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목나무에도 꽃은 핍니다 (민 17:1-13)

첨부 1


고목나무에도 꽃은 핍니다 (민 17:-13)  

< 살면서 높여야 할 지수 >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삶을 보면 그 일생이 특이합니다. 120년을 살면서 40년의 왕궁의 삶, 40년의 광야의 삶, 40년의 소명의 삶으로 칼로 두부를 자르듯 세 토막으로 반듯하게 정리됩니다. 그처럼 모세는 삶도 특이하지만 죽음도 특이합니다. 그는 120세에 죽을 때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습니다(신 34:7).  

성도는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죽을 때 사고나 병으로 죽지 않게 하시고 모세처럼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게 하소서!” 저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님들에게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주소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돌아가실 시간도 없게 하시고 병들어 누워있을 시간도 없게 하소서!”   

저도 저 자신의 죽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2019년까지 네트영어 사전도 만들고, 2023년까지 성경 전권 설교파일 완성하고, 2040년까지 전권 설교파일의 영문판도 완성하고, 40개 이상의 선교연맹 교회를 만들어 국가총회를 구성하고, 더 나아가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후원해야 하기에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저 모세만큼만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오래 살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 모세만큼만 사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실 때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는 꿈을 가지십시오. 모세처럼 건강하게 장수하며 복된 리더의 삶을 살려면 몇 가지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첫째, 비전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모세는 80세에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뚜렷한 꿈과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공적인 교인과 실패하는 교인과의 가장 큰 차이는 뚜렷한 비전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개 성공한 사람을 쫓아가기에 급급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삽니다. 비전을 잘 세우면 그 비전이 자신을 끌어줍니다.

둘째, 거절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영적 리더는 무엇보다 물질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목사가 돈을 추구하면 목회는 얻어먹기 좋아하는 조잡한 직업이 됩니다. 한국에서 얻어먹기만 좋아하는 3부류의 사람이 목사, 경찰서장, 세무서장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셋이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누가 돈을 냈을까요? 아무도 안내서 결국 음식점 주인이 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목사님은 교회 건축을 하는데 돈 생각을 너무 하다가 예배시간에 “찬송가 355원을 부릅시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또한 목회자는 쾌락도 잘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가 힘들어 심심풀이로 당구를 시작했다가 당구에 빠졌습니다. 그 다음부터 기도할 때마다 말씀이 아닌 당구가 떠올랐고 나중에는 성도들의 머리가 당구공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설교도 당구를 치듯이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으로 김집사를 치면 히네루가 걸려 박권사를 때리고 다시 쓰리쿠션으로 이장로를 때리겠지.” 그렇게 때리는 설교를 해서 목회를 거의 망쳤다가 회개하고 다시 목회 잘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심신의 피로를 풀겠다고 바둑을 시작했다가 바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예배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는데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고 앞에는 홍해가 있어서 결국 홍해 앞에서 아다리 되었습니다.” 그처럼 쾌락을 거절하지 못하면 인생이 아다리 되는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리더는 이성과 명예도 잘 거절해야 합니다. 명예심 때문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사탄으로 끝나는 목회자도 꽤 많습니다. 영어로 그런 사람들을 ‘크리스탄’이라고 합니다. 또한 영적인 리더는 자존심도 잘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안식년을 가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가 마침 교회건축이 시작되어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안식년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A 집사가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목사님이 부목사보다 인기 떨어지기 싫어서 안식년을 포기했다.” 그 A 집사가 그렇게 삐친 이유는 근처에 사는 B 집사가 매일 아침마다 보약을 끓여와 목사님을 대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교인은 칭찬하지만 어떤 교인은 질투합니다. 그처럼 시기심으로 B 집사를 미워하다가 목사님에게도 삐친 것입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속 터진다! 어떻게 저렇게 판단력이 없나? 목사가 헌금하려고 안식년을 포기했으면 잘했다고는 못할망정 인기 떨어질까 봐 그랬다는 말을 왜 퍼뜨릴까?” 결국 목사님도 속이 상해서 A 집사가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번 A 집사 쪽은 보지도 않고 반대쪽만 보고 설교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교인명단을 보며 죽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고, 저 사람은 저래서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따지자 나중에는 다 떠나고 사모님만 남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목사님이 마음을 고쳐먹고 자존심이 상해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기회만 생기면 A 집사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는 그 집사가 루머를 퍼뜨린 것을 사과하고 그때부터 거의 매주 소꼬리를 사오며 교회에 충성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자존심도 잘 거절해야 지도력이 생깁니다.  

셋째, 인내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모세는 40살에 인내지수가 제로였습니다. 자기 뜻에 안 맞는다고 홧김에 사람을 때려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얼마나 성질이 급합니까? 결국 그 급한 성질로 왕궁의 삶이 광야의 삶으로 추락했습니다. 그 광야에서 끊임없이 인내 훈련을 하다가 80살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에 모세는 잘 참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인내지수가 높아야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합니다. 

