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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는 그리스도 (행 1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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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리스도 (행 18:5-11)   

6월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올해 말씀과 함께 출발해서 다섯 달을 달려왔습니다. 남은 일곱 달 동안 더욱 힘써서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일곱 달 동안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은혜를 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18장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 대목은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 중에서 그가 아덴, 즉 아테네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도착한 부분을 보여줍니다. 이 때는 대략 주후 50년경으로 여겨집니다. 

고린도에 도착할 무렵 바울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덴의 전도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지만, 아덴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그저 몇 몇 사람이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의 각오는 여느 때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반드시 고린도에서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강력한 말씀을 넣어 주셨습니다. 5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슴이 뜨거워졌고, 말씀을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덴에서의 낙심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는 불타는 가슴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전한 말씀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전한 말씀의 주제는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5절을 보세요.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아멘!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이게 그가 전한 주제였습니다. 

이미 바울은 오래 전부터 이 주제로 말씀을 전한 바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그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 가는 장면에 나옵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슴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은 불보다 더 뜨겁고,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예수님의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그는 거꾸러졌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 사람들의 손에 의지하여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후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와서 안수 기도를 함으로써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영의 눈도 뜨게 되었는데, 자신이 핍박하던 그 분이 자신의 구원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즉시 나가서 다메섹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자마자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 그가 전한 말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9장 22절을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이게, 그가 예수님을 믿고 처음부터 전한 주제였습니다.  

여러분,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면 누구나 예수님께 붙잡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또 성경의 전체의 주제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전한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바울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예수>라는 단어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붙여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짧은 문장입니다. 인류가 고백하는 문장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문장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문장입니다. 이것이 줄어서 마치 한 단어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우리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을 간추리고 간추리면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주제 대신에 다른 것들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덴에서 그는 종교 일반에 관해, 창조의 질서에 대해,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 모두 중요한 주제입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과 부활을 전혀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7장 22-31절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를 보면 <예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서 바울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뿐>이라는 것은 강력하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전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그의 결심이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멘!  바울은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오직 예수!>의 정신이었습니다. 땅끝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오직 예수님의 정신이 가득하길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메시아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같은 뜻으로서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로서 둘 다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으로서 우리의 구원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다른 이가 아닌, 나사렛 예수님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사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에 살고 있던 한 남자의 이름입니다. 별로 볼 것도 없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고, 어쩌면 천해 보이는 한 남자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자신의 그리스도,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이게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울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 그러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6절 앞부분을 보세요.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이게 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전한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5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었고, 고린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새로운 곳에 가면 제일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는데, 그들이 거부한 것입니다. ‘ 

그들은 유대로부터 전해진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식이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죽은 게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전하자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전한 말씀을 거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미 고린도식 삶에 깊이 물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식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삶이란 가짜 그리스도에게 매료되는 삶이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에 인구가 75만에 달하던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고, 도자기업이 발전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런 부유함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었고, 그 재물이 그들의 메시아였습니다. 돈 맛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지친 영혼을 달랠 메시아가 또 있었는데, 그것은 스포츠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이스미안 경기>라고 해서 아테네의 올림픽에 버금가는 운동 경기가 열리곤 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운동 축제였고,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고 달리면서 체력을 겨루었습니다.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열광했습니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부산을 <야구가 종교인 도시>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의 프로축구는 거의 종교 수준입니다. 사람들은 주일이면 교회당이 아닌 축구장에서, 하나님이 아닌 리오넬 메시와 드록바와 같은 유명 선수에게 열광하는데, 예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리스도, 메시아 목록에서 향락을 빼놓을 수 없지요. 고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566미터의 <아크로코린트>입니다. 그 꼭대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을 로마 사람들은 비너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여사제가 일천여 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말이 사제지, 사실은 창녀였습니다. 신전에 제사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더러운 쾌락을 제공했습니다. 고린도사람들은 너 나를 막론하고 신전에서 육체적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고린도는 이처럼 타락한 도시였기에 고린도라는 이름을 따서 <코린디아조>란 말이 생겼는데, 그 뜻은 <음행하다>란 뜻입니다. 고린도가 얼마나 향락의 도시였으면 이런 단어까지 생겼겠습니까? 이처럼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물질, 스포츠와 같은 오락, 그리고 쾌락을 자신들의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예수쟁이>라고 부르는데, 일견 욕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쟁이입니다. 예수님께 미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외의 그 무엇, 누구에게도 자신을 맡기지 않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바울은 옷을 털면서 자신은 책임이 없음은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전했고, 그들은 거부했으므로, 장차 그들이 천국에서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6절 후반부부터 보시면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소중한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의 회당을 나와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바울의 발이 회당을 떠나는 순간, 구원도 회당을 떠났습니다. 비록 날마다 유대인들이 거기 모였겠지만, 예수님 없는 회당에는 구원도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거부하면 구원은 떠납니다. 우리가 순종하고 믿지 않으면 축복은 옮겨갑니다. 축복은 결코 특정한 사람, 특정한 가정, 특정한 교회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과 축복은 믿는 사람, 영접하는 사람에게로 계속 옮겨갑니다. 

본래 복음은 유럽으로 제일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유럽은 그 후 복을 받아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상선들이 세계를 누볐고, 세계 곳곳에 유럽 여러 나라의 깃발이 세워졌습니다.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가 주님을 떠나자 유럽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엄청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던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휘청대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발 경제위기 때문에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미국도 그렇습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복음은 미국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대각성운동이 일어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이삼십 년에 걸쳐 미국 교회는 과거와 같은 열정을 상실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더 이상 주님께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작금에 와서 미국은 그 힘을 많이 상실하여 더 이상 예전 같은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자 축복도 떠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유럽과 미국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간절하게 받았던 아시아와 남미 등의 나라들의 교회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한 때 후진국이었던 그 나라들이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아직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중국에는 일 억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는데, 중국 경제가 얼마나 부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중국을 일으켜 세계 선교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축복은 이동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에베소교회에 대해 하신 경고를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한 번 촛대가 세워졌다고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촛대를 옮기십니다. 과거에 잘 믿었던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재가 중요합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배척하자,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구원과 축복이 영원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우리 땅끝교회에 풍성하게 머물길 기원합니다. 결단코 떠나가게 하면 안 됩니다.그렇게 하려면 말씀에 순종하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굳게 붙드시길 바랍니다. 

이 무렵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격려하셨습니다. 아덴에서의 좌절도 있었고, 이 큰 도시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바울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9-10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할렐루야!  

분명히 그 때까지 고린도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극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 격려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이나 머물 수 있었던 힘은 주님의 격려에서 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의 눈을 가지길 원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면서 실망하지만, 주님은 영의 눈으로 보십니다. 우리는 현재를 보면서 낙심하지만, 주님은 미래를 보면서 격려하십니다. 

부산은 복음의 볼모지와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부산이 곧 선교지라는 말씀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이 그렇습니다.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갑니다. 어려운 노인들이 많으십니다. 여건도, 상황도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곳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새로운 안목이 생깁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보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소망을 가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승리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봅시다. 우리의 오늘을 보지 말고, 미래를 봅시다. 이 세상을 보지 말고, 천국을 바라봅시다. 

바울은 1년 6개월 후에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우리도 떠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부산을 떠나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갈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실 때까지 머물면서 복음을 위해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는 주, 예수는 그리스도>를 목소리 높여 부르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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