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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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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2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요10:11-21) 


나는 선한 목자라

"Egwv eijmi oJ poimh;n oJ kalov"(나는 그 목자, 그 선한 자)로써, kalov" (칼로스: 선한)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선하다는 말은 성경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외적인 아름다움(눅21:5), 사용 가치(막9:51), 책임 이행의 정도(딤전4:6), 도덕적인 아름다움(마5:16), 양심의 아름다움(히13:18), 완전함(막9:43) 등등.  그래서 Rieu나 Temple 같은 신학자들은 이 말을 good 이라 번역하지 않고 beautiful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성품이 선하신 분입니다.  행동이 선하신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양들을 대하는 목자로서 선하신 분입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자로서 다른 목자에게 없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라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목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한 분밖에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목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첫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양 때문에 억지로 죽음에 내몰린 게 아닙니다.  양을 위한 자원적인 죽음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8)  

주님은 자기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 중에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버릴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영혼의 생명은 절대로 손대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뿐 아니라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전권을 스스로 가지고 계십니다.  물론 주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시켜서 억지로 죽으신 게 아닙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가룟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공회가 사형을 결의하고 빌라도가 사형을 확정함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 스스로 양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택하신 죽음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  

‘버리노라’(tivqhmi)는 말은 ‘세금을 지불한다’ 혹은 ‘옷을 벗어 버린다’는 의미로써 사용된바 있습니다.  양들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고, 양들의 죄를 씻어버리시기 위해서 죽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 허물된 인생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은 위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주님의 죽음은 양들의 죄를 대신하는 죽음, 대속적인 죽음입니다.   어떤 영국사람 하나가 캘리포니아에 금광을 캐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는 오래지 않아서 금광을 발견하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돈도 벌고 자리를 잡았으니 캘리포니아로 오라는 말과 함께 얼마간의 돈을 보냈습니다.  아내와 아이는 기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배에서 불이 났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불을 끄기 위해서 우왕좌왕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은 마침내 배 전체로 번지고 화약고에 불이 옮겨졌습니다.  선장은 구명 보트를 준비해서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보트는 만원이 됐습니다만 아내와 아들은 거기에 타지를 못했습니다.  보트에는 단 한 사람밖에는 더 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한번 품에 꼭 껴 안은 후에 보트에 태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네가 살아서 아버지를 만난다면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다고 말해야 된다”  주님의 죽음은 이런 모정과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합니다.  
  
주님의 죽음은 양의 생명만 살리시고 끝난 죽음이 아닙니다.  양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 살기 위한 죽음입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7)  

이 말씀을 직역하면 살기 위해서 죽는다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이 양 대신 죽으심으로 죽을 양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죽은 채로 남아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영원한 목자가 되셔서 양과 함께 길이 살게 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먼저 죽음으로써 자기 양들을 살려 놓고, 이차적으로 자기 자신도 살아나심으로써 영원히 함께 살게 됐다는 뜻입니다.  양과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 일시적으로 죽으신 죽음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고귀한 죽음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목자로서의 양에 대한 무한책임을 보여줍니다.  보통 목자들에게도 양을 지키고 보호할 책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으면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지키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삯군에 비유하셨습니다.  삯군은 품삯 때문에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에 따라 책임 한계가 정해집니다.  삯군 목자는 무조건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받는 품삯만큼 일한다는 것뿐입니다.  미쉬나에 보면 삯군의 법적인 책임 한계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품군으로 고용된 목자는 양을 지킬 책임이 있다.  늑대 한마리가 공격해 온다면 양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두 마리의 늑대가 불가항력적으로 공격해 온다면 어떤 손해를 입어도 책임이 없다.  삯군은 양이 불구가 되거나 흩어지거나 죽은 것에 대하여 맹세만 하면 된다.  다만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것에 대해서는 보상의 책임이 있다.”  삯군은 양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양에 대한 소유자로서의 긍지나 깊은 애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리가 오는 것을 ‘보고’도 도망칩니다.  양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망칩니다.  

결과적으로 양은 사정없이 찢기고 흩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삯군이 아닙니다.  양의 주인입니다.  양은 곧 주님의 재산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소유하신 긍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양에 대한 책임, 양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이리가 와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양을 지켜냅니다.  
  
그 결과 양은 아주 안전합니다.  터럭 하나도 상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호 받습니다.  주님은 우리 육체를 보호해 주십니다.  온갖 사망의 골짜기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죽을병에서, 교통사고에서, 가스 폭발 사고에서, 전쟁터에서, 깡패나 강도에게서 지켜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재산도 지켜주십니다.  도적이나 사기꾼이나 악한 자들에게서 불의의 재앙에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을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생명을 지켜 주십니다.  명예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지켜주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사단의 유혹이 제아무리 심하고, 죄악이 사방에 있다 해도 주님은 넉넉히 우리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양들에게 대해서 무한책임을 지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구원, 주님의 보호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나는 내 양을 안다

둘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잘 아십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4-15)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도 예수님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과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다 알지는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 대하여 다 아십니다.  자기 양이 몇 마리가 되는지 혹은 몇 마리가 늘어나고 줄어드는지 다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양 하나 하나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 성품을 아시고 마음에 품은 생각을 아십니다.  