넷째, 기적 기수가 높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으면 기적도 따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총 33번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수아가 7번, 엘리야가 7번, 엘리사가 14번, 모세가 39번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로만 14번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모든 기적은 하나님을 만나 소명 받은 80세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니까 기적지수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려면 기적적인 축복을 구하십시오. 사업의 기적을 구하고 자녀의 기적적인 축복을 구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고 기적을 구하지 말고 좋은 일에 많이 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렇게 기적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모델이 되려고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처럼 선한 목적과 비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살다가 기적적인 축복을 체험하면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그를 통해 영적인 리더십도 나오게 됩니다.
  

< 아론의 싹 난 지팡이 >   

본문을 보면 기적을 통해 모세와 아론이 영적인 리더십을 굳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앞 민수기 16장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에 도전해 일어난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이 나옵니다. 그 반역으로 하나님의 불이 나와 250인을 죽였고 땅이 입을 열어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재물들을 삼켰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다음날 또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는 하나님이 그들을 염병으로 쳤습니다. 그처럼 염병이 휩쓸고 가면서 백성들이 다 죽게 될 상황에서 모세가 아론에게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고 백성들을 위해 속죄의식을 드리라고 하자 아론이 막 달려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향로를 들고 섰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염병이 그쳤지만 이미 14,700명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사건 직후에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을 굳게 하려고 모세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12족장이 지팡이 12개를 취해 그 지팡이에 각각의 이름을 쓰게 하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했습니다(2-3절). 그리고 그 지팡이를 회막 안의 언약궤 앞에 두게 했습니다(4절). 그러면 하나님이 택한 자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할 텐데 그 역사를 통해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을 그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5절).   

그처럼 하나님은 죽은 것과 같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공증하고 지도자에 대한 원망을 그치게 하십니다. 결국 오늘날처럼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처럼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역사와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역사가 우리 분당 샛별 제단에도 나타나야 합니다.  

현재 우리 제단에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겉으로는 고목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섬길 어르신이 많은 것은 엄청난 축복이고 또한 축복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잘 섬기는 일을 어떤 일보다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십계명을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제일 우선적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만큼 그 계명에 충실하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역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전해서 부모님과 어르신들이 희망을 가지고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제단에 속한 어르신들이 큰 꿈과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셔서 제단에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 전권 설교파일도 완성하고, 네트영어도 확산시키고, 딸 교회도 많이 개척하고,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축복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 축복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바로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최대로 섬기는 일입니다. 

지난주에 미국에서 김진태 목사님이 오셔서 오후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이 참석한 것을 보고 엄청난 숫자가 모였다고 했습니다. 연세 80이 넘은 분 한 명이 20살 청년 4명이 모인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처럼 어르신들을 존재감 있게 해드리면서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뒷방에만 계시라고 하지 말고 비전의 중심에 세워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제단이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 고목나무에도 꽃은 핍니다 >  

계속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조치하고 다음날 보니까 정말로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8절).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론의 지팡이가 막 베어낸 살구나무 가지로 만들어서 자체에 남은 생명력으로 그렇게 열매까지 생겼다고 기적을 부인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해석해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을 공증하시려고 그 기적을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다시 각 지파들이 자기 이름이 적힌 지팡이를 취하게 했습니다(9절).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도로 언약궤 앞에 두어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해서 백성들이 더 이상 원망으로 죽는 일이 없게 했습니다(10절). 결국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아론 가문에게 주어질 제사장직에 대한 하나님의 공증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면 준엄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 부활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백성들은 자기들이 죽고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하며 이제 성막에 가까이 가면 다 죽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탄식했습니다(12-13절). 그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를 누구보다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그냥 두고 하나님이 무섭다고 탄식하지 말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생명력이 끊어진 아론의 지팡이에서도 싹이 나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교회는 절망 중에 희망을 만들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역사를 만들어 우리를 어둠 속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복된 교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벧전 2:9).  

요새 한국 종교계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불교계의 큰 스님들이 억대의 도박판을 벌이며 술 먹고 담배 피는 장면이 CCTV에 그대로 찍혀 방영되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스님들 사이에 그런 현상이 만연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계도 부족함은 많지만 적어도 그런 모습은 상상조차 안 됩니다. 잘못된 목사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어느 정도 잘 아는 2-3백 명의 목사님 중에는 한 명도 술 먹고 담배 피고 도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새 한국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톨릭교회가 성장하는 국가입니다. 사람들은 신부님들이 멋지다고 합니다. 왜 멋지냐고 물으니까 “소통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소통을 잘하는 것이냐고 하니까 “보통 사람처럼 술과 담배를 하니까 얼마나 인간적이냐?”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일반 교인들도 술과 담배를 편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에 오면 술 먹고 담배 피는 것을 자신도 조심합니다.  

