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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밖에 주어진 은혜 (왕하 5:1-3,14, 눅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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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주어진 은혜 (왕하 5:1-3,14, 눅 4:27)


하나님 은혜는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성과 논리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본문은 이성과 논리의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람나라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이 나병환자였습니다. 당시 나병은 고치기 힘든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고침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병을 고치는 과정이 아주 신비롭습니다. 

하나님 은혜 - 뜻하지 않은 방법 통해 

나아만은 아람나라 국방장관입니다. 아람나라는 오늘 시리아 다메섹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람어가 공통언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 왕이 신임하는 장수였습니다. 이 사람이 나병환자였습니다. 이 병은 옛날에는 고치기가 힘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당시 나병환자는 가족이나 사회 공동체에서 벗어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격리 생활을(레13:)시켰습니다. 나아만은 외견상으로는 국방장관이었지만 내면으로는 나병환자입니다. 정신적으로 충격이 심했을 것입니다. 밖으로 알려질까봐 혼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려고 노력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게 됩니다. 나아만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어린 여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여종은 보잘 것 없는 노예였습니다. 이 노예가 주인의 지병을 알게 됩니다. 혼자 쉬쉬하며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여종이 마침내 주인에게 선지자 엘리사를 추천합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면 고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주인 장관은 하찮은 노예 여종을 통해 희소식을 듣게 됩니다.

때로 하나님 은혜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통해 주어집니다. 여러분 은 누구를 통해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우연입니까. 누군가와의 만남, 누군가와 나눈 작은 대화 한마디는 참 중요입니다. 그한 마디의 대화로 여기에 나오신 분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부부와의 만남, 가까운 친구와의 만남, 이 교회에 적을 두게 된 사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게 주어지게 됩니다. 오늘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엄 목사는 16살 때 어느 날 동네 교회 부흥회에 참석합니다. 친구 트럭 운전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빌리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오늘 밤 운전대를 맡길 테니 교회 부흥회에 가자는 친구 말을 따라 그 밤 부흥회에 참석합니다. 

모르드개 햄 목사가 로마서 5장8절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첫날은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다음날은 중간 자리로, 그 다음날은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는 회심하였습니다. 4년 뒤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것이 오늘 ‘빌리 그래함’이라는 특출한 부흥사가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후에 고백하기를 “이웃 친구가 그날 밤 내게 트럭 운전대를 잡게 해 주며 부흥회에 가자고 해서 간 그 발걸음이 오늘 나를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뜻하지 않은 통로를 통해 주어집니다. 나아만 장관도 남모를 고민과 아픔을 간직하고 고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아픔과 치유의 안내자가 누구인가 하면 상상도 하지 않았던 잡혀온 노예 여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뜻하지 않은 통로를 통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중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어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 주변 모든 사람은 내게 참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은혜 – 재물로 얻을 수 없다 

주인 나아만 장관은 체면은 말이 아니지만 여종의 말대로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이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데 첫 번째 취한 행동이 엄청난 예물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내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재산을 아낌없이 쓰기로 하였습니다. 본문은 그때 준비한 선물의 종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입니다. 한 달란트의 무게는 34.27kg입니다. 그러니까 은이 342kg, 금이 68kg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은은 3억 4천여만 원이고 금은 40억 8천여만 원입니다. 얼마나 큰 금액입니까. 

오늘 사람들은 재산을 우상처럼 여깁니다. 재산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형제간에 불화를 일으키면서도 재산을 아까워 주지 못합니다. 부자간에도 불화하고 살인까지 하면서도 재산을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도 아까워서 하지 못합니다. 물질은 아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의 질병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씁니다. 내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생명과도 같은 물질을 아낌이 없이 지출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마차에 재물을 가득 싣고 갑니다. 병든 후에 아까움 없이 지출하려고 하지 말고 병들기 전에 아까움 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병든 후에 울고불고 아낌없이 지출해 보아도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고을에 부자 영감이 살았습니다. 그는 지독하게 인색했습니다. 자기의 것은 인색하였고 남의 것은 무자비하게 뺏었습니다.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원님이 그 소리를 듣고 불러 3가지 벌을 내리고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양파 열 개 먹을래, 매 열대 맞을래, 벌금 천 냥 낼래?” 계산을 한 후 가장 쉬운 양파 열개를 먹겠다고 했습니다. 양파 세 개 먹고 눈에서 코에서 눈물과 콧물이 흐르며 입안이 다 헤어져 그만 포기했습니다. 매 10대를 맞겠다고 했습니다. 