나다나엘의 진실하고 의로운 인격을 한눈에 알아 보셨고(요1:47), 가룟 유다의 마음에 품은 배신의 감정을 아시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삭개오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할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돈을 사랑하는 부자 청년의 마음을 아시고, 길에서 누가 크냐고 논쟁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헤아리시며 아픔과 고통을 아십니다.  주님의 옷깃을 만진 12년 혈루증 여인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불구자의 갈망을 아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삶의 갈증을 아시고, 다소 사람 사울의 열심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양들을 잘 아시기 때문에 양들에게는 무한한 유익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더 잘 알까요, 부모가 자식을 더 잘 알까요?  부모가 더 잘 아는 것이 당연합니다.  갓난아기의 엄마는 아이 울음소리만 듣고 모든 처방을 합니다.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젖을 줍니다.  어디가 아픈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갑니다.  아이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이 잘 자라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보다 주님이 우리를 천만 배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종종 교통사고 중에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감사 헌금을 바치는 것을 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차가 망가지고 앞이 다 찌그러져서 용접기로 절단을 하고 몸을 빼냈는데도 다치지 않았다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교통사고 사상자(死傷者)가 나옵니다.  운전대를 잡고 다니기가 겁이 납니다.  그럴지라도 마음을 편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항상 우리 의 위험한 형편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4)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5)  

주님은 우리 육체가 병 걸리기  쉬운 것을 아시고 온갖 죽을병에서 지키십니다.  주님은 내가 마음 약한 것을 아시고 마음에 의지를 주십니다.  내가 사랑이 얼마나 빈곤한지 아시고, 사랑의 양식을 주십니다.  지혜가 부족하니 지혜를 주시고, 유혹에 약함을 아시고 막아주십니다.  주님은 야곱의 빈곤함과 수고를 아시고 양떼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굶주림을 아시고 만나를 주시고, 갈증을 아시고 반석의 물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시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피차 영적으로 깊이 아시듯이, 주님은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의 마음을 잘 몰라준다고 원망을 듣습니다.  자식의 마음을 모르니 좋은 부모가 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찬송가 415장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맘을 뉘 알아 주리요.  내 맘을 위로하사 평온케 하시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르고,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사나운 풍랑 일 때 날 지켜 주시고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되시네.”  주님이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 중에도 여전히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게는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셋째로,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자기 양들을 불러내십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주님의 양들이 많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주님 목장의 크기입니다.  주님 목장은 아주 넓습니다.  유대인만 포함하는 목장이 아닙니다.  본문의 ‘우리’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교회를 의미하고,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란 앞으로 구원 받을 이방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을 하시더라도 유대인만 구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조차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성령이 명령하시니까 그제서야 깨닫고 나섰습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을 부르시기 전까지는 복음은 유대인의 것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깨뜨리셨습니다.  

구원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 인류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계획하신 일입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유대인만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천하 만민”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전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두 번째 교훈은 양들의 소유권입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도 ‘내 소유’라고 못 박으셨습니다.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우리 안에 든 양들’은 이미 구원받은 교회내의 성도들을 말하고,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이란 아직 구원 받지 못했지만 장차 구원 받을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적부에 이름이 오르고 현재 출석 중인 교인들만 주님의 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한 숱한 사람들까지도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들의 형편이나 모양은 아주 다양합니다.  다소의 사울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지독하게 박해하고 훼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삭개오나 마태처럼 부패한 관리도 있습니다.  오네시모처럼 주인의 재산을 훔쳐서 뺑소니 친 도둑도 있고, 강도질 하고 사형당한 우편 강도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타락한 여자도 있고, 귀신들려서 공동 묘지에 쇠사슬로 묶여 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누구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단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라고 버려서는 아니 되며, 귀신 들렸다고 버려서도 안 됩니다.  죽을 날이 임박한 노인이라고 전도를 포기하지 마세요.  성격이 개 같은 사람이라고 제쳐놓지 마세요.  내게 피해를 입힌 원수라고 해서 지옥 자식으로 단정하지 마세요.  그들 중에도 주님의 양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 번 째 교훈은 목자의 유일성입니다.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계획하신 교회는 개 교회 주의나, 지역주의적인 교회(local church)가 아닙니다.  전 세계의 양들이 한 목자 아래 모이는 만국 교회(universal church)입니다.  

천국에는 목자가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도 하나밖에 없고, 양들의 소속도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히 통일된 하나의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세계 교회의 개념보다는 교파와 개 교회 주의가 퍼져있습니다. 교회들이 선의의 경쟁보다는 세속적인 경쟁을 하고, 예수에게 소속된 것을 자랑치 않고 특정 인간에게 소속된 것만 자랑합니다.  우리는 좁은 우리 안에서 자만하고 뽐내는 편협한 교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넓고 넓은 들판에 한데 모인 신령한 양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자랑 삼는 만국적인 양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를 따르고 있는가?

나는 선한 목자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리들의 두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19-21)  

한 무리는 예수님이 귀신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반대편의 무리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느냐고 예수님을 옹호합니다.  전혀 다른 극과 극의 반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수께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고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들이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든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목자십니다.  죽음으로써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하십니다.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 형편을 속속들이 아시고 선처해 주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단 한 분밖에 없는 선한 목자십니다.  
  
오늘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지 여부입니다.  아무리 선한 목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구주로 영접하셔서 주님의 양이 되시고, 주님을 따르는 축복된 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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