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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라 (엡 5: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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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라 (엡 5:21-33)


에베소서 5:21-33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복종하라는 말의 불편함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5월이 가정의 달인데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 날도 있는데 정작 가정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부부의 날은 없습니다. 그래서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했는데 21일로 정한 이유는 둘(2)이 하나(1)가 되라는 뜻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둘이 한 몸이 되라는 것은 성경의 말씀이기도 한데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한 몸을 이룰 수 있는지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부부관계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근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데서 찾고 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은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히려 부부관계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별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데 여성들의 불만이 큽니다. 23절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된다는 표현이 특히 거슬립니다. 남녀는 동등하지 어떻게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요즘은 그래도 여권이 옛날보다는 많이 신장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경제적 실권을 여성들이 쥐고 있고, 주요 의사결정이나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여성들이 더 큰 현실에서 이런 성경 말씀은 고리타분해 보이기조차 합니다. 어른 세대들이야 하나님 말씀처럼 받들겠지만 젊은 층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최근 몇 십 년을 제외하고 여성들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남성들로부터 부당한 억압과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민주주의 역사를 보더라도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된 것은 미국이 1920년이었고, 프랑스가 1945년이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일찍 없어졌지만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기까지는 보다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남자가 머리이고 또 힘이 세다는 이유로 여성들은 가정에서 자신의 인권을 유린당했고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교단 중에는 지금도 여성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도 있습니다. 여성이 가르치는 것이 성경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남자가 머리 역할을 하고 여성들은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창조질서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육체 구조나 의식, 능력 면에서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 근거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최근 우리나라에서 여성 대통령의 탄생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고 사회 각 방편에 여성들이 지도자로서 두각을 보이는 현상은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현상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질서인지 실제는 남성들에 의해서 자행된 억압의 수단이었는지는 한 번 따져볼 일입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이것을 가부장제라고 합니다. 가부장제는 남성 주도로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를 통해서 남성은 부당하게 많은 권리를 누렸고 여성들은 부당하게 억압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은 어떻습니까? 성경말씀에도 가부장제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까?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서도 그런 가부장제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들은 근 2천년 가까이 이 말씀을 근거로 여성들을 억압하고 군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했습니다. 저는 일차적으로 그 원인을 하나님이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머리라는 식의 가부장제를 성경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를 잘 해석해 보아야 합니다. 

가부장제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힘이 센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셨을 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는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입니다. 역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실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수천 년의 역사 과정과 함께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또 이를 이루시기 위한 투쟁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는 항상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적인 지식이 결여되어 있고,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은 잘못된 제도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처럼 오염되고 때가 묻어 있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주실까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일깨워주어야 합니까? 지구 주위를 태양이 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일깨워주어야 하는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과학적 한계와 제도적 한계들을 인정하시는 가운데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오류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낮추심입니다.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사고와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시듯 하나님은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에는 자연과학적 오류나, 제도적 오류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류들이 나타나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마저 무너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보이는 객관성에서 안전한 발판을 찾으려는 인간의 불안의식의 발로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우상과 박제화된 교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닙니다. 거룩한 말씀이 더러운 육신을 입고 빚어진 결과가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고 정의이시며, 그 분이 얼마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지, 그 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는 글자 한 자 한 자가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인의 본분, 그 목적과 가치 면에서 오류가 없다 할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이 떨어지던 시대는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던 가부장제의 시대요, 주인과 노예가 존재하던 고대 노예제사회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가부장제나, 노예제도를 그대로 묵인하셨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신앙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도리를 밝히셨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말이니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질서의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듯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당시 남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권리만 누리던 그들에게 자기희생을 요구하였으니까요.

하나님 말씀이 시대를 초월하여 정확무오하다는 뜻을 고수하는 분들은 에베소서 6장 5절과 9절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말씀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실제 18, 19세기의 노예해방 운동에 저항하던 논리로 성경에 언급된 노예제도를 들며 노예 제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불의한 사회현실에 대해서 눈감고 계신 것만은 아니셨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던 세계의 모습을 노출시키시기도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표준새번역) 이 말씀이 더 하나님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대 사회를 위해서도 적합한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읽은 5장 21절에서도 얼핏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여기에 하나님의 근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서로를 향해 그리스도를 경외하듯 복종하십시오.

기독교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좇아가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붙잡고 있으니 시대의 가장 반동적이며 가장 배타적인 집단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성령론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조명하에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기도하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드러난 보고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캐내듯 하나님 말씀의 밭에서 우리 시대를 향한 말씀을 캐내어야 할 것입니다.

