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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을 옮기는 겨자씨 믿음 (마 17: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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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기는 겨자씨 믿음 (마 17:14-21)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놀라운 예수님의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을 때에 산 아래에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귀신에 들려 간질을 앓는 한 아들이 아버지가 데려와서 고쳐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치료되지가 않았습니다. 난감해 하던 바로 그때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간질하는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와서 꿇어 엎드려 가로되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간질하는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몇 가지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1. 간질하는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질병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어려운 문제의 질병에 걸렸을 때에 어떻게 해결받을 수가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항상 말씀드립니다마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염려해 봐야 해결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고로 어떤 문제든지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오는 것 자체가 바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문제를 주님에게 가지고 나오시면 우리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2) 꿇어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바버지의 이런 태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겸손하게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희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사랑하는 아들을 치료해겠다는 간절함과 희생을 말해 줍니다. 이런 행동이 주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과 간절함이 있습니까? 

3) 사실대로 말했습니다.(15절) 

이 아버지는 자식이 귀신들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있던 그대로를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왔는데 고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불쌍히 여겨서 고쳐달라고 하소연 합니다. 그 아들에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합니다. 그때에 주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사실 그대로 말했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나에게는 이런 약점이 있으니 나를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있는대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17-20절) 

제자들을 책망하심이 다른 때보다 훨씬 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제자들을 양육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들의 믿음이 너무 한심하여 심하게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기대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은혜와 복을 주었는데도 여전히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실 때에 책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책망을 받는 분들이 없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도 믿음이 자라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이유 중에는 믿음에 대한 책망인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믿음을 잘 보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크신 능력과 갖가지 역사를 생생하게 목도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마 10:1이하)에 보면 일찍이“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도록” 주님으로부터 위임을 받고 파송을 받아서 그런 놀라운 역사를 간직했으며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안에서 깨어있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약해져서 아무런 효력도 없으며, 무능한 성도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 광야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탐을 할 때에는 그 믿음을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고로 그 은혜와 축복의 땅을 바로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믿음으로 무장하고 깨어있어서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기도하여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면서 항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의 믿음이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와 같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간직하지 못했다는 책망입니다. 그렇게 작은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이지만 그 속에 생명력이 있기에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라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생명력있는 믿음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사상이나 지적 동의 정도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인격적인 신뢰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인격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에 준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3) 믿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믿음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문제라 할지라도 놀라운 역사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이 사건으로 초라해질 것을 염려하지 말고 자신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그 능력만을 의지하여 기도하였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이 깨어 기도에 힘쓰고 생명력있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어서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게 하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3.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말씀대로 신앙생활이 되려면, 

첫째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 중서부에 반다마틴이라는 소년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 때 불행한 사고를 당합니다. 아버지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단 쇠가 손위에 떨어져 오른 손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 나가고 엄지손가락 하나만 남았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손가락이 없어 연주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바꾸어 바이올린을 켜리라는 결심하고 각고의 노력과 연습을 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카운티 교향악단의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말씀을 믿고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20절에 보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아주 곤란한 문제 해결하는 것을 산을 옮긴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즉 산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등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는 말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불가능하게 보이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믿음을 의미하는데, 사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런 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믿음으로 수없이 해결하여 왔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절대가능의 신조를 가지고 일생을 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이 앞에 가로막힌다 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으리라. 나는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산에 오르리라. 아니면 산밑에 터널을 파고 통과하리라.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산을 변화시켜 금광으로 만들리라.” 

여러분 안에 있는 믿음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비록 겨자씨처럼 작아도 활용하기만 하면 큰 힘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그대로 묻어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묻어두면 결국은 없어지거나 썩어서 다시 활용할 수 없을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 아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리빙스톤 선교사가 그 부락을 방문하게 되어 고쳐 보려고 하였으나 가망이 없었습니다. 다급한 리빙스톤은 죽어 가는 추장의 아들을 붙들고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장이 기도하는 리빙스톤을 치면서 “당신이 기도할 지라도 내 아들은 이미 죽었소!”. 보니 아들은 숨이 끊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리빙스톤은 “주여, 제 믿음을 보옵소서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소생케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눈을 떴을 때 그 아이가 몸을 틀더니 일어나 앉는 것입니다. 이것이 리빙스톤의 선교적 역사에 대단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후 리빙스톤은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는 구절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가 아프리카 전역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은 병든 자요,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자기는 가진 것 없어도 오직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 하신 말씀만 믿고 무조건 붙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너무나도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주한 교인들이 잃어버리는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무엇인가에 쫓겨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작전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승패는 얼마만큼 기도생활을 늘릴 수 있느냐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의 승패는 기도의 방패가 있는가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꼼짝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도행전 12장이 잘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끊어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문제에 부딪힐 때 옥문을 열어 제키며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끈들을 자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의 능력입니다. 

셀교회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랄프 네이버 박사는 주님이 세우시기를 원하는 교회들을 향하여 권면합니다. “첫째, 기도에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라. 둘째, 교회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의 기도 리더쉽을 키워라. 셋째, 교회를 능력 있는 기도 공동체로 만들어라” 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반드시 기도의 부흥으로 시작되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역사가의 글 가운데 이런 글이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즉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많아졌으나 예수님의 이름, 예수 이름의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라고 비평합니다.

교회 건물들은 저마다 커지고 웅장해졌습니다. 교인들도 많아졌습니다. 재력도 있어 보입니다. 유명인사들도 교회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은 쇠약해져만 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본문에도 비극적인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여기의 제자들이란 말을 교회로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 데려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내가 교회에 문제를 가져와도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변화시키지 못하더이다. 능히 바꾸지 못하더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 세상을 고칠 수 있느냐,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없음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미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에 성경 공부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니라 교회는 가족이요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게임이 아닙니다. 소풍놀이가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며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는 권세를 제자들에게 먼저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흉내내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진 사람하고, 예수 믿는 것처럼 흉내내는 사람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성령 충만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가치관과 모든 삶이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졌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코드가 빠져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권능에 연결시키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내 신앙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내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내 기도를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자녀의 삶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찬양이 우리의 비젼이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기만 하면 능력의 바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현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부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숨을 거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 능력을 받아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속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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