보니까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두 번, 세 번, 일곱 번이라고 세기 시작하는 용서는 이미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수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복수할 때 “내가 이제까지 몇 번이나 용서했는지 알아!”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몇 번 용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 거룩한 건망증이 필요합니다. 상처를 잘 잊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상처를 잘 잊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를 배반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저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제 곁을 떠난 사람들도 생각납니다. 내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도 그분 자녀를 위해 기도했고, 내 비전을 위해서 기도하지는 못해도 그분 장래를 위해서 기도했고, 다급한 기도제목이 있으면 “하나님! 제가 못 되는 일이 있어도 그분 문제를 풀어주세요”라고 기도해주던 사람들까지 오해하고 제 곁을 떠나는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인간적으로는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잘 잊고 항상 기뻐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생각하고, 하늘의 상급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상처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잘 잊는 사람에게 용서의 능력을 주시고, 그의 앞날에 복된 미래를 펼쳐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김부남 사건을 기억합니까? 아홉 살 때 자신을 겁탈한 사람을 30년이 지나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겁탈 당했다는 수치와 상처로 30년을 살았습니다. 그 상처를 해결하지 못해서 첫째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결혼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습니다. 그처럼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면 현재를 망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롭고 깨끗한 존재가 됩니다. 김부남 씨에게는 이 복음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복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기억하는 기억력이 없으십니다. 그처럼 우리도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현재의 일로 싸워야지 과거의 그 일을 끄집어내서 “옛날에도 그랬지 않느냐?”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용서한 죄를 재론하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상처를 재론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빨리 과거의 감옥 문을 열고 미래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를 잘 잊고, 그 상처도 하나님의 훈련과정이었음을 믿고 나가면 결국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 용서는 축복의 기초입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힘써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같은 죽게 되지만 용서하면 같이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일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먼저 내가 죽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토양으로 삼아 암세포가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성격도 점차 나빠집니다.

오직 용서만이 사는 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건너가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 은혜가 없고,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고, 응답 받는 기도가 불가능해 집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암뿐만 아니라 고혈압, 당뇨, 두통, 손발 마비 증상, 구토, 위장병, 신경통, 설사 등의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용서가 없으면 몸과 마음도 함께 죽어가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팔이 부러져 병원에서 치료했는데 부러진 팔이 붙질 않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이 환자에게 “이상하게 부러진 팔이 잘 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환자가 말했습니다. “그럴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이 팔로 아내를 심하게 때렸거든요.” 그래서 아내를 데려와 용서한다는 말을 하게 하자 그때야 비로소 팔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 임상결과를 보고 폴 뚜르니에는 말했습니다. “병과 도덕성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질병도 낫기 힘들고, 신앙도 좋아질 수 없고, 축복도 받을 수 없고, 기도 응답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건강이 필요해요.” 그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아니다. 네게 먼저 용서가 필요하다. 먼저 용서해야 네게 치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용서는 신앙의 백미이고 축복의 원천입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사실 가정과 교회는 용서의 훈련장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모여 있다보니 때로는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하면 그 사람도 변화됩니다. 주님의 용서하는 기도를 듣고 한 강도가 변화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의 용서의 기도가 우리 배우자를 변화시키고, 우리 자녀와 가정과 교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영적 도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초나라의 장왕이 잔치를 벌이는데 밤에 갑자기 촛불이 꺼졌습니다. 그 순간, 한 신하가 술김에 왕의 애첩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애첩은 엉겁결에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떼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지금 한 신하가 소첩에게 무례한 짓을 해서 제가 그의 갓끈을 잡아떼었으니 그를 잡아 죽이소서!”

이 말을 들은 왕은 영을 내렸습니다. “이제 모든 신하들은 갓끈을 떼라!” 그 명령으로 애첩을 겁탈한 사람은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한 것입니다. 결국 그날 밤 잔치는 끝까지 즐겁게 끝났습니다.

2년 후, 초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이 벌어져 초나라가 연패하여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였을 때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 진나라를 물리쳤습니다. 장왕이 그 장수를 치하하며 그가 누구인지를 묻자 그 장수가 말했습니다. “왕이여! 신은 옛날 대왕의 애첩에게 무례한 짓을 했던 신하입니다. 그때 대왕의 너그러운 관용에 감동하며 항상 대왕의 은혜를 갚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이제 갚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용서하면 용서와 축복의 열매를 내가 받게 됩니다. 다윗은 용서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손만대에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용서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용서하기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아버지가 사업차 뉴욕에 갔다가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상급생에게 맞아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습니다. 귀국 비행기에서 그는 복수심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크리스천이 그가 비행기 안에서 그 문제로 기도하자 자꾸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죄로 인해 내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용서했으니 너도 이번에 십자가를 지고 용서해라.”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비행기 안에서 16시간 동안 마음속에서 수없이 원수를 죽였다가 살렸다가 몸부림을 쳤습니다.

공항에 도착할 무렵, 그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리라고 작정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학교 관계자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부드러운 말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제 아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저도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만 그 아이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곧 그분은 검사에게 아들을 죽인 학생을 관대하게 처분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고, 3천만 원을 아들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습니다.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미국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향수를 뿌려주는 풀꽃 향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용서는 축복받는 가장 위대한 길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지금 원수와 미운 사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성찬을 대하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충심으로 용서함으로 마음의 평안과 축복을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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