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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② (막 9: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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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② (막 9:33-42)


I. 민족의 아픔과 함께한 한국교회

저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쉽고도 익숙한 주제가 있는가 하면 
어렵고도 낯선 주제가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는 설교는 제 설교의 중심주제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나 성령님의 능력에 관한 설교는 자신이 있고 전할 때 마다 제게 힘 이 됩니다. 
∙ 한국교회부흥과 한민족의 사명에 관한 설교를 하면 언제나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납니다. 
∙ 가난, 고통, 시련, 환란을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하라는 믿음의 은사에 관한 설교를 하면 나 스스로 큰 힘을 얻습니다. 

- 반면 세계열방을 품는 선교적인 비전에 관한 설교는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 가난한 자, 약한 자를 품고 섬기는 긍휼사역에 관한 설교는 왠지 어색하고 서툽니다. 

그러나 내게 은사가 부족하고 서툴다고 하여 그 귀한 주제들을 아예 외면한다면 편협된 설교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가난한자, 북한동포, 다음세대, 병든자, 다문화 가족 등 소외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설교도 종종은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두 번째로 「기독교-작은자를 섬기는 종교」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이웃의 필요에 민감한 종교였습니다. 복음이 한국땅에 전해지던 그 초기부터 한국교회는 민족의 아픔, 백성들의 고통을 품고 치유하는 종교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나라잃은 서러움에 온백성이 울고 있을 때에 그들의 아픔 곁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3.1 만세운동, 독립운동에 앞장 서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죽어야 할 자리에 기독교 신앙인들이 먼저 뛰어들어 순교의 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해방이후 가난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예수 안에 희망과 부요를 전해주었습니다.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에 앞장섰습니다.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하는 기독교교회로부터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 1970년대초 한국교회 성도는 150만명 정도였습니다. 제가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고 한소망교회를 개척하던 1990년대초엔 무려 6배가 성장하며 한국교회는 성도 900만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부터 그후 20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한명도 늘어나지 못하고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약 850만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 지난 20년 동안 한국교회는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누리는 종교로 인식이 되어졌습니다.
∙ 호감공동체에서 비호감공동체로 전락했습니다.
∙ 희망의 종교는 실망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 한국교회는 다시 희망이 되는 종교, 다시 섬기는 종교, 다시 민족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는 종교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II. 작은자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성경의 이 말씀은 단순한 과장법이 아닙니다. 
농담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왜 주님께서 이토록 엄청난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작은 자들 -
가난한자, 어린이, 병든자, 소외된자 그리고 공동체안의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지도자, 리더, 교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또 한편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일 마태복음과 사실 같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36절과 37절에서는 “어린아이”라고 하다가 
42절에서는 작은 자라는 말로 바뀌어 집니다. 

여기 작은자는 어린아이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를 말합니다. 
셀 목장안에서 새가족, 어린 신자가 작은자입니다. 
사회속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작은자입니다.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들이 작은자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제자 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절대로 계급이 아닙니다. 권한이 아닙니다. 
잘 섬기라고 주시는 기회입니다. 책임입니다. 
작은자를 잘 섬겨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 주신 기회라는 말입니다.

37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그대가 진정 천국에서 큰 자이기를 원하면 연약한 자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연약한 지체들을 천국의 백성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작은자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라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천국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대할 때 하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가 어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천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늘의 천사를 내게 보내준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천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셀목장 안에서 서로 주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을 예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교인은 목사를 주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줍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 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리더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작은 자들을 소중하게 영접하는 일이요. 
둘째는 실족케 하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연약한 자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룬 마태복음 18장 10절에 퍽 재미있는 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들의 천사들”이란 말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수호천사를 보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우리 가정안에서, 혹은 셀 목장안에서 혹은 사회속에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지킬 때 우리는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양육할 때 우리는 하늘의 존재,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셀 목장안에서 어리고 연약한 가족을 잘 섬기고 양육해 갈 때 우리는 교회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약한자, 장애인들을 섬길 때 이 사회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직식은 교회내 천사임명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사 역할을 하지 못하여 저들을 실족케 한다면 우리는 마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로버트 그린리프였습니다. 그는 서번트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 ‘서번트 리더가 되는 것’이란 책에서 헤르만 헷세의 소설 ‘동방순례’를 인용하였습니다. 

