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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롭다 함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롬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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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다 함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롬 8:31-36)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공로로 받는다, 죄 사함은 은혜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 이런 가르침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런 가르침은 은혜와 믿음의 역할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나중에 가야 알 것이지만 축복은 당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돈 · 건강 · 자녀의 성공 · 가정의 평강, 이런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원과 죄 사함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지금 나에게 당장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앙의 가르침을 필요로 합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솔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교회가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빠진 이유는 구원의 원리를 몰라서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고 축복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누가 행함 쪽으로 기울지 않겠습니까. 은혜라는 것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사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판매원이 물건은 거저로 주는데 부속품은 이후에 두고두고 돈 내고 사야 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핸드폰 매장에서 기기는 공짜로 주는데 약정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결국은 기기 값을 다 뽑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문을 처음 구독할 때도 경품을 주지만 약정제도를 통해서 다 뽑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거저라는 것은 손님을 끌기위한 꼼수에 불과하고 결국은 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교회도 구원은 공짜인데 축복은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결국은 신앙 패키지 자체를 값비싼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기나 마찬가지에요. 물론 그것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일부러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본인들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본인들도 복음의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우리에게 더 호소력이 있느냐? 더 설득력이 있느냐?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심는 대로 거둔다, 인생은 사람하기 나름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 이런 식으로 인생은 사람이 행하기 나름이다 라는 공로주의, 행함에 위주한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은혜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아주 생소합니다. 잘 납득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뭔가 꼼수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세상 모든 종교가 율법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 간다.’ 이런 유의 사상이 모든 종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업이라는 말로 그것을 표현하고 그 이외의 종교도 용어는 다르지만 같은 사상을 가르칩니다. 왜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합니까. 그 이유는 본래적 율법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느냐. 예수 안 믿더라도 착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근본에 있는 사상은 공로주의 · 율법주의 사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행한 대로 결과를 거둔다는 생각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율법주의 적으로 들리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가 혼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이유는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급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픈 부분을 누르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사람은 고통이 심해질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무엇을 내게 원하십니까. 내가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뭔가 거래를 제안합니다. ‘내가 이것을 내놓으면 하나님이 뭔가를 주시겠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려만 주시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도와주시면 충성하겠습니다. 건져주시면 신학교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뭔가 하나님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마틴 루터가 젊었을 때 친구와 등산을 갔다가 번개가 떨어져서 자기 친구가 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가 부르짖었습니다. ‘살려주시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강력한 본능이고 이런 본능을 가진 사람에게 행함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은 생소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답변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인가?
첫째로 인간의 실존적인 거래와 부르짖음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고 그 대가로 의로움을 주시고 복을 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져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께 무얼 드릴 수 있고, 드린들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고 거래에 응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젊은 마틴 루터가 ‘살려주시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할 때 하나님이 ‘어이구 고마워라! 일찍 그렇게 할 걸.’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창고에는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의 서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처치 곤란한 물건들이에요. 

로마서 11장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이에요.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 Who has ever given to God, that he should repay him?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애쓰고 노력하신 것이 무엇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드리면 그 대가로 구원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베풀지 않으면 사람은 도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 말씀 중에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이냐? 예수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인용하다보면 별의별 교리를 다 만들 수 있지만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성경 전체의 교훈을 봐야 됩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단과 사이비가 성경을 많이 인용하지만 그들은 한 구절, 한 구절을 강조해서 그것으로 교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지 않으면 한 구절의 오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위를 강조하셨다면 예수님 우편 강도는 무슨 행위를 했길래 낙원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그가 죽기 직전에 한 말은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뿐이었는데 그가 무슨 행위를 했길래 낙원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행함을 갖고 따지자면 바리새인들을 따를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사람들은 로마백부장, 스로보니게 여인,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 바디매오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행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무슨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칭찬하신 이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고 그를 맞아주고 잔치를 벌여주었는데 탕자가 무슨 잘한 일이 있다고 아버지가 기뻐합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가 기뻐하는 이유가 양이 착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양이 목자를 찾았습니까. 목자가 양을 찾았지요. 동전이 주인을 찾았습니까. 주인이 동전을 찾고 기뻐했지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만을 인용하면 어떤 교리도 주장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사실이에요.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의로 여겨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는데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믿음뿐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의 본성, 세상의 종교가 율법적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그러기에 기독교를 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계시.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대학생 선교회가 전도할 때 사용하는 책자를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는데 사람이 저마다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다리를 만들고 탑을 쌓습니다. 종교 · 철학 · 지식 · 선행 이런 다리와 탑을 쌓는데 어느 것도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다리를 만들어 사람에게 내려오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공로를 세워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사람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내 돈 주고 물건을 사는데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할 필요 없지요. 오히려 직원이 나에게 고마워해야지요. 내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데 내가 왜 고맙다고 말합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공을 세워서 대가로 구원을 받는다면 뭣 하러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뭣 하러 하나님을 자랑하겠습니까. 나를 자랑하고 내 공로를 자랑하고 내 의를 자랑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기독교의 진리와 멀리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면 뭣 하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은 그 방법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자기 공로를 의지하고 자기의 선행을 의지하려는 자는 예수님 이외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인데 예수님 말씀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죗값을 예수님이 대신 지불하신 것입니다. 대신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데 그건 내가 수긍하겠는데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는 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어봐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든 축복을 받은 것이든 그의 행함 때문이 아니고 그의 믿음 때문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에 모든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실 때의 그 모든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인간이 실존적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모든 것에 포함돼 있습니다. 건강, 물질, 가정의 화평, 자녀의 미래, 성공이든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모든 것에 담겨져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될 단어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무엇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말이고 거저 주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가성이 아니에요.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은혜로 말미암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얻는 것도 은사입니다. 이것도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행함에 좌우된다면 은사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은사로 받든 행함으로 받든 나는 별로 못 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안 사랑하는 거냐? 이 진리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거냐?’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에 주목해야 될 것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이것이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실 때 아들과 함께 주십니다. 

그 아들 안에 이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도 있고 이 모든 것도 따라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없는 성공, 예수님이 없는 축복, 예수님이 없는 번영, 예수님이 없는 지식, 예수님이 없는 경제발전, 예수님이 없는 명예, 예수님이 없는 학벌, 예수님이 없는 어떤 것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물질,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명예,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학벌, 어떤 것이든 예수님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아니면 그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아들과 함께 주셔야 됩니다. 모든 좋은 선물은 예수님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으면 이 모든 것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은사로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이 모든 것도 은사로 예수님과 함께 우리에게 주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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