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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요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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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요 10:11-18)


어느 시대, 어느 공동체이든 지도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할 텐데... 벌써부터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라고 하면 우두머리라는 이미지부터 머리 속에 떠올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도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할 때에 보면 늘 국민을 잘 섬기겠다고 말은 하지만...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장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그런 지도자의 역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예수님이 새로운 모습의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 까닭은 예수님의 섬기는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이 어떤 지도자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그런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다른 지도자들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 상반절) 여기서 예수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이 과연 선한 목자입니까? 다른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선한 목자입니다. 사나운 이리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인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선한 목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에게 있어서 다른 조건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외모나 학벌이나 신분이나 다른 어떤 것도 선한 목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을 빼고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는 좋은 학벌이나 외모나 신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늘 섬김의 리더십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을 독재 군주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나는 ~이다!”라는 표현 양식 자체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는 독특한 표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관복음과 다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는 ~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 양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출애굽기의 표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보여 주는 특이한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하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4장의 기록을 보면 사도들이 심문을 받는 광경이 나옵니다.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해서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이튿날 끌어내어 사람들 앞에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하반절) 그러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기적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았다고 대답하면서 또한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도둑이나 삯꾼은 결코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런 행동, 즉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목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겉과 속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말씀의 뜻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런 권능을 가진 분이 양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군림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자신과 양들이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이 그 아버지의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게 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 섬기는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지극히 작은 손해도 감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뿐 아니라 아직까지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을 위해서도 자신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뛰어다니는 목자가 바로 선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때문에 성경은 분명히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바보 예수』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김병종 화백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그림에 늘 한 방울의 눈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다른 어떤 신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 그 예수님을 가리켜서 김 화백은 바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바보 같으신데 그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똑똑해서 오늘 우리는 주위에서 선한 목자를 찾아보기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누가 누구를 위하여 있습니까? 물론 양을 돌보기 위해서 목자가 일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양의 생명과 목자의 목숨 과연 어느 쪽이 더 소중합니까? 그런데 바보처럼 양의 생명을 선택한 목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는 자신을 가리켜서 선한 목자라고 부릅니다. 진짜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 바보 같은 선택 때문에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고 또한 하늘 기업을 이을 놀라운 소망을 간직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선한 목자 우리 주님이 친히 보여 주신 본을 따라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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