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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 아이 (마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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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 (마 18:1-10)


어제는 어린이 날이었고 오늘은 교회가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어린이날과 어린이 주일의 유례를 먼저 살펴보자면 1856년 6월 둘째 주일에 미국의 메사추세츠주에 있는 유니버셜리스트 (Universalist)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H.Leomald)목사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모아 놓고 어린이들에게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리고, 부모들에게는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훈련시키고, 어른들을 재훈련시키려는 목적으로 어린이주일로 생겨났습니다.

특히 스토아 목사는 주일날 성찬 탁상을 예쁜 리본과 꽃다발로 장식했던 일곱 살된 어린이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입맞추고 그 어린이들의 생일과 유아세례 받은 날짜를 목사 자신이 서명한 성경책에 기입하여 꽃다발과 함께 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꽃주일 행사는 미국만이 아니라 복음의 씨가 뿌려지는 곳마다 지켜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23년 고 방정환 선생의 열의있는 주장으로 어린이 명절을 해마다 지켰으나, 일제 탄압으로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에 다시금 우리나라 국회가 1956년에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1957년에는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1957년 5월 첫 주일을 어린이주일(꽃주일)로 정하고 1964년 전국 기독교교육 대회에서 <기독교 어린이 헌장>을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주일은 무엇을 말하는 주일일까요? 어린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날이기도 합니다. 경희대학교 서정범 교수가 펴낸 수수께끼 별곡이라는 책자가 있는데 부자지간에 짤막한 대화 한 토막입니다. 목욕탕에 들어간 아버지가 “아 시원하다 너도 들어오너라” 그랬더니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정말로 시원해요?” 
“그렇고말고” 
아들이 탕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너무 뜨거운지라 얼른 뛰쳐나오면서 아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화가 치밀었습니다. 주먹으로 한 대 치려고 하니까 그 때 아들이 한 마디 합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기가 막힌 말입니다. 
“때려라 때려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 
그냥 웃어넘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부모 된 내가 먼저 주님 앞에 순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나는 주님 앞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는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슨 순종의 열매가 가정에서 맺힐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내 자녀들이 정직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경건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경건하게 살면서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잠언이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 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 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이해가 곤란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키도 작고 배운 것도 없고, 어른들에 비하여 권세도 없는데 천국에서는 어린이가 크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큰 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큰 자라는 뜻입니다. 눅 18:14에서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높이려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방법을 가리지 않아 결과 높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재롱을 부리고, 교만을 피우며, 고함을 지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빠 이름이 뭐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우리 아빠 이름은 여보예요” 
“그럼 너의 엄마 이름은 뭐니?” 
“엄마 이름은 당신이래요.” 
얼마나 진실한 대답입니까?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는 덕망이 있고 정의로운 황제였습니다. 어느 날 황제가 평민으로 가장하고 거리로 민중시찰에 나섰습니다. 낮 설은 길인지라 갈림길에서 지나가는 군인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태도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미안하지만 계급이 어떻게 되는지요?” 
군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 자네가 한 번 맞춰보게?” 
그러니까 황제가 묻습니다. 
“상사이십니까?” “아니.” “그럼 소위이신가요?” “아니. 나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는가?” “그럼 중위신가요?” 
역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대위신지요?” 

“맞았네. 내가 육군 대위네”하면서 그 대위가 굉장히 큰 벼슬인 것처럼 어깨를 으스댔습니다. 황제는 미소를 머금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던 대위가 저 사람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이 여겨진지라 “여보게” 불렀습니다. 
“혹시 자네도 군인인가?” “예.” “그러면 계급이 무엇인가?” 
아무 말없이 있었더니 “상사인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소위인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중위인가?”
역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말씨가 좀 달라졌습니다. 

“그럼 당신도 대위인가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는 몸이 오싹해집니다. 
“그러면 소령이십니까?”
역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중령, 대령, 심지어는 대장까지 올라가면서 몸이 떨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원수이십니까?” 

그런데 순간 황제의 얼굴이 필름처럼 스쳐갔습니다. “아차”하면서 무릎을 바닥에 꿇으면서 “황제 각하 용서하옵소서.”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겸손하게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거스틴은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둘째, 셋째 가는 미덕이라”고 했고 성경에서도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국의 잣대에는 역설적 입니다. 발뒤꿈치를 높이 들고 높아지려는 자를 자로 재면 도리어 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무릎을 꿇고 낮아지는 자를 잣대로 재면 높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겸손의 덕을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누가 겸손의 미덕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황제의 명령으로 호적을 신고하러 고향으로 가던 중 베들레헴 산골에서 그나마 여관에 빈방조차 없어서 여관에 딸려 있는 외양간에서 태어나셔서 구유를 침대 삼아 뉘일 정도로 낮아지셨습니다. 하늘 보좌와 구유를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자기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이십니다. 마 20:28의 말씀처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그것이 단지 몸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11:29~ 30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부터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온유한 척 겸손한 척 하신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유하신 분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신 분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신 분이십니다. 

마 25장에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에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르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임금이 대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보십시오. 얼마나 겸손하신가 하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실 정도로 지극히 작은 자와 자기를 동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지극히 작은 자로 여길 정도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대접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보답할만한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길 정도로 예수님은 마음부터가 겸손하셨습니다. 

