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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얼굴을 본 듯합니다! (창 3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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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본 듯합니다! (창 33:1-17)


의학적으로 사람이 심장만 살아 있으면 살았다고 합니다.  뇌사 상태에 빠졌어도 심장만 뛰면 살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내 심장이 내가 잠을 자고 있었던 그 깊은 밤에도 멈추지 않고 "쿵! 쿵!"하고 뛰고 있었다는 감격을 아십니까?  우리가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종종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너무 신기하고 감격했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쿵! 쿵! 쿵!"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고, 감격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심장은 펌프와 비슷해서 수축하여 혈액을 동맥 속으로 밀어내고, 확장하여 정맥에서 오는 혈액을 내강에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  심장이 뛰면 이 심장은 지친 피, 낡은 피, 흐트러진 피, 고단한 피, 병든 피, 수많은 곳에서 싸우고 지친 그런 피들이 심장을 통과하는 동안에 놀라운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이 심장만 통과하면 새 힘을 얻고 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지친 자들의 심장과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찌들리고 지친 영혼들이 여기만 통과하면 힘을 얻고 나갑니다.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이 이곳만 통과하면 놀라운 하늘의 지혜를 얻고 나갑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지만 이곳을 통과하면 누구든지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강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것이 별로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재능이 있다, 아니면 좋은 학교를 나와서 실력이 있다는 것들은 중, 고등학교 때에는 차이가 날는지 모르지만, 50대 60대가 되고 나면 비슷 비슷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50대 60대가 되면 솔직히 그 얼굴에 그 얼굴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이를 먹어도 인생을 바꾸는 정말 중요한 차이점은 의욕입니다.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의욕이 중요합니다.  이 의욕이 없으면 학벌이 필요 없습니다.  의욕이 없는 지식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의욕이 없는 재산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자 내 삶을 불태우는 의욕입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크고 강한 의욕에 붙잡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불같은 의욕을 여러분의 심장을 통하여 구석구석에 공급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괴물의 얼굴을 하고 추한 짓을 하고 살던 사람이 예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아가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성자의 가면을 쓰고 구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고 몇 년 동안 진정으로 부인을 사랑하며 성자처럼 살았습니다.  몇 년 후에 남편이 쓰고 있는 것이 가면임을 알게 된 부인이 사기 결혼임을 알고 가면을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면 속의 얼굴은 괴물이 아니라 성자의 얼굴로 이미 변해 있었습니다.  성자의 얼굴을 하고 성자의 마음을 품고 성자처럼 살았던 그는 이미 성자가 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어느 모임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났던 어떤 선배 목사님이 저를 보고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 목사님,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에∼이!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라고 했더니 이 목사님이 웃으면서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 정말입니다.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얼굴이 탐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선배님, 제 얼굴만 보시고 이마 위는 보지 마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아침에 문득 거울 앞에 섰을 때 거기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얼굴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평가를 하십니까?

세상에서 신비하고 묘한 것이 많이 있지만 사람의 얼굴만큼 묘한 것이 있을까요?  가만히 보면 정말 묘하게 생겼습니다.  콧구멍이 위로 가지 않고 아래로 향한 것이 그렇고, 눈이 두 개인데도 초점은 하나로 잡혀서 하나의 사물로 보이는 것도 그렇고, 입이 눈과 코 사이에 있지 않고 코 밑에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도 부럽고, 좋은 재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도 부럽지만, 좋은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면 정말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온화한 얼굴, 평안한 얼굴, 자애로운 얼굴......

얼굴이 말을 합니다.  얼굴이 곧 그 사람입니다.  다 안 봐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압니다.  얼굴이 곧 그 사람의 영상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다 압니다.  얼굴은 잘 생기고 못 생긴 문제가 아니라 그 얼굴이 그 사람의 순간을 표현합니다.  기쁠 때는 기쁜 표현이 나옵니다.  힘들 때는 힘든 표현이 나옵니다.  어려울 때는 어려운 표현이 나옵니다.  좀 기만적이고 사기적일 때는 그런 얼굴이 나옵니다.

