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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강 가에 서 있는 사람 (왕하 2:6-8, 마 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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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 가에 서 있는 사람 (왕하 2:6-8, 마 3:13-15)

제2경전이라는 예루살렘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비트와 그의 친척 라구엘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변장한 천사를 보내어 어린 라구엘의 여행길에 동행하게 하셨습니다. 천사는 홀로 여행길에 나선 아들을 걱정하는 라구엘의 아버지에게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입니다”라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라구엘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라구엘을 후대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행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잠시 티그리스 강가에 머무는 동안 전혀 뜻하지 않은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라구엘이 발을 씻으러 강가에 내려갔을 때, 커다란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올라 그의 발을 물려고 하였습니다. 라구엘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천사가 소년에게 “그 물고기를 잡아! 절대 놓쳐서는 안돼”라고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라구엘은 물고기를 잡아서 뭍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천사가 라구엘에게 “그 물고기의 배를 갈라서 쓸개와 염통과 간은 꺼내어 잘 보관하고 나머지 내장은 다 버려라. 그 쓸개와 염통과 간은 약으로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토비트 6:4). 소금에 절여 놓았던 물고기의 쓸개 등은 훗날 라구엘의 아내가 될 사람과 장인의 병을 고치는데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라 성경과 같은 가치는 없지만 재미있는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천사와 같이 든든한 보호자를 두고 함께 인생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위험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강가는 위험과 축복이 늘 함께 하는 곳입니다. 강가는 늘 위험이 있는 곳이지만 그 위험이 알고 보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위험한 것 같지만 강가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곳입니다. 
  
저는 어릴 때 늘 강가에 가지 말라는 부모님의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서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영을 못 배웠습니다. 물에 빠져도 건지러올 때 까지 겨우 버틸 정도밖에 수영을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강가는 늘 풍요한 꼴이 있고, 푸른 나무가 자라고, 축복의 상징인 곳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어주신 에덴은 강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창세기 2:10에는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에덴에는 네 강이 있었습니다. 첫째 강은 비손이고, 둘째 강은 기혼이고, 셋째 강은 힛데겔이고, 넷째 강은 유브라데입니다. 비옥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강을 중심으로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에는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강이 한 가운데에 흐르고 있습니다. 에덴과 천국은 다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인데 강을 중심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강가는 생명이 흐르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수 열매가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강가는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생명수가 있습니다. 생명수에는 온갖 열매가 있는 풍요한 곳입니다. 
  
성경에서 요단강은 참 의미 있는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던 얍복강은 요단강의 지류입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일곱 번 들어가 씻고 몸의 한센병이 깨끗하게 나은 곳도 요단강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곳도 요단강입니다. 그 강가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섰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한 요단강가로 가서 요단강가에 섰던 두 사람을 통하여 주시는 오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제자가 스승을 떠나지 않고 요단강 가에 서 있습니다. 

열왕기하 2:6에는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고 합니다. 

스승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는 길갈에서 시작하여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향하면서 제자가 스승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스승의 영력을 구하고 있습니다. 스승인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라고 하면서 엘리사를 따라오지 말고 머물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제자인 엘리사는 스승을 떠나지 않고 요단까지 따라갑니다. 요단강가에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물이 갈라지고 마른 요단강을 건넙니다.  
  
제자인 엘리사는 마침내 스승 엘리야의 반복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스승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의 결과로 스승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스승인 엘리야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간절하고 아름다운 자세를 거둬준 것입니다.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좋은 스승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온갖 궂은 일을 맡아서 하며, 구박을 참고, 인고의 세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끈기가 엘리야를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끝까지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인내는 갑절의 성령에 대한 열정입니다. 
  