우리네가 마음 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누가 나를 무시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나를 무시할 수가 있느냐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섬김 받기를 원한다는 뜻도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접받고 싶다면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대접하라고 하시냐면 지극히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자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늘의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것도 내가 먼저 섬기려고 합니까? 아니요. 우리는 먼저 누가 나를 섬겨주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그런 나를 섬겨준다고 할 때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그런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나만 해야 되느냐 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느냐?”고 탓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섬기고 내가 먼저 봉사하고 내가 먼저 service하는 그런 삶을 기뻐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고, 지금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겸손으로 넘치는 믿음으로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천국에는 누가 가나?”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린 아이들은 그냥 천국에 통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결단코 학벌로는 못 들어갑니다. 권세로도 못 들어갑니다. 장관이니까 대통령이니까 그래서 봐주는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 어린이교회학교 어린이들의 노래 가운데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입니까? 어린 아이를 닮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를 닮은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어린 아이에게는 여러 특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꼬집을 수 있습니다. 단순성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믿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는 믿음은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고, 계산하는 믿음도 아니고, 따지는 믿음도 아닙니다. 머리가 아프게 복잡한 믿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요 3:16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 그대로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냥 거듭날 수 있고, 천국 갈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가는 믿음은 소박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페인트칠한 믿음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 같은 믿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돌이켜”라는 말은 “돌아선다, 변화된다,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부터의 돌이킴 즉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 돌아서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어찌했습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네가 곤고한 자요 가련한 자요 가난한 자요 눈 먼 자요 벌거벗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돌이켜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시간이 바로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돌이키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걷고 있는 그 길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다고 느끼면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계획하는 것이 죄와 관계있는 것이라면 미루지 말고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못한 믿음이면 돌이켜 바른 믿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돌이켜야 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가 불량 식품을 청소년들에게 팝니까? 어른들입니다. 누가 술, 담배, 약물을 청소년들에게 팔고 있습니까? 역시 어른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돌이켜야 합니다. 어른들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런데 내 가족 가운데 믿음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하면서 믿음에서 떠나 있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10년을 믿었습니까? 아니면 20, 30년을 믿었습니까? 그런데 그 믿음 속에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까? 그들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쉬지 못하시도록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큼 역사하시고 우리가 기도한 만큼 일하신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에게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계십니까?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눈물을 뿌려 기도하십니까? 그저 내 몸 아픈 것을 위해서는 눈물을 뿌리고 내 자식 잘 되기 위해서 눈물 뿌리며 가진 것이 없어 풍족하게 채움 받기를 위해서는 눈물을 뿌려 기도하면서 “주님 아파서 힘듭니다. 주님 자식이 바로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먹고 살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기도하면서 진정 그 생명을 위해 그 생명이 풍성한 생명이 되기를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약 2:20이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고 했습니다. 마 23:1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날마다 자녀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믿음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 삶에는 근심 걱정으로만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일마다 때마다 감사하십니까? 다른 것은 주지 못해도 오직 한 가지 믿음만은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수고하고 그렇게 가르치며 그렇게 본이 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흔히 붕어빵이라고 합니다.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웁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가 보는 쪽을 그대로 봅니다. 부모가 말하는 대로 따라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어머니의 각본이라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심어주십니까?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 살도록 믿음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항상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집에서 쫓겨났을 때 브엘세바 광야를 헤매다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래 하갈이 아이로부터 화살 하나 쏠 만한 거리만큼 떨어져 마주보고 웁니다. 이제 죽게 되었다고 통곡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말씀합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어머니는 울고 있는데 아이는 기도합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합니까? 아이는 늘상 아버지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길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앞서 천국의 문 앞에 버티어 서 있으면서 들어오려는 어린 아이를 막았던 죄가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이 무슨 날입니까? 어린이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돌이켜 보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딤후 1:5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하신 대로 우리 자녀들에게 천금보다도 귀한 믿음을 물려줄 수 있는 귀한 부모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천국으로 인도할 자는 누구인가?”입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인도해야 합니다. 바로 내가 전도자이어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서 깊은 물에 빠뜨려져 죽게 되는 영혼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실족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초라하다, 작다, 그리고 코흘리개다. 시끄럽게 하고 예배를 방해한다.’ 그래서 업신여기고 교회당 밖으로 나가라고 쫓을 때도 있고, 공부하라 학원가라는 말은 열심히 하면서도 성경을 가르쳐주는 일을 소홀히 할 때가 있으며,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드리는 일에는 무관심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위해 주일 예배는 쉽게 빠져도 되는 날로 아이들이 생각하게끔 만드는 이러한 일들이 다 어린 아이들을 실족케 하는 일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한 영혼을 위하여 천사까지 동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히 1:14은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그 천사들이 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불쌍하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아이는 좋은 믿음의 부모로 인해 행복하다고 하겠습니까?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일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너희들이 무엇을 아느냐고 하지 마세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마 18:14은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녀 가운데에 하나라도 꼴찌 하나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작은아들이니까 버려두라” 하지 않았습니다. “딸자식이니까 무관심 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속 썩이는 자식이니 내버려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히 여겨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만 귀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정말로 자녀가 귀하다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기뻐하도록 가르치십시오. 그들을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하십시오. 기도 없이 어찌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겠고 기도 없이 어찌 자녀들의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자녀들을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하십시오. 이스라엘의 부모들처럼 자녀들의 잠자리를 돌보며 날마다 축복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본을 자녀들 앞에 보이십시오. 우리의 말과 생각이 항상 은혜로 소금치듯 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의 승리자가 다 되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지금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격려하여 주십시오. “공부는 못해도 좋다  꼴지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광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한 마디 더 붙여야 합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다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못해도 좋습니다. 자녀들에게 먼저 믿음을 가르치십시오. 함께 예배 하기를 즐겨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건 항상 믿음 우선주의 하나님 우선주의의 삶을 사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부모를 본받아 믿음 안에 온전히 서는 자요 자녀들 천대까지 이르도록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대로 믿음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와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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