복종하라, 사랑하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런 이해를 수용하면서도 복종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한 번 더 생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복종하라는 말은 가부장제의 잘못이 담긴 시대에 뒤진 말로 단지 격하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 동등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은 권위를 본질로 가지고 계시며 성자는 순종을 본질로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이름도 형체도 헤아리기 어려운 분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순종을 본질로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더 낮고 성부 하나님은 권위를 본질로 하기에 더 높은 분이신가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상 그럴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 모두가 동일하지만 단지 성자 하나님은 순종을 즐겨할 뿐입니다. 

인류 사회는 항상 순종을 약한 것, 여성적인 것, 무가치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의 순종을 통하여 순종이 정말 강하고 위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폭풍과도 같은 성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라 성자 하나님의 희생과 순종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순종의 모범을 보이는 피조물은 바로 물입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만 향하여 흐릅니다. 산이 있으면 돌아가고, 웅덩이가 있으면 채우고 난 후 지나갑니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다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바다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복종하라는 계명을 단지 굴종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복종은 온유와 사랑과 이해를 담고 있는 언어입니다. 복종은 보이지 않지만 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는 복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나요? 

부부관계에 대한 교훈을 말하려다 너무 먼 곳까지 돌아온 것 같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에는 한계점들이 존재하지만 이 표현들에는 남성과 여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남편이 머리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남자들이 권위에 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남자는 자기 머리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무엇보다 여자들의 인정과 칭찬과 존경에 목말라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성들로부터 능력 있는 남편임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남편들은 그래서 월급이 적거나 실업에 대한 고통이 더 극심합니다. 자신이 무능력해졌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여자를 “연약한 질그릇”(벧전3:7)에 비유하지만 실상 남자들이 더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조그만 칭찬에 기가 살고, 말 한마디에 섭섭해 합니다. 더욱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드는 갱년기에는 더 심해집니다. 그러니 남편의 기를 살려 주십시오. 권위를 살려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여자를 감독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주인공입니다.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컨트롤하는 것은 감독인 여자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잘 세워줄 때 남편의 얼굴이 빛납니다. 가정도 평안합니다.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은 여성들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아내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태도, 대화를 더 필요로 합니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도 소중하지만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내십시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며, 부르지 않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남자들이 약한 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면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더욱이 사랑한다면 아내에게 폭력을 쓰거나 비인격적으로 대우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험한 말 대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십시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당신도 또한 소중히 여기십시오.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룸 

가정의 근본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관계가 끝나면 가정 또한 해체됩니다. 가정에서 우선순위는 분명합니다. 부부관계가 최우선입니다. 다음이 자녀관계이고 마지막이 부모관계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부모관계 때문에 부부관계가 파괴되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 부부들은 한 침대에서 여섯 명이 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 둘이요, 나머지 넷은 남편의 부모와 아내의 부모입니다. 침대에서 다투는 부부 싸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부모들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자녀, 자녀를 놓아주지 않는 부모가 가정을 위기로 몰아갑니다.

성경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부모를 떠나라” 부모는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순간 모든 의무와 권리에서 벗어납니다. 부모로서 의무도 다했고, 이제는 저들이 독립하였으니 간섭할 수 있는 권리도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고 독립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을 보면 자기 부모의 생일은 곧 잘 잃어버리면서도 자기 남자친구나 여자 친구의 생일은 죽어도 잊지 않습니다. 심지어 만난 지 100일째 되는 날도 계산합니다. 한 편으로는 괘심한 면도 있지만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떠나야 하고 저들은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한 이유는 앞에서 둘(2)이 만나 한(1)몸이 되라는 뜻에서였다 말씀드렸습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둘이 만나서 한 몸이 되어갑니다. 서로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목표도 달랐는데, 이제는 서로 재산도 공유하고 성격도 맞추어 가고 가치관과 목표도 일치시켜 갑니다. 육체적으로도 결합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이를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는 사건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원래 서로가 하나였기에 하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몸이라는 말에 너무 부담감을 느끼지 말기를 바랍니다. 한 몸이라는 말이 자칫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표현하면 부부는 둘이 만나 셋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둘과 둘이 공통적으로 이루는 하나입니다. 이 공통분모를 넓혀가되 자기 자신에게 충실 하는 것 또한 등한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자기를 지키는 것도 부부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내 인생은 어디 있어!” 하며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기만을 고수하고 공통분모는 전혀 없는 것은 그 또한 부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남남입니다. 상대방을 세워주고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부부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아내의 빛난 얼굴은 남편의 사랑 덕분입니다. 남편의 빛난 얼굴은 아내의 사랑 덕분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가정에 있습니다. 아담이 노동을 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지만 궁극적인 행복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마치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도록 돕는 조력자이십니다. 모두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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