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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여인을 깨끗케 하신 주님 (애 3:23-33, 막 5:21-43, 고후 8: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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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인을 깨끗케 하신 주님 (애 3:23-33, 막 5:21-43, 고후 8:7-15)  

<회당장 야이로 VS 혈루증 여인>
       
오늘은 오순절 후 다섯 번째 주일이자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012년 상반기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마가복음의 중심 사건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열두 살 된 딸이 죽게 되자 회당장이라는 신분까지 잊어버리고 예수님께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자기 집으로 급히 가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제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또 하나의 치유 사건이 일어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 받은 사건이지요.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일 분 일초가 급합니다. 어서 빨리 집으로 가서 죽어가는 딸을 살려야 합니다. 이 다급한 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이 고침 받은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과 그 집에 도착해서 고치는 사건 중간에 끼어 있는 삽화로 나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가지 차유 사건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 두 치유 사건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앓는 여인입니다. 먼저 회당장은 남자이고 혈루증 환자는 여자입니다. 회당장은 남자인데다가 회당장이라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혈루증 여인은 이름조차 밝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신분이 낮고 가난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회당장 야이로는 모든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예수님께 나갑니다. 혈루증 여인은 혹시라도 들킬세라 쥐도 새도 모르게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여인은 혈루증, 오늘로 말하자면 자궁암 같은 자궁 출혈이 계속되는 난치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실제로 26절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봤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습니다. 12년 동안을 그렇게 했으니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축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여인 역시 병을 고치려고 재산을 다 소모해서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앓는 여인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정함’과 ‘부정함’과 관계에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 시대의 회당장은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는 지도급 인사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정함’과 ‘부정함’을 가려내서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정함’과 ‘부정함’은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치유 사건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구약의 율법은 부정한 것은 전염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금합니다. 그래서 레 5: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모세의 율법은 특히 세 가지 형태의 부정을 중대하게 생각합니다. 나병과 유출병, 즉 몸에서 고름이나 피가 흘러내리는 병, 그리고 주검, 즉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은 시체를 부정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나 유출병 환자, 그리고 주검과의 접촉을 철저히 금했습니다(민 5: 2-4). 

이 세 가지 금기를 어길 경우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도록 했습니다. 나병이나 유출병, 그리고 주검에 닿기만 해도 부정을 타서 공동체 밖으로 추방당할 정도라면, 나병에 걸린 당사자나 유출병 환자는 자기 집이나 동네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나병 환자나 유출병 환자, 시체에 접촉해서 부정을 탄 사람들을 가려내서 예배는 물론이고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회당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함과 부정함을 예민하게 따져서 추방 결정을 내려야 할 회당장 야이로 자신에게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딸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 꽃처럼 활짝 피어나야 할 나이에 시름시름 앓더니만 죽게 되었습니다. 만일 딸이 죽으면 그 시체를 만지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런 율법 규정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하는 딸을 살려내야만 한다는 부성애가 끓어올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체면과 사회적 신분을 내려놓고 못 고칠 병이 없다는 예수님께 찾아가 넙죽 절을 하고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TOUCH하니 깨진 관계가 회복되고>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다급하게 가는 길목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은밀하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건이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거룩한 사람이 입은 옷을 성스럽게 여겨서 그 옷을 만지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민간 신앙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미신인 셈이지요. 이 여인 역시 예수님이 옷자락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28절). 
       
지금 이 여인의 처지는 기가 막힙니다. 혈루증, 끝없이 하혈을 계속하고 불결한 냄새가 납니다. 율법이 부정한 사람의 대명사로 취급하니 예배도 드릴 수 없었고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어 모든 인간관계가 끝나고 사회적으로 죽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는 공개적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군중 속에 몰래 끼어들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입니다.   
       