벧엘 사람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모압에서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오르바와 룻, 두 며느리와 함께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따라오지 말고 모압에 살기를 권했습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모압에 머물렀지만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룻 1:16) 라고 하면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자기도 죽겠다고 하며 따라왔습니다. 이런 결단과 열정으로 룻이 예수님의 족보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내’(patience)와 ‘열정’(passion)이란 두 단어는 라틴어의 한 어근 ‘pasio’(견디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인내라는 것은 열정을 포함합니다. 인내하는 자는 열정을 가진 자입니다. 자신의 일에 열정이 없으면 절대 인내할 수 없습니다. 열정을 가진 자만이 인내로 자신의 일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달팽이는 강한 끈기로 방주에 도착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끈기는 방주에 도착하려는 강한 열정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다림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참을성 없는 사람을 환자(patientia)라고 부릅니다. 환자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인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은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인내심은 그 자체가 건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삼으신 목적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3:14-15에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합니다. 제자를 삼으신 목적이 세 가지입니다.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 가운데 제1목적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대단한 일을 하고, 권능을 행하고, 예수님을 도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떠나지 않고 주님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막 10:28)라고 하였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하였습니다. 늘 함께 있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위기 앞에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하였습니다.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함께 있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갔습니다. 장군이 자신에게 맡겨진 지방에서 벗어나 밖에서 군대를 이끄는 것을 금한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의 행위는 결국 로마 원로원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3년에 걸친 내란 끝에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어떠한 행동과정으로 이끄는 첫 발걸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결단과 행동을 말합니다. ‘루비콘 강’은 생사의 갈림길입니다. 강은 건너므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강은 건너므로 친화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의 강가에서 스승의 옷을 취하여 우리의 영원한 스승과 친화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제자와 스승이 요단강이 갈라진 마른 땅 위로 건넜습니다. 

열왕기하 2:8에는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고 합니다. 요단강은 갈라질 뿐만 아니라 마른 땅이 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엘리야시대에는 이런 기적이 없었습니다. 이 기적은 엘리사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기적이었습니다.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합니다. 옷을 던졌다는 것은 자신의 업무를 인계했다는 뜻입니다. 엘리사가 스승의 옷을 선택하였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선지자직을 위임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물이 갈라진 역사는 성경에 몇 차례 등장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습니다(출 14:16).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가른 다음 건너가게 하였습니다(수3:13). 모세와 여호수아는 스승과 제자의 사이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갈랐고,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갈랐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사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입니다. 이들은 이제 요단강을 가른 것입니다. 
  
강을 건넌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의 모형입니다. 요단강은 갈릴리와 사해를 잇는 강입니다. 이 강은 팔레스타인의 젓줄입니다. 풍요를 가져다주는 강입니다. 축복의 강입니다. 야곱이 씨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곳입니다.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던 곳입니다. 그리고 영원을 향하여 건너야 할 곳입니다. 바로 이 강을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요단이 가지고 있는 요건은 강의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단이 나의 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요단강과 같기를 바랍니다. 
  
요단을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을 합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난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며 축복입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종말은 요단을 건너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요단 건너편에서 가나안을 보게 하시고 들어가지는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 모세가 건너지 못했습니까? 모세가 들어가지 못할 만큼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필요하여 세우신 일꾼이 다릅니다. 이제 모세의 역할은 끝이 나고 여호수아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은 애급에서 간신히 나와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금송아지 만들고, 하나님을 불신하므로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실패한 일입니다. 출애굽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끝까지 완전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근신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자로 ‘생’(生)은 소(牛)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사’(死)는 저녁(夕)에 갑자기 나타난 칼(匕)을 의미합니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잘 건너면 사는 것이지만 건너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요단강을 잘 건너면 사는 것입니다. 잘 건너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광야생활의 끝에 갈라지게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강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되게 하신 강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건너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요단강은 여전히 출렁거리는 거센 강입니다. 
  
그래서 택함을 받은 우리는 이 찬송을 부릅니다. “그 요단강을 내가 지금 건넌 후에는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요단강을 건널 때에 겁이 없게 하시고 저기 뵈는 가나안 땅 편히 닿게 하소서”.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해변의 한 교회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아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탈리아에 가면 구원의 여망이 물거품이 될 게 불을 보듯 뻔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건너간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대주교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위대한 성자가 탄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중해를 건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는 생사의 갈림길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6에는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음부에 간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다고 합니다. 한번 음부에 버려지면 다시 생명으로 건너오지 못함을 말합니다. 죽음을 건너서 생명에 다다라야 합니다. 건너지 못하면 다시는 건너올 수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면 가나안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결론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시 대덕산 아래 검룡소입니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는 백두산 천지입니다. 강은 개천이나 시냇물을 다 모아서 바다로 흘러 보냅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다 모아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강입니다. 교회의 주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갑절의 영감을 주는 영적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천국으로 건너가게 하는 강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위험이나 부족함이 없이 마른땅처럼 건너게 합니다. 
  
우리교회가 항상 좋은 영적 스승을 만나는 요단강가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스승과 함께 요단을 건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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