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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나의 사랑하는 자 (아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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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자 (아 5:16) 

솔로몬은 변함없이 신부를 사랑하면서 함께 거하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 대한 갈등이 왔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부르면서 순결하고 완전한 자로 예우하고 있습니다. 

신랑은 긴 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신부의 방문을 노크합니다. 신랑의 머리에는 이슬이 내려 있고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했습니다. 
신부는 옷을 벗고 발을 씻었으니 일어나서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랑이 문틈사이로 손을 내밀 때 신부의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신부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신랑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신랑의 사랑을 안일하게 대처한 신부는 혼이 나갔다고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신랑이 떠나갔을 때 신부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찾아 밤거리를 배회합니다. 

이때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밤중에 신랑을 찾아서 거리에 나온 술람미 여인에게 불쾌한 일을 행했습니다. 그녀를 때리고 상처를 내고 웃옷을 벗겨 가져갔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나의 신랑을 혹시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달라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인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미친 듯이 자기 신랑만을 찾는 술람미 여인에게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인들이 질문을 합니다. 

본문 5장 9절에 『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보다, 예수가 이 땅에서 추앙받던 성현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술람미 여인은 고백적인 응대를 하고 있습니다. 

Ⅰ. 예수는 무죄성결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5장 10절에 『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라고 했습니다. 

『 희다 』는 말은 모든 흰 것과 차별화된 순수 백색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짓게 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갈 2:17). 그리스도에게 죄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눅 23:14). 그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빛,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약 1:17).
예루살렘 귀족들이 동경하는 흰 얼굴과 눈부시게 하얀 피부와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된 흰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6절에 『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결의 광채가 변화산에서 나타났습니다(마 17:2). 밧모 섬에서도 사도 요한에게 나타났습니다

(계 1:16). 그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정결의 분입니다(벧전 1:19).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인간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Ⅱ. 예수는 속죄의 주시라고 했습니다. 

본문 5장 10절에 『 …붉어… 』라고 했습니다.
『 붉다 』는 말은 "피"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붉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신 인성을 뜻합니다. 또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돌아가신 그의 대속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다윗은 이러한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표적 인물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2절에 『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습니다. 

Ⅲ. 예수는 다른 이들과 차별화된 분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5장 10절에 『 …만 사람 앞에 뛰어난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 『 뛰어난다 』는 말은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승리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타 종교와 동일하거나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1)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과 차별화됩니다. 

카톨릭의 구원론은 기독교의 구원론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이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기독교와 카톨릭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카톨릭은 칭의는 세례와 관계가 깊다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이전까지 지었던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의롭게 되지만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의롭게 됨이 박탈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카톨릭 신자들은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지 못합니다. 즉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는 세례받기 이전까지의 죄를 사해주며 이후에 짓는 모든 죄들은 7성례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에는 세례가 반드시 필요하며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공덕)를 통하여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와 카톨릭 모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지만 카톨릭은 그것에 더하여 연옥을 말합니다. 이는 천국에 가기에는 그 공덕(행위)이 부족하고 지옥에 갈 정도의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연옥에서 고통 받으며 그 죄를 씻은 후 천국으로 가는 중간 단계를 말합니다. 
카톨릭에서 연옥이라는 이상한 개인의 종말 이후 중간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공덕(행위)을 포함한 구원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기독교는 불교와 차별화됩니다. 

① 불교의 구원관은 지혜를 깨닫고 그 지혜를 실행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② 불교의 윤회설
일정한 깨달음의 경지, 또는 구원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즉 해탈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이 세상으로 재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짐승이 되어 재탄생하기도 하는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전생의 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부귀빈천이 형성되어 다시 이생에 이어지며 다시 그 삶을 살며 지은 업에 의해서 후생을 이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윤회란 결국 태어나고 죽는 현상 속에서 고통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기본 가르침으로 하고 있습니다. 

3) 기독교는 유교와 차별화됩니다.