물론 목사 중에 설교할 때 “술 먹고 담배 피는 사람은 교회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설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술과 담배를 해도 교회에 오라.”고 설교합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교회에 오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술과 담배를 점점 멀리합니다. 그것이 소통이 부족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만큼 무언중에 교회는 비록 잘 실천을 못해도 죄와 멀어지려는 몸짓이 강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요새 어떤 사람은 목사가 여자 성도들을 농락한다고 인터넷에 악의적으로 열심히 퍼뜨리고 다닙니다. 그때 냉철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인터넷 소문만 듣고 교회에 다니면 마치 다 바람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자주 듣는 뻔한 얘기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남편을 사랑하라! 남편을 존중하라!”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바람이 날 가능성이 많을까요? 바람기가 줄 가능성이 많을까요? 사실상 통계를 낼 가치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여자 성도를 유혹한다는데 적어도 목회를 포기한 사람이 아닌 정상 목회자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요새처럼 인터넷 시대에는 그런 일들은 감추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과 목회 전체를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혹의 가능성들을 그런 대로 극복해내는 것입니다.

꽃뱀이 누구를 제일 싫어할까요? 최저생계비로 묵묵히 남을 섬기며 사는 60% 이상의 작은 교회 목사입니다. 나올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형교회의 힘 있는 목사에게는 접근하고 싶겠지만 그 접근이 쉽습니까? 한번 실수하면 전 인생과 목회가 끝나는 그 구렁텅이에 누가 쉽게 빠지겠습니까? 그처럼 꽃뱀에게도 잘 유혹되기 힘든 현실에서 악의적으로 들춰낸 인터넷 사례만 보고 평범한 자신의 아내가 유혹의 중심선상에 설지 모른다는 지극히 확률이 희박한 상상을 왜 할까요?  

문제는 집착입니다. 결국 아내도 남편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되고 남편도 아내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폭넓은 교제와 시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배우자에게 자기 외의 사람과 건전한 만남을 가질 기회를 주고 그런 건전한 만남을 가지면 기뻐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만남이 없으면 건강하게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배우자에게 건전한 만남의 길을 열어주어야 결국 배우자의 행복지수가 높아지면서 자신의 행복지수도 높아집니다.  

그 만남의 장소로서 교회만큼 좋고 안심이 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자들끼리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가정의 상처를 토로하다가도 결국 “그래도 남편을 위해 기도하자!”고 결론내리는 모임을 막고 그저 목회자와 눈이 맞을 것이란 확률이 희박한 상상으로 아내의 교회출석을 막으면 아내가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야 안심이 되겠습니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집착을 버릴 때 사랑은 한 차원 성숙해집니다.  

물론 어떤 공동체이든지 리더의 자리에 있으면 동료로부터는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고 이성으로부터는 유혹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리더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의 염려에도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끔 방송에서 한국 교회를 질타하는 보도 프로그램이 나갑니다. 그러면 방송국 앞에 몰려가 찬송하고 통성기도를 하며 “마귀야 물러가라!”고 외칩니다. 대개 이단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마음이 참담합니다. 교회가 자기반성을 하도 못하니까 하나님이 방송까지 동원해서 매를 드는데 세상의 매를 맞을 정도로 행동했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무슨 추태입니까? 변화는 자기 실상을 바로 인식할 때 시작됩니다. 허물을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를 칭송해도 세상이 공감하지 않으면 허무한 메아리가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마른 지팡이와 같습니다. 그 지팡이에 다시 싹이 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마른 지팡이가 하나님의 권능이 나오는 능력이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 소망으로 내일의 축복을 준비하십시오. 현재 자신의 처지가 마른 지팡이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다가 두 떼를 이룬 야곱처럼 될 것입니다(창 32:10).   

<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 초라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을 가지고 얼마든지 큰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 부름 받을 때 자기 능력을 의심하고 무엇인가 신비한 체험을 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때 늙은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세의 지팡이가 나중에 놀라운 일을 이루는 가장 위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지금 묻습니다. “아무개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 말은 현재 가진 것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어르신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가진 것이 나이 먹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됐다! 그 나이로 지혜를 빚어내고 기력이 없으면 기도의 능력을 구하라! 내가 그것도 사용할 수 있다!”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히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마른 지팡이처럼 초라하게 보여도 그것이 지닌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의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며 그것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모세의 일생은 지팡이로 시작해서 지팡이로 끝납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지팡이로 반석에서 물을 냈습니다. 그 모세의 지팡이가 가진 의미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며 사십시오. 자신이 가진 것이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마른 지팡이보다는 낫습니다. 그 작은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실 것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멋지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작은 것도 하나님 안에서는 큰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무기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물맷돌,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 삼손의 나귀 턱뼈가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릴 때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가진 재능, 건강, 인맥, 물질 등 모든 것을 가지고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꿈꾸며 나가십시오.  

우리 교회는 지금 연령층이 높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목나무처럼 보이고 큰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찬란한 꿈과 비전입니다. 찬란한 꿈과 비을 뚜렷하게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교회를 부모님을 공경하고 어르신을 존중하는 교회로 만들면 하나님이 반드시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역사를 펼쳐주시고 우리 교회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복된 모델 교회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축복의 때를 준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