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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하나님이 쓰신 용기의 여인, 룻 (룻 1:16-18, 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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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신 용기의 여인, 룻 (룻 1:16-18, 마 1:1-6)  

미국에서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온 한승우 목사가 청년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였다. 석사 과정을 SMU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마치고 박사 과정에 지원을 하는데 세 군데나 떨어졌다. SMU에서 추천을 해주는 교수님이 3명이고 심사위원이 그 3명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조차 떨어졌으나 한 목사는 TCU(Texas Christian University)에 원서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추천서를 받으러 SMU 교수님들을 또 찾아갔더니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격려해 주시더라는 것이다. 

한 목사는 결국 그 TCU의 pre-박사과정에 합격을 했는데 본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 일부분이기는 하나 장학금도 받고 생활비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를 쓰시는 하나님은 그의 도전하는 용기를 보시고 쓰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미국에 건너갈 때부터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가 있었기에 실력이 부족해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데서 오는 용기가 있었기에 이렇게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삶을 비관하고 삶을 체념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마귀가 쓰는 사람은 낙담하는 자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용기의 사람이다.  

오늘 룻이란 여인을 보라. 그는 초상을 당한 이후에도 온통 주저함과 머뭇거림이 없는 여인처럼 보인다. 그 용기 때문에 하나님은 룻을 사용하셨다. 구속사에 들어가는 이름이 되게 하셨고 고목나무에 싹이 나는 회복의 여인이 되게 하였다. 룻이 보인 용기는 어떤 것인가?  

1. 모압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귀화하는 용기 (룻1:22)

룻1:22을 보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라고 하였다. 

룻이란 여인이 베들레헴으로 오는 것은 이민이다. 룻2:11을 보면 이 룻의 이야기를 듣고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씌여 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기서 이민의 과정을 엿보게 된다. 즉 룻의 이민이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부모를 떠나고 고국을 떠나는 결단이었다는 점이다. 부모와 고국, 혈육으로 맺어진 인연인데 어찌 포기할 수 있는가? 조상이 살아온 고국 산천을 잊을 수 있는가? 그런데 룻은 자기 삶의 고향을 포기한다. 시부모와 남편의 고국인 베들레헴으로 오기 위하여 자신을 얽어매는 것들을 다 내려놓는다.

룻이란 여인이 보여주는 귀화를 위한 이 포기의 삶이란 용기 중의 용기다. 어떤 힘과 어떤 삶의 동력이 이 여인을 맹렬하게 만들었을까?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2. 밭으로 나아가 곡식 알을 줍는 노동의 용기 (룻2:3)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가난한 살림을 해소하기 위해 밭으로 나간다. (룻2:3) 시모에게 허락을 득하고 밭으로 나간 룻은 베는 자는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다. 룻이 곡식을 베러 밭에 간 것이 아니라 떨어진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룻이 보여주는 노동의 용기다.

① 룻은 과부다. - 남편이 죽어서 아무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사회적 약자다. (룻1:5)

② 룻은 소녀다. - 룻2:5에서 보아스가 룻을 보고 “이는 누구의 소녀냐?”하고 물었다. 룻2:6에서 사환이 대답한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라고 하였다. 룻은 젊고 어린 과부였음이 틀림이 없다.

③ 룻은 겨우 이삭을 줍는다. - 추수밭이 남의 밭이기 때문이다. 룻은 곡식을 베는 일꾼으로 고용되지 않았다. 그의 일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사람에게나 허락된 이삭 줍기의 일이다. (레19:9~10, 23:22) 

그러나 밭에 나아가 일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과 여건을 공개하는 일이다. 나는 약하고 못 사는 여자라고, 외국인이라고 신분이 공개되는 일이다. 거지처럼 떨어진 이삭이나 주워서 모아야 되는 일, 그 일을 위해 나가는 것이기에 특별한 용기의 여인이다. 사람이 소심하고 상처가 깊으면 마음이 왜곡되고 밭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주목 받는 일이 아니라고 다른 일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룻은 밭으로 나갔다. 이삭을 줍기 위해서 나갔다. 참으로 존경스럽다. 

나는 어렸을 적에 곡식 알을 주웠던 기억이 있다. 곡물 가게 앞에서 곡물 차량이 떠나고 나면 곡물을 받고 삶은 알곡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흘린 낱알을 줍기 위해 전봇대 뒤에 서서 어슬렁거리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용기가 없으면 주울 수 없다. 다른 동료들에게 다 빼앗기고 곡식은커녕 모래만 담게 될 수도 있다. 밭으로 나아가 곡식을 줍게 되는 룻의 노동의 용기는 정말 매력적이다. 

나는 우리 교회 청년들이, 청장년들이 삶을 향해 룻과 같았으면 좋겠다. 무위도식하면 쓰임 받지 못한다. 나는 우리 자녀, 우리 며느리, 우리 성도들이 일의 중대사를 따지지 않고 낱알 줍는 일이라도 나의 일로 알고 팔소매를 걷어붙이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쓰임받기 때문이다.
  

3. 추수밭의 주인되신 보아스에게 청혼하는 용기 (룻3:7)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룻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룻으로 하여금 삶의 안식, 즉 가정을 세우도록 할 필요를 느낀 시모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의 곡식단 더미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룻3:7~8을 보면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놀라 잠이 깬 보아스는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고 룻은 보아스의 옷자락을 펴 자신을 덮어주기를 구하였다. 이 청혼의 장면이 너무나도 놀라운 용기 중의 용기다. 