동방으로 여행하는 순례단 중에 레오(Leo)라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자고 걷는 동안 그는 언제나 묵묵히 섬기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이 힘들어 할때 노래를 불러주고 휘파람을 불면서 지친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레오는 사람들을 마주치기만 하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레오가 일행 중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라진 것입니다. 순례자들은 그가 해를 당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났습니다. 여행길은 기쁘지 않았고 서로 다투기 시작하여 마침내 순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레오가 순례단을 이끈 진정한 리더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 후일 그들이 레오를 만나 발견한 충격적 사실은 그가 하인이 아니라 그들을 파송한 교단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레오의 리더십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역사는 섬김의 기적을 연출할 리더를 찾습니다. 섬김이 리더를 만듭니다. 섬김만이 기적의 리더십을 세우는 것입니다. 

III. 발 씻기는 종교

역시 같은 내용을 다룬 누가복음에 의하면 세족 목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임금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오른편 왼편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이것이 시비거리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오른편이야 당연히 베드로가 앉겠지. 그러고 나면 야고보와 요한 가운데 한 사람이 왼편에 앉을 터인데 당사자인 요한과 야고보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가운데 누가 앉을까? 그의 어머니는 이런 생각까지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만 없어지면’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이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서 베드로를 제거하고 요한과 야고보를 오른편, 왼편에 앉혀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 가슴속에 불평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거 뭐야. 누구는 인삼 뿌리 먹고 누구는 무 뿌리 먹었냐? 
제자로서 똑같이 3년동안 따라 다녔는데 우리는 뭐냐?’ 
아름다운 제자 공동체가 한순간에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가 하도 다부지게 매달리니까 야고보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네가 마실 수 있겠느냐” 
마침 예수님 앞에 포도주가 한잔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 마시라는 얘기인줄 알고 “네. 제가 마시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시려고 한 잔은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잔은 십자가의 잔이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대로 너무나 일찍 아픈 죽음을 맛본 제자가 야고보가 된 것이지요.

걷던 길은 마쳐지고 식사하기 위해 한 집에 들어갑니다. 그 집에 종이 있으면 손님들의 발을 다 씻어 주었을 텐데 종이 없습니다. 종이 없을 때는 동행인 가운데에 누군가 발을 씻겨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낮에 있었던 시비거리 때문에 저마다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최고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꼴찌는 아니다’ 그래서 아무도 발을 닦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발을 닦겠다고 나서는 제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 공동체 가운데 그가 자연히 꼴찌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예수님이 낮아져 오히려 섬겼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 나라에는 샌달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먼지도 많습니다. 맨발로 다니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고 허리에 수건을 둘러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방에 들여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고 사복음서를 잘 연구해 보면 제자들이 그냥 더러운 발로 방안에 들어갔습니다. 방 가운데 냄새나는 발로 두 다리 쭉 뻗었습니다. 거기에 식탁이 준비되어졌습니다. 한참 식사하다가 예수님께서 자리에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가 좀 있으면 죽을 거야. 너희들 발 내놔. 내가 발 씻어 줄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빵을 먹다가 잔을 마시다가 그대로 놔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는 “저녁 먹는 중”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에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서 방안에 들어가기가 민망해서 낮에 길을 걸어다니다 보니까 발에 냄새가 나서 발을 씻어 주신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냄새나는 모습 그대로 방에 들어갔습니다. 식탁이 준비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목에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만 있으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생각하고 제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의 왕이 될텐데. 우리가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멋진 선택인가? 

내가 오른 편에 앉아야지.’ 저마다 자리시샘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빙그레 웃고 있는 제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이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사실을 가롯 유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팔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올라가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그뿐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차례대로 잡혀서 죽을 거야. 그런데 나 혼자 살 수 있어.’ 
주머니 속에 은 삼십냥을 만지작 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범한 삼십냥이 아닙니다. 그걸 보여주면 가롯 유다의 생명은 제사장으로부터 보장된 “생명권리증”이었습니다.

