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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빛의 자녀들의 삶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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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의 삶 (엡 5:15-21)

믿는 성도 치고 성령 충만에 관심을 갖지 않는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받기 원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기도를 더 잘하기 위하여, 말씀을 더 잘 깨닫기 위하여,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등등.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시작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전무후무한 독특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성령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자신을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합니까? 교회 직분이 있고,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저절로 성령 충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모는 하지만 막연히 기다리지는 않습니까?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있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에 동참함으로 기쁨과 담대함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가정을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면서 교회에 언제나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존재와 사역이 없이 교회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고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인도하시며 진리를 계시하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칭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뒤를 이어 성도들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존재로서 우리의 영적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 행하신 사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 전파였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이끌리어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정월 십사 일이 되면 유월절로 지키고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은 무교절 기간으로 발효되지 않은 떡을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성회로 모이고 이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였습니다.(레 23:5-6) 

유월절 다음에 오는 안식일 이후 첫날을 초실절이라 합니다. 추수한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드려서 요제로 하나님께 드리고 수양을 번제로 드리고 또한 소제와 전제를 드렸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죽었듯이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초실절에 추수한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리듯이 예수님은 삼일 째 되는 초실절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르는데 맥추절(출 23:16) 혹은 칠칠절 (34:22,23)이라고도 하며 밀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레 23:15,16). 

이 절기에는 떡 두 개를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았는데 이는 추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요, 떡을 바침으로 그해의 추수 전체를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구나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하여 주신 지침이기에 율법의 말씀대로 살면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성령을 허락하신 것도 율법의 주신 것의 연장선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성령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로 주신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뜻깊은 절기인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택하신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들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을 통하여 미리 예언된 절기와 의미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를 따르던 120명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이 위에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부으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고, 급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니 예루살렘 성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그 술기운에 취하여 말을 하는 것이라고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신기한 일을 인하여 제자들 주변에 많은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 사도적인 메시지를 증거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이 술 취하여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린다고 조롱하는 무리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제 삼시 즉 아홉시면 보통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아침 아홉 시인데, 술 먹고 취하여 떠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요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이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요엘이 장차 임할 시대의 징조가 바로 성령의 임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또한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모인 무리들에게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을 것이요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담대하게 외치니 그 말을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죄 사함 받았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민감해집니다. 그 죄들을 토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요 16:8,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이 같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한 회개의 역사는 교회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필두로 시작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은 한국 교회에 전국적인 회개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미국 교회도 비슷한 시기에 파사디나 근처에 있는 아주사에서 성령 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에서 참다운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고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한 교제가 소홀해질 때 성령의 역사가 중단됩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다툼이 생기고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령이 부어지는 역사를 다시 경험하면 교회는 다시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고 양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여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성령 체험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변화된 모습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을 통하여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삶이 빛의 자녀의 삶인지 살펴봅니다.

1) 지혜있는 자같이 행해야 합니다 (15-16절)

지혜라 함은 단순히 사물을 아는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속에서 오는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지식이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요 1:1) 예수님 자신인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지혜 없는 자들의 삶은 에베소서 4장과 5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거짓말, 분노, 도적질, 더러운 말, 음행 등으로 가득한 예수 믿기 전의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들은 그런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물었을 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 (마 24:7-8) 

바울은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예수님이나 바울은 세상의 종말의 시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때를 분별하여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아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구속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구속은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구속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구속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며 삼길 자를 찾으며 믿는 자라도 실족시키게 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마귀의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니라 더 교묘한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자칫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보시기에 시간을 악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는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는데 믿는다 하는 사람들조차 이 순서를 자꾸 바꾸려하니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생활이 흐트러지고 전에 받은 은혜는 다 쏟아버리고 기도와 말씀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붙드는 낯선 단어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아는 지혜의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놀 것이 많습니까? 얼마나 갈 곳이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할 것 다하고 쓸 것 다 쓰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 늦게 믿었다 할지라도 더 늦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쓰고 또 부르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주어진 때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하여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17절)

빛의 자녀로서의 삶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이미 신앙을 고백한 자들은 중간에 낙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삶이 변화되어 다 영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복된 삶입니다. 

3)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18-21절)

빛의 자녀로서 세 번째 특징은 성령 충만입니다. 왜 바울은 술 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 받는 것과 연결을 시킬까요? 오순절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방언이 나오자 어떤 사람들은 아침부터 술 취하여 주정하는 것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대로 말세에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기로 한 것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해명하였습니다. 술기운이 우리를 주장하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같은 원리로 믿는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의 뜻대로 육신에 하고픈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누가 우리의 생을 주도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술기운이 우리를 주장하는가? 세속적인 욕망이 우리를 주장합니까?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롬 12:1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성도들이 주안에서 함께 기뻐 즐기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즉 성령 충만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온전히 표현이 됩니다. 

18절에서 21절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동사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이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복종하라는 단어들은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친송하고 감사하고 복종함으로써 성령 충만에 이를 수 있고 또는 성령 충만함의 결과로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찬양합니다(19절)

성령 충만하게 되면 전에 거짓말하고, 분을 내고, 더러운 말을 하고 술 취하여 주정하며 헛된 노래를 주절거리던 입술이 깨끗하게 되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합니다. 시(psalm)는 시편과 같이 주님께 드려지는 찬양시를 가리킵니다. 찬미(hymn)는 주님을 찬양하지만 서로 함께 불러야 할 찬양을 가리킵니다. 신령한 노래는 신앙을 주제로 한 영적인 노래를 뜻합니다. 이렇게 찬양은 주님께 대한 것과 서로에 대한 것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입술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우리의 입술을 움직여 부릅니다. 서로 화답하니 눈으로 보게 되고 귀로 듣습니다. 마음으로 주님께 찬송을 드리니 우리의 심령이 감동을 받습니다. 성령이 거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감각, 온몸 사지백체를 사용하게 되니 영육 간에 강건해집니다. 삶에 의욕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나를 즐겁게 하고 나 중심으로 살았던 옛사람이 변화를 받고 보니 이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감사합니다(20절)

성령 충만한 삶의 두 번째 특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생활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향을 드리려면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사를 드립니다. 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하는 것이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되는 option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기 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불확실하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니다. 

사람은 변하고 친구는 혹시 내 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가 없는 삶은 성령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가 되셔야 한다는 뜻이면서, 그 감사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로 감사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종합니다(21절)

성령 충만의 세 번째 특징은 서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종하다’는 자신을 그 밑에 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종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서로를 높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며 퍼뜨리며 흠집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평이나 불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부정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키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에 이끌리어 행동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 다음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 사이에 서로 섬길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섬기라는 것은 각자의 고유한 역할은 감당하되 자기주장만 하지 말고 상대방의 유익을 세워줄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섬김을 공동체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적인 섬김이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하면서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관계가 제대로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성령의 충만임을 강조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성령의 강림 사건은 초대 교회에서나 있었던 일회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그런 현상들을 나타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신비스런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에 나타난 성령의 임재요, 성령의 능력을 사용한 결과로 인한 열매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순간에 한 번 일어나는 것이나 (행 11:15-16) 성령의 충만함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를 시작하시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귀합니다. 

성령의 세밀한 소리를 듣고 성령의 앞서 가심에 힘써 따라가는 성도들이 될 때 변화와 새 창조의 역사는 펼쳐질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며 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성도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사역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선교하는 백성들의 모임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 공동체에 열심히 참여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이 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진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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