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본질이 가치다 (마 23:13-22)

첨부 1


본질이 가치다 (마 23:13-22)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이 시대를 가리켜 흔히 “가치관의 혼돈 시대” 혹은 “가치관이 顚倒된 시대”라 하고, 또는 “가치관을 상실한 시대”라 말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어느 백화점에 원숭이 한 마리가 들어가서 가격표를 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100만 원짜리가 10만원이 되고, 10만 원짜리가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손님들은 그것을 모른 체 오직 가격표만 보고 가치가 전도된 물건을 사가지고 갔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이처럼 가치가 혼란스럽게 전도되어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크리스천 센추리’ 라고 하는 잡지에 ‘뒤틀린 가치관’ 이라는 특집이 실린 적이 있는데, 그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우상화되었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한 시간 노래를 부른 대가는 12만 5천 달러라고 하였습니다. 그 금액은 미국 대통령이 1년 동안 받는 월급이요, 미국 대법원장의 연봉의 3배가 되는 액수요, 3천명의 피난민을 구제할 수 있는 돈이 된다고 했습니다. 

몇 해 전 미국 교포 이승희 라는 누드모델은 불과 며칠 동안 한국을 방문하여 20억을 벌어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그 돈은 우리나라 대통령 4년 동안의 월급 총액보다 더 많은 액수일 것입니다. 현대인은 생명 없는 일, 무가치한 일에 많은 것을 지불하고, 가장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무시하는 가치관의 혼돈 속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본질이 가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는 중에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마 23장은 고난주간의 셋째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받지 말라고 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켜 표리부동한 자라 또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질타를 당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는 것도,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외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경문’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양피지 조각을 말하며, ‘옷술’이란 옷단 귀에 술을 붙여 유대인이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여 방종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을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과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잔치와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대접과 높임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놓고 다투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13절부터-36절까지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곱 가지 화의 선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듣게 된 세 가지 저주의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면서, 그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복음에는 축복과 심판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교만과 위선에 빠져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주님의 저주 선언입니다. 주님의 저주는 마태복음에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일부 사본에는 13절의 내용이 14절에 기록되어 있고, 13절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 중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주님의 저주는 모두 여덟 가지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팔화는 산상 수훈의 팔복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마태가 팔복을 염두에 두고 팔화를 말했다면, 여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양면성입니다. 즉 복음은 그것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복을 가져다주는 근거가 되지만, 반대로 복음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이러한 양면성은 예수님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눅 2:3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흥하게 하거나 패하게 하는 표적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하는 구주가 되시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패망의 거침돌이 되신다는 듯입니다. 그래서 요 3:36절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주신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의 복음도, 그것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도리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이러한 양면성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와 복음을 소중히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의 한 측면인 구원과 영생뿐만 아니라, 다른 한 측면인 심판과 저주도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배척하지 말고 영접하도록 적극적으로 열심히 전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영적 지도자와 성도의 타락은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1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천국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왜곡하여, 조상들의 유전을 율법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정신에서 떠난 삶을 살도록 만들었으며, 자기들도 말씀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1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로의 개종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얻은 개종자들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지옥’이란 ‘게엔나’에서 온 말로, ‘게엔나’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흰놈의 골짜기를 가리키는 명칭인데, 그곳에서 우상 숭배자들은 사람을 불에 태워 몰록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쳤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곳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후로 그곳은 모는 종류의 쓰레기와, 죽은 동물, 심지어 매장되지 않은 범죄자들의 시체가 던져져 타오르는 곳으로 변하여 갔습니다. 악취를 품으며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그곳은, 최후 심판 이후에 악인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을 상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지옥 자식이란 흰놈의 골짜기에 던져져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에 태워지는 사람처럼, 혹은 최후 심판 때에 지옥에서 형벌 받는 사람처럼 ‘멸망에 처해질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렇듯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선포 받은 이유는, 그들이 ‘모세의 자리’인 율법의 선생의 지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까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적 지도자들이 타락했을 때의 심각한 결과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은 일반 사람이 타락할 경우에 비해,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일반 사람의 타락은 대개 그 한 사람이나,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몇몇 사람에게만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의 타락은, 그 자신은 물론 그의 가르침을 받는 구성원 전체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타락하여 잘못된 이단설을 퍼트리면, 그 교회에 속한 성도 전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적 지도자들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 된 자들은 늘 자신을 살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타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향기로 부름 받은 성도들도 말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언행은 때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배척하게 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은 다 같이 천국 열쇠를 가진 사람들로서, 다른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할지언정, 천국 문을 닫는 잘못을 범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16-19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는 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고 했습니다. 

‘눈 먼 인도자여’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라는 책망은, 하나님보다는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며,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맹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에 어두운 사람들의 길을 안내하는 자로 자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맹인이 맹인의 길잡이가 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전과 성전 금 가운데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또한 제단과 그 제단 위의 예물 가운데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주님께서는 성전의 금보다는 성전이, 그리고 제단의 예물보다는 제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제단보다도 그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더 중시하도록 오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까지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물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거꾸로 보게 된 것은, 그들이 진정한 말씀 위에 기초하지 못하고 재물과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뒤집힌 가치관을 가지고 진리를 오도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주님께서 통렬하게 책망하시며 저주하셨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가리켜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과 물질을 척도로 하여 평가하며,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인격을 지닌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얼마나 시장 가치를 지녔는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바로 이러한 물질주의로 사람을 현혹하여,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이 뒤집혀진 가치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무엇이 진정 중요하고 영원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금과 예물보다는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과 성전이, 그리고 그 성전을 성전 되게 만드신 하나님이 더욱 소중함을 일깨우셨던 것처럼, 오늘날 돈이 되는 것이라면 정조와 영혼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팔아넘기는 이 세태 속에서, 사람에게 돈과 물질보다 더욱 귀하고 영원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사람들은 온통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립니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에게 음식을 먹여 살리는 것, 전쟁을 중단하는 것,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것들이 나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그녀의 저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서 한 말입니다. 본질적인 것을 택하려면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이랜드 그룹의 박성수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결정과 선택을 할 때, 그 배후에는 그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행동을 할 때는 그의 진정한 가치관이 드러납니다. 행동을 바꾸려 하면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여도 행동이 바뀌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둘 증의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사람들의 가치관인 이성적 사고, 경험적 사고, 그리스적 사고와, 하나님의 가치관인 성경말씀, 히브리적 사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고,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 내 가치관을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가치관이 세상의 것으로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1)몸보다는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육신은 잠깐 있다가 늙고 시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고, 영혼은 지금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것입니다. 

2)금생보다 영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라야 고작해서 100년 안팎이지만, 하나님나라는 영원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릭 위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기와 지금’이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에 비추어 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신의 모든 삶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그리고 제단보다 제단위의 예물을 더 중시하는 잘못을 범함으로 주님께로부터 저주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인 것입니다. 시 39:4-7에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와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분요하며, 재물을 취하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솔로몬의 허사가를 아십니까? 그림자와 같은 것을 붙잡으려고 일생을 허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초로인생이요, 안개 인생이요, 화살 같은 인생이요, 일장춘몽과도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림자도 꿈도 실체가 아니고 현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는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대학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제자대학 최고의 행복은 인생의 최고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고, 인생 최고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고, 일꾼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재생산 사역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인생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