보아스는 추수밭에 일하는 사환이 아니다. 추수밭의 주인이다. 그런데 룻은 사환도 아니다. 가장 헐벗고 가난하며 남편도 사별한 과부 여인이다. 그런데 과부 룻이 어떤 용기로 결단을 했는지는 모르나 감히 추수밭의 주인의 발 아래 가서 눕는다. 파격이다. 인종의 벽도 있고 신분의 벽도 있고 사회적 지위의 벽도 있고 모든 면에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을 벽이 있는데 벽을 넘는다. 그 벽을 부숴뜨린다. 벽을 문제 삼지 않는다. 룻이 도전한다. 청혼을 여자 쪽에서 시도하였다. 

룻3:3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의 준비하는 과정을 시모의 도움으로 철저하게 하고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취한 것이다. 참으로 꿈꾸기 어려운 용기다.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특별한 용기다. 거절 당하면 끝장이다. 그런데 실패의 확률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용기가 가능할까? 

결국 룻은 결혼의 대상자가 된다. 현숙한 여인(룻3:11)이란 말을 듣는다. 결국 축복의 삶이 열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떻게 무모할 만큼 용기 백배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용기 훈련 학교를 나왔는가? 나면서부터 특별한 여인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 여인의 삶의 용기란 단 한 가지다. 단순한 비전 때문이다. 그 비전이 여인을 강하게 세웠다. 그 비전이 여인으로 하여금 전진하게 하였다. 룻1:16~17을 보면 그 비전이 나온다.  


첫째, 어머니 섬김의 비전

룻1:16中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룻은 시집 온 한 여인으로서 여자의 길을 결단한다. 어머니와 같이 동행하고 어머니와 같이 동숙하며 어머니와 같이 동사(同死)할 것이다. 가난한 시어머니를 섬기려는 룻의 비전은 눈물 겨운 비전이다. 


둘째, 하나님 섬김의 비전

룻1:16下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에겐 신앙의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신앙으로 살려는 하나님 섬김의 비전이 있기에 환경이나 삶의 조건들이 장애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셋째, 동화의 비전

룻1:16下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룻은 히브리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이방 여인인데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누리고 가져야 할 것이 신앙의 보화이기에 히브리 백성이 되려는 동화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이 세 가지 비전은 한 마디로 말씀 섬김의 비전이다.

모압 여인 룻은 이방인 출신이지만 시집을 와서 등 너머로 비전을 받았다. 모압 여인으로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가정의 효, 가문을 세워가야 되는 비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보이라는 비전을 받았다. 이 모든 비전이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말씀의 명령이었다. 룻은 말씀의 명령을 명령대로 받고 싶어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말씀대로 살아보고 싶은 룻, 그 말씀 섬김의 비전은 모든 열등감과 불리한 과거와 여자를 무시하는 차별을 잊게 만들었다. 결국 룻의 용기의 동력은 말씀 섬김의 비전이었다.

이 세 가지 비전을 하나로 줄인다면 말씀 비전이다. 베들레헴으로 오는 것도 말씀 때문이고 밭에 가는 것도 말씀 때문이고 결혼을 하고자 하는 것도 말씀 때문이다. 그 비전이 있기에 남이 갖지 못하는 용기가 있다. 결코 식지 않는 열정이 있다. 말씀 비전이 있기에 현실 앞에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움직인다. 결국 하나님은 룻을 기뻐하시고 그 비전이 성취되도록 이끄셨다.

하나님은 세밀하게 룻을 도우셨다. 하나님은 ①추수 때가 되도록 시간을 분, 초까지 준비하셨다.(룻1:22) ②추수밭에 추수하도록 장소와 일터를 준비하셨다.(룻2:3) ③추수밭의 주인이신 보아스란 사람을 준비하셨다.(룻2:4~16)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비전의 여인을 적극적ㅇ로 이끄셨다. 내가 심지를 뽑고 내가 결단하여 나가는 것 같아도 마음의 경영을 내가 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이것이 룻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또 목회하면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용기의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 그 용기가 말씀을 섬기는 비전 때문에 분출되는 용기라면 더욱 더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신다. 여자인가, 남자인가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의 문제도 아니다. 정식 직원이냐, 비정규 직원이냐 가 삶을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남편이 죽은 과부냐, 남편이 있는 여인이냐 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누구이든지 간에 말씀을 섬기려는 비전이 중요하다. 

주님이 말씀해 오시면 나의 의지를 꺾고 따르려는 삶의 비전, 우리의 교회 시대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섬기려는 비전이 있는가? 쓰임 받는 유무를 결정한다. 그 비전이 한 겹, 두 겹, 열 겹 가로막는 삶의 고난과 장벽을 뛰어넘는 용기로 나타나기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속사에 쓰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인 마태복음은 이방인 룻이 쓰임 받아 그리스도를 오게 하시는 여인이 되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러분도 쓰임 받을 수 있다. 룻은 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성도의 모형이다. 

맥추절!
보리 추수밭에 나간 룻처럼 내게 비전이 있어 용기의 사람이 된다면 하늘의 족보에 내 이름이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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