매 3대 맞고 기절을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돈 천 냥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진작 돈 천 냥 냈으면 문제는 간단했을 것입니다. 병들기 전에 아낌이 없어야 합니다. 이 나아만이 마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떠납니다. 그 선물을 모으느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물 쓰듯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질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은 너무 물질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영성이 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무실로 어느 여인이 입시생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딸이 모 대학 종교음악과에 원서를 내야 하는데 세례 증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세례 받았느냐고 물으니 안 받았다고 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으니 증서를 떼어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아만 장관이 많은 선물을 싣고 가면서 이만하면 나를 고쳐 주리라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는 돈으로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엘리사 - 나아만의 생각을 수정시켜줌 

나아만이 마차에 선물과 재물을 가득 싣고 가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를 환대하여 주리라, 이스라엘은 아람나라에 비하면 약소국이고 나는 국방장관이니 선지자 엘리사가 쫒아 나와 내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내 몸에 안수하여 병을 고쳐줄 것”(11)이라고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엘리사 집 문밖에 도착하니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환대도 하지 않고(9)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종을 시켜 강에 가서 씻으라고 한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시대에는 나병환자가 고침 받은 후에는 몸을 씻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음 받았다는 상징적 의미의 의식행위(레14:8-9)입니다. 또 하나는 치료를 위한 명령이 아니고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씩 씻으라고 요구한 것은 최대한의 인내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의 요구는 나아만의 교만을 꺾기 위한 선행 조건인 셈입니다. 지금 나아만은 교만합니다. 내다보지도 않고 가서 씻으라 한다고 해서 화를 내고 그냥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거나 은혜 입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은혜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 마음에서 교만한 마음을 몰아내라는 말입니다. 나아만이 교만을 꺾어야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 뜻도 모르고 나아만은 노하였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나아만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대노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요단강 보다 맑은 아바나강이나 바르발강이 있지 아니하냐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분노하여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향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분들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교회 안 나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장관이 와도 주보를 들고 안내하고 예배 때 연보통 들고 다니며 헌금을 거두어야 하고 좀 더 부지런하면 완장을 차고 주차안내도 해야 합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것은 그 마음속에 세상적인 물이 가득 배어서 그렇습니다. 나아만은 순간 모욕감을 느끼고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 나아만은 지금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한 나라의 국방장관이지만 속으로는 나병환자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나병환자인 것을 잊고 있습니다. 내 안에는 지금 추한 나병이 있고 살이 썩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태도를 가지는 한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이런 나아만에게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 – 끝까지 순종하는 자에게 

그때 시중들던 종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 선지자가 더 큰 일을 하라고 해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했는데 왜 하지 않습니까?”(13) 여기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엘리사가 제시한 치료방법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많은 돈을 내라고 했으면 쉽게 냈을 것입니다. 

오늘 가져온 돈이 적으니 더 내라고 했어도 아주 쉽게 응했을 것입니다. 더 큰 수고를 하라 했어도 기꺼이 했을 것입니다. 며칠씩 굶으라고 했어도, 피를 흘리라고 했어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 이것은 너무 쉬웠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너무 어려워도 믿지 않지만 너무 쉬워도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후 후회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여섯 바퀴를 돌았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말씀하신 그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여호수아가 성을 돌기만 하고 있을 때 백성들이 가만히 따르기만 했겠습니까. 뒤에서 온갖 불평불만을 다 했을 것입니다. “성을 무찌르려면 창을 들고 나가 싸워야지 그냥 돌기만 해서 무너지겠는가, 더군다나 6일안 돌았는데도 아무 징조도 조짐도 보이지 않는데 여전히 돌기만 한다고 성이 무너지겠는가.”하고 얼마나 불평을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의 순종의 결과는 마지막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여리고 성은 마지막 일곱째 날에 일곱 번 성을 돌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최후에 몇 사람 남지 않았을 때 그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 여름 방학 때면 교회에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목사님이 일주일 동안 기도하자고 젊은이들과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은혜는 끝나는 마지막 시간이 중요하니 끝까지 인내하고 기도하라.” 5일 동안 밤마다 모여 뜨겁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5일 동안 아무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지치고 한사람씩 낙오되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마지막 날 마지막 밤늦은 시간에 그곳에 성령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 밤에 성령체험을 하였습니다. 놀라웠습니다. 그 날 성령체험자들이 오늘 다 좋은 신앙 지도자들이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 나아만은 기분 나빠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종들이 더 어려운 것도 해야 할 것인데 왜 쉬운 것을 하지 않느냐는 말에 나아만은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요단강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엘리사가 있던 곳은 사마리아로 그곳은 고지대입니다. 나아만은 다시 한참을 내려가서 요단강에 이르러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일곱 번 씻었다는 말은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나병은 사라지고 살결이 어린 아이 살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치유를 체험하였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것은 온전한 순종 덕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적인 기준이나 방법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순종이 중요합니다. 순종의 삶은 기적을 불러오는 수단입니다. 내 사고, 내 생각, 내가 쳐 놓은 선입견, 내가 설정한 경계 그것을 털고 벗어나야 그래야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십니다. 

이 본문이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백성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에게도 주어집니다. 그것이 성경에 깊이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는 하찮은 대상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한 나라의 권세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 사람은 하찮은 노예 여종이었습니다. 내 신분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 여종은 하나님이 이방 나라에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리기 위해 먼저 아람나라에 파송 받은 사람입니다. 나아만의 나병이 고쳐짐으로 이방 세계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선포하신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주인에게 하나님의 이방세계를 향한 섭리와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사건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방세계에 증거되고 있음을 메시지로 주시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병을 고침 받고 다시 엘리사에게 돌아옵니다. 

와서는 조금 전과는 대조적으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알았나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번제와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15,17)라고 고백합니다. 나아만은 진정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진정 순종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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