이쯤되니 예수님께서 빵이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만찬을 즐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포도주가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가 않는 것입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내가 떠난 다음에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갈까? 기독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를 섬길 때 어떤 정신을 가지고 세우고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발씻는 행위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결론입니다. 
기독교는 발씻기는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이 주인의 발을 닦는 종교가 아니고 주인이 종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배운 자가 못배운 자들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IV. 포기하는 종교

내 권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나의 위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내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고 종이 되어 내려가 발 씻기는 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수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청년부 지도 교역자가 방글라데시에 선교사로 파송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전문의 수련을 다 마치고 개업을 하든지 큰 병원에 취직을 할 판입니다. 그런데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목사님께서 방글라데시에 가는 그 자리에서 결단합니다. 

“목사님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목사님 청소도 하고 목사님 이불도 개고 그리고 내가 의사이니만큼 그 나라 사람을 진료도 하고 약도 지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 나서는 겁니다. 한국에서 얼마든지 돈 벌 수 있고 잘난 아가씨 만나서 결혼할 수도 있고 그만하면 자기 위치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부모가 그를 의사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고 부모들이 그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이제 부모들이 부귀영화을 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방글라데시에 청소하러 가겠다는 겁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발을 닦으러 가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발씻기는 종교이니라. 밀알이 떨어져 죽는 종교이니라.

해방이후에 대한민국 미국 유학생 1호를 기록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진전이 되는데 아침 신문에 고국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북한 괴뢰군이 쳐들어 왔다는 거예요. 그는 논문을 쓰다말고 지도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교수님, 제 조국에 지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박사학위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몇 달이면 학위가 나올텐데. 조금만 더 참지 그래.” “학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저는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달려와 국방부로 들어갔습니다. 자원 입대를 요청했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군대에서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터로 뛰어 들어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감자를 삶아 먹으며 고아원을 만들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버린 시골 고등학교를 얻어 학생들을 불러모아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숭실대학교에서는 이런 분이 한국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부총장으로 청빙하지요. 그가 기도하고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내가 숭실대학교 부총장으로 가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자리에서 고아들과 더불어서 평생 고무신을 신고, 평생 골덴 바지를 입고, 고아들을 돌보는 것, 그리고 시골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 - 이것이 사명이다 생각하고 평생을 아이들과 더불어 보내게 됩니다. 

그분은 무주 구천동이 고향이지만 경상남도 거창 -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전영창 교장 선생님입니다.

내가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당당히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땀 흘려서 내가 번 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하여 쓰지 아니하고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음을 아는 사람, 나보다 더 필요한 곳에 그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나도 잠 자고,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 먹고 취미생활 즐기고 얼마든지 나를 위해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 일 간단히 정리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흔쾌히 시간을 내려 놓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요 발씻는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문이 막혀 있을 때에 선교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사건이 선교역사에 있습니다. 가는 사람마다 식인종들에게 잡아 먹힙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교를 해야 될 때에 미국에서 파송받은 한 선교사가 몸에 맨체스타 권총 두 자루를 차고 아프리카 땅을 밟았습니다. 그 순간 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토인들이 나타납니다. 총을 뽑아서 겨누었습니다. 땅! 땅! 순식간에 끝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 “나는 저 사람들을 살리러 왔는데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복음 대신 총알을 선물할 수는 없다.”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달려와 선교사를 찔러 죽였고 아마 팔 다리를 뜯어 밥으로 먹었겠지요. 나중에 보니 그 무서운 흉기가 땅에 두 자루나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앞서왔던 백인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저걸로 죽이지 않았던가? 내 부모를 죽였던 그 무서운 흉기가 그 손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심코 방아쇠를 당기자 땅! 총알이 나갑니다. 우리를 죽일 수 있는데 저가 죽었구나. 이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 아프리카 식인종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문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죽일 수 있는 자리에서 죽어지는 것,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내려가 죽는 것 이것이 발 씻기는 종교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교부 크리소스톰의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닦았다고 하십니다.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닦는 종교?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종교,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죠.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발 닦는 종교입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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