여기 28절에 나오는 “TOUCH!”, “손을 댔다”는 말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손을 댔습니다(23, 41절). 하지만 혈루증 여인의 경우에는 자기가 손을 댔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손을 대든, 주님이 우리에게 손을 대든, TOUCH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TOUCH할 때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TOUCH가 일어나는 TOUCHY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혈루증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순간 29절에 보면 “혈루의 근원”이 말랐습니다. 근원적인 치유가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다시는 하혈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뿌리가 완치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즉각 당신의 능력이 빠져나가신 것을 아시고 누가 옷에 손을 댔느냐고 묻습니다. 여인이 두려워 벌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에게 하셨던 말씀이 34절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에서 너무나 중요한 말이 “딸아”라는 말이지요. 그동안 혈루증 여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피대상 제1호입니다. TABOO, 금기 제1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혈루증을 앓으면서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로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 등등 일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단지 혈루증이라는 병만 고친 것이 아니고 깨어진 일체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죽어가는 딸과 회당장 야이로 사이의 애틋한 부녀관계와 똑같이 혈루증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부녀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야이로에게 12살 먹은 딸은 무슨 일을 해서든지 반드시 살려야만 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랑하는 딸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혈루증 여인은 기어코 고쳐야 하고 행복해져야 할,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딸이었습니다. 
       
여인이 기어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예수님 역시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을 기어코 알아내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내시고자 한 것은 당신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이 아니라 딸입니다. 단순히 기적을 체험한 아무개가 아니라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인격적인 딸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세상이 뺏을 수 없는 평강을 얻고 행복해져야 할 딸을 찾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역의 유지인 회당장 야이로에게만 관심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무 이름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혈루증 여인까지 보살피십니다. 누구의 말대로 이제 혈루증 여인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고 모든 사람이 경멸하던 기피대상 1호, 즉 “NOBODY”(아무 것도 아닌 사람)에서 “SOMEBODY”로(어엿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 “EVERYBODY”(예수님의 전부)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기 이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3년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는 철저히 특별한 개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특수사역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소녀를 살리시기 위해 1초라도 아끼며 다급하게 서둘러야할 형편이었지만 혈루증 여인의 아주 특별한 처지를 헤아려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마치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듯이 사랑하십니다. “내 딸아!” “내 아들아!” 오늘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셔서 불러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정→부정”에서 “부정→정함”으로>
       
유출병에 걸린 여인을 부정하다고 판단하고 추방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야이로가 놀라운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통념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일체의 율법적인 편견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일초가 급하게 죽어가는 딸이 있는 집으로 가야 하지만 이 방해거리에 대해서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지체하는 사이에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이 때 가장 먼저 화를 내야 할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혈루증 여인 때문에 지체하는 사이에 자기 딸이 죽었다며 여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이 여인에 대해서 그 어떤 불평이나 저주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딸을 뜨겁게 사랑하듯이 예수님 역시 당신의 딸 혈루증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수제자 세 명만 데리고 그의 집으로 가십니다. 집에 가보니 울고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아이가 죽었기에 이 문제로 부산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는 사람은 깨우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와 야이로 부부, 모두 다섯 명만 데리고 소녀가 죽은 방에 들어갑니다.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죽은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이 경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결국 죽어야 하기 때문에 “부활”(resurrection)이 아닌, “소생”(resuscitation)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부정한 두 여인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중년의 여성으로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12살 된 소녀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둘 다 12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12년을 혈루증 앓던 여인은 유출병으로 부정했고 12살 된 소녀는 죽은 시체가 되어서 부정해졌습니다. 누구이든지 간에 이 두 여자와 접촉하면 안 됩니다. 접촉하는 사람 역시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 조항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사람이 다른 물건이나 사람과 접촉하면 그 물건이나 사람 역시 부정해집니다.  

“부정”의 반대말은 “성결”이므로 이 부정한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거룩한 성전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정한 사람들은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아래로 이웃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가 깨집니다. 사회적 관계의 단절, 여기에 부정한 사람들의 슬픔이 있습니다!
       
마치 “썩은 사과 하나가 궤짝 속에 든 모든 사과를 썩게 한다.”는 서양 속담처럼 부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일체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전염성이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면 질병을 옮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은 일리가 있습니다. 행실이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행실을 닮을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금기는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와 같은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이 부정을 낳는다는 통념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과 접촉해도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도리어 그 사람이 깨끗케 됩니다. 거룩해집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살짝 접촉했는데도 깨끗케 되었습니다. 주님이 손을 잡아 준 죽은 소녀가 깨끗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거룩함은 일체의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해서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깨끗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런저런 죄악으로 오염되고 부정해졌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끊거나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고, 부정으로 인해서 산산조각 난 일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이로 역시 예수님이시라면 죽은 딸도 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요불굴의 믿음이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가지셔서 일체의 부정함에서 깨끗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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