얼굴은 사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얼굴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얼굴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인격을 늘 대표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다느니, 얼굴을 내민다느니, 얼굴이 안 선다느니, 면목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네 이놈아, 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라.  내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부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얼굴은 인격이나 이름 전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 다른 장관들은 다 세웠는데 농림부장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매일 하나님 앞에 좋은 장관을 앉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농림부장관으로 한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대통령 집무실에 데리고 와서 앉혀놓고 이 목사님이 대통령에게 추천을 합니다.
그래서 링컨이 추천을 하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잘 아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저 쓸만한...."  그랬더니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됐습니다." 하고서는 그 다음에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그쳐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그때 링컨 대통령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넘으면 그 얼굴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됩니다.  저분은 그 얼굴에 책임이 없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추천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얼굴은 소우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 속에 다 있습니다.  거기에 폭풍도 일어나고, 지진도 일어납니다.  거기에 봄빛도 비치고, 계곡도 있습니다.  거기에 어린아이가 뛰놀고, 무서운 사자도 놀고 있습니다.  얼굴은 미래를 여는 거울입니다.  얼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간직하고 있는 영상입니다.  얼굴은 그 심성과 성품의 거울입니다.  온화한 얼굴, 온유한 얼굴,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범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춘 얼굴!  신뢰할 수 있는 얼굴!  반면에 화난 얼굴, 거친 얼굴, 어딘가 신뢰할 수 없는 얼굴!

그래서 이 시간 옆 사람의 얼굴을 한 번 세심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온화한 얼굴인지, 세상 풍파를 다 담고 있는 얼굴인지...  감동되는 얼굴인지, 아니면 격동을 일으키는 얼굴인지 한 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의 피부는 4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얼굴을 예쁘게 보이려고 마사지를 하고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만 사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찍고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나면 아무리 바른다고 해도 별로 신통치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년 동안만 울고 찌푸리고 한숨 짓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피부 색깔도 얼굴 모양도 그렇게 찌들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3년 동안만 성령충만한 가운데 사랑하고 늘 기뻐하면서 살아보십시오.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고 감사하면서 한 번 살아보십시오.  빛나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또 다른 여러분의 얼굴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얼굴 모양은 주셨지만 인상은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품고 있는 내용에 따라서 얼굴은 각각 다르게 표현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내 얼굴이 빛납니다.  마음에 근심이 쌓이면 얼굴이 빛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은 마음을 표현하는 거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저마다 바람직한 얼굴의 주인공들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어도 내 얼굴의 주인공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을 바꾸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건강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생기고 못생긴 얼굴이 아니라 밝고 기쁜 얼굴이어야 합니다.  얼굴이 아무리 잘생겨도 그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어두운 얼굴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사실 얼굴은 그 심성이 갖는 예술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만들어지는 작품입니다.  얼굴은 영적 지각의 기반입니다.  그 얼굴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 그 얼굴을 보면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 얼굴을 보면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사는지 영적 지각의 기반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은 빛이 났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더니 그 얼굴에 빛이 나서 사람들이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얼굴에도 그런 거룩한 하늘의 빛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우리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이 말은 누구가 한 말입니까?  야곱입니다.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에서입니다.

보십시오.  20여년 전, 동생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로부터 축복권까지 가로채 버렸습니다.  반면에 형 에서는 한 순간의 방심과 어리석은 실수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고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마저도 동생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일로 형 에서는 분노하고, 그 형이 무서워서 동생은 야밤 도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 야곱은 물 설고 낯 설은 이역만리 타향에서 20여 년이나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에서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 라고 했을 때 이렇게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대략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에서의 모습은 그렇게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못난 얼굴에 속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에서는 사냥꾼이었고 얼굴이 온통 털로 덮여 있어서 아버지 이삭의 눈이 에서와 야곱을 분간하지 못할 때 얼굴을 만져보고 털이 무성하면 에서요, 얼굴이 매끈매끈하면 야곱임을 분간했습니다.  아열대성 기후에 그런 얼굴을 하고 온 산을 헤매며 사냥을 하는 에서의 얼굴은 한 마디로 짐승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런 에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그 얼굴이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야곱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우리는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얍복강에서의 씨름 사건입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야곱은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온다는 말을 듣고 쉽게 얍복강을 건너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혼자서 얍복강 나루에 앉아 있다가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씨름을 걸어오는 이 사람이 형 에서가 보낸 자객이겠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지금 자기와 씨름하고 있는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결국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던 그곳을 가리켜서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브니엘이라는 말은 창세기 32장 30절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브니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워낙 경황이 없었던터라 하나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본지 하룻밤 사이에 그의 형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형을 만났을 때 간밤에 만나 본 그 하나님의 얼굴이 바로 형 에서의 얼굴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털보 에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 제가 지난 밤에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는데 지금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20여년 전에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찼던 그 얼굴이 20년이 지난 지금 야곱이 이처럼 에서를 향해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도 용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시는 놀라운 삶의 변화를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심령에 모든 사건과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마음이 열려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기 속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파멸의 씨앗들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의 사건이 나를 살립니다.  내 가정을 살립니다.  이 사회와 믿음의 공동체를 세웁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절대 권능 앞에 생포되는 그 순간 우리 안에 있는 온갖 혼란과 어둠의 권세들이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몸 안에 있는 세포들이 하나 하나 살아서 생기를 발하면서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과 감격과 흥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순간 에서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로 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황폐하다는 곳이 많이 있지만 제일 황폐한 곳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 나 자신도 내 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곳은 황폐한 곳입니다.  남편의 마음도 믿지 마시고, 아내의 마음도 믿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내 마음도 못 믿는 세상인데 마음이 황폐하여 불평과 비판적인 생각에 빠지도록 내 마음을 그대로 버려 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복하고 있어야 됩니다.  간사한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로, 실제로 동생을 용서하고 있는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출세와 성공에 민감한 야곱은 평생 남을 속이면서 살아왔습니다.  형 에서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사기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땅히 자기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마저도 동생에게 도둑 맞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이 때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와서 방성대곡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에서는 가슴에 한이 맺혔고 그 얼굴에는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미움과 증오와 분노로 가득찬 에서는 야곱을 죽여서 한을 풀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토록 재빠른 야곱, 교활한 야곱, 지금까지 남을 속이면서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고향이 그리워서 20여 년의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정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야곱은 수많은 재산과 종들과 열 명이 넘는 자식들과 그리고 네 명의 아내를 데리고 금의환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자수성가를 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형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향해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형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형님이 죽이면 죽고, 살려주면 살고…….