유교의 창시자가 공자입니다. 그는 교주도 아니고 내세를 믿는 자도 아닙니다. 도덕이나 윤리를 앞세우며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유교에는 구원관이 없습니다. 공자는 내세에 대해 묻는 말에, 땅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찌 하늘의 일을 알랴 하였다고 했습니다. 다만 인명은 제천이라 하였으나 그렇다고 어떤 한 신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신관도 없습니다.

4) 기독교는 도교와 차별화됩니다.

도교(道敎)의 구원은 성선(成仙), 곧 신선이 되는 것이며, 성선의 내용은 바로 득도(得道)입니다. 도교의 신선은 단순히 현세에서 육신을 오랫동안 보존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과 육신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몸을 갖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도(道)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신에 대한 타력적 신앙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수행에 의한 자력적 깨달음이 강조되는 종교입니다.

5)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차별화됩니다.

이슬람이란 순종이란 의미로서 "알라"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그들 자신을 모슬렘이라 부르는 것은 "복종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라"를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경전은 토라(모세오경), 자부(다윗의 시편), 인지(예수의 복음), 그리고 코란인데 코란이 가장 권위 있는 경전으로 꼽힙니다. 코란은 114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가 마호메트의 어록입니다. 마호메트는 알라의 선지자로서 다른 알라의 선지자들(모세, 아브라함, 이삭 등등,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여기에 해당한다)보다 월등한 선지자로 추앙받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행위에 있습니다. 선행과 악행을 따져보아 선행이 더 많으면 천국을 가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 지옥에 가게 됩니다. 아무리 악행이 많아도 "지하드"라 불리는 성전(聖戰)을 통해 순교한다면 천국을 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구원에 관한 생각은 과격한 수니파 이슬람교도에게 자살 폭탄 테러를 통한 순교를 권장하는 근본 사상이 되고 있습니다.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면 비록 악행이 더 많아 지옥에 가게 될지라도 그 값을 치른 후에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합니다.

6) 기독교는 증산도와 차별화됩니다.

증산도의 구원 사상은 인간과 인류사회를 조성시킨 이 천지자연, 대우주를 포괄하는 근원적인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우주 순환의 이치에 의해서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닌 개벽이 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향한 신부의 고백은, 


Ⅳ. 예수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 라고 했습니다.

본문 5장 16절에 『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라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고백입니다. 여기 『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 』라는 말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과의 관계가 지금 나타난 것뿐이지 두 사람의 관계의 기원은 신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위적으로 일체이십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마태복음 3장 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수난 당하기 바로 직전 요한복음 12장 28절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태초의 상고부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각각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막 9:7), 『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눅 9: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는 본래부터 사랑하는 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됨에 있어서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독론을 변증하는데 중요한 성경입니다. 만약 양자론자들의 주장이 이유가 있다고 하면 여기에 『 지금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말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데 대해서 시간 제약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여기에 관계된 기독론의 여러 이단들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 말입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는 다른 신적 위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 이는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과 나 사이가 부부관계가 된 것은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주님은 나를 향해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나의 사랑하는 자가 되어 있었었다는 말입니다. 
피차 나의 사랑하는 자가 되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했습니다. 나사로를 친구라고 했습니다(요 11:11).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교회 설립 2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교회(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입니다. 성찬이 바로 서로의 연합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은 솔로몬에 의해서 배운 사랑입니다. 솔로몬이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질문은 진지했습니다. 『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이 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솔로몬의 사랑이 위대한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솔로몬이 사랑을 요구해오지 아니했습니다. 
저들은 각자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솔로몬으로 상대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솔로몬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에게는 오직 술람미 여인뿐입니다. 

저들은 술람미 여인으로부터 솔로몬의 사랑을 알고 싶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오직 솔로몬만 찾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는 것을 능력으로 알고 취미로 알고 대인관계의 탁월한 수완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여자에게 꼭 솔로몬 뿐이어야 하나 다른 남자들도 사귀어 보라
카톨릭, 불교, 유교, 마호멧, 증산교, 기타 종교들을 접해보라. 그곳에도 사랑이 있고, 노래가 있고, 정도 있고, 눈물도 있다고 유혹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 앞에 뛰어나다 』는 것은 다른 남편들과 다른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희고도 붉고, 만 사람 앞에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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