그런데 여러분, 철천지원수 같던 야곱, 꿈속에서라도 죽이고 싶었던 그 야곱을 만났던 한 맺힌 형 에서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여기에서 누가 달려왔다고 했습니까?
누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까?
야곱입니까?  아닙니다.  에서입니다.

형 에서가 달려와서 동생을 끌어안았습니다.  형 에서가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던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했던 형 에서, 그 형의 얼굴이 무서워 야밤 도주하고 20년의 세월을 가슴 졸이며 살아왔던 동생 야곱, 이들은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원수도 용서하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도 미워하면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전에 동료 화가와 심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너무도 화가 나고 분해서 자기와 싸운 그 화가의 얼굴을 가룟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도 하고 그 화가를 불명예스럽게 해서 대대로 비난을 받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누가 봐도 그 가룟 유다의 얼굴은 자기와 싸운 그 유명한 화가의 얼굴임을 단 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속이 시원하도록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에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붓이 말이 듣지를 않았습니다.  전혀 손을 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방해하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림을 방해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싸운 친구의 얼굴을 가룟 유다로 그렸다는데 그 원인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친구를 찾아가서 용서를 빈 다음에 "최후의 만찬"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 속으로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가룟 유다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 사랑과 관용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얼굴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릴 때, 그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에서의 얼굴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에서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털보 얼굴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눈에 비쳐진 에서의 얼굴은 20여 년 전과는 어딘가 모르게 달랐습니다.  20여 년 전에 야곱이 보았던 에서의 얼굴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살기가 있는 무서운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이 두려워 한 밤중에 이역만리 타향으로 도망을 갔던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형 에서의 얼굴은 그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밤에 브니엘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습니다.  에서의 얼굴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처럼 변화된 얼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용서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실, 죄인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와 이사야가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뒷모습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요한일서 4장 12절에 보면, 그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듯이 그 얼굴을 오늘 여러분에게서도 찾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이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얼굴을 닮을 수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는 얼굴이 되면 하나님을 닮은 얼굴이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얼굴이 되면 하나님을 닮은 멋진 얼굴이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육체적 미의 얼굴을 바르고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  거기에다 지성미를 갖추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진실을 믿고 정말 하나님과 남모르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그 사람의 얼굴에는 영성미가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신뢰가 있습니다.  그 얼굴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얼굴은 정말 믿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결정하는 자유와 능력은 자기의 것입니다.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얼굴을 결정하는 자유와 능력은 내 것입니다.  내 얼굴 때문에 인생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얼굴 때문에, 내 얼굴이 그리워, 내 얼굴만 보면 살맛이 나는 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넘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먼저 느끼는 곳은 얼굴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얼굴이 언제나 편안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그 얼굴이 언제나 은혜롭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그 얼굴이 언제나 자신감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사로잡아 여러분의 얼굴에 평안히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그 얼굴에 빛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머니에 수표를 갖고 있어도 그 얼굴을 밝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귀금속을 목에 차고 있어도 얼굴을 밝게 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과 같은 사람은 죽음을 앞에 놓고도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일어서는 